[내 말 좀 들어줘]의 주인공 팬지는 매사에 부정적이고, 공격적이다. 지금 눈에 보이는 상황은 물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도 화를 낸다. 이미 집에서는 팬지 외에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다.
남편(커틀리)과 아들(모제스)이 함께 하는 저녁 식사 장면에서는 영원히 팬지만이 말을 한다. 가족들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비난하는 그이지만, 주변 이웃들에 대해서도 불만투성이다. 날카로운 가시처럼 돋아난 비난의 말들은 그대로 사방에 날아가 꽂히고, 가족들은 묵묵히 듣는다.
집에서의 장면들은 [내 말 좀 들어줘]라는 제목과 가장 잘 어울린다. 팬지는 끝없이 말하고, 커틀리와 모제스는 응답하지 않는다. 커틀리는 간간이 대화를 시도하지만, 힐난 거리를 찾는 데 일가견이 있는 팬지의 대응에 대화는 곧바로 끊기고 만다. 항상 방에만 틀어박혀 있어 팬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아들 모제스는 헤드폰을 끼고 자신만의 세상으로 도피한다. 모제스는 하루 한 번 산책하러 나가는 식으로 바깥과의 연결을 이어가고자 노력하지만, 팬지는 그것조차도 격려할 생각 없이 부정적으로 바라보기만 한다.
참으로 일관적이게도, 그는 집 밖에서도 다를 게 없다. 가구 매장에서도, 주차장에서도, 치과와 마트 계산대 앞에서도 팬지는 상대방에 대한 비난을 쏟아낸다. 트집 잡기에 가까운 비난에 상대방이 화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악화한다. 체념한 집 안의 사람들과는 달리, 집 밖의 사람들에게는 팬지의 비난을 견뎌 줄 이유가 없다. 결국 팬지의 이유 없는 비난은 팬지를 궁지로 몰아넣고, 그는 매번 도망친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장면들을 건조하게 보여준다. 카메라는 꽤 자주 팬지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지만, 그가 화를 내는 장면에서는 카메라가 멀어진다. 신(Scene) 전체를 조망하는 듯한 카메라 구도는 공격하고, 공격을 당하는 팬지의 감정을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장면들에서는 '말'의 맛에 중점을 두는 모양새다. 속사포 같은 비난의 말은 사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이유 없는 트집인데다가, 마치 랩 가사처럼 귀에 꽂히는 디스가 이어지다 보니 나중에는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절대 유쾌하지 않은 상황인데도 코믹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연출은 팬지의 감정에 주목하면서도 갈등의 장면에서는 그의 감정보다는 상황을 설명하듯 지나간다. 이 영리한 연출을 통해 관객들은 팬지를 실제 내 옆에 있는 듯한 사람처럼 느끼면서도, 영화 내내 그가 만들어내는 갈등은 한 발짝 뒤에서 바라보게 된다. 이는 인물에게 질리거나 지치기보다는 그 인물과 이후의 전개에 대한 호기심이 이어지도록 만든다.
결과적으로, 팬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의 이유가 궁금해진다. 누구보다 말을 들어달라고 하는 듯하면서도 그의 말을 들을 수 없는 상황만을 초래하는 팬지의 바탕엔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그에게 있는 이유가 드러났을 때, 우리는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팬지의 동생 '샨텔'과 그의 두 딸은 팬지의 가정과 철저히 대비되는 대상처럼 보인다. 누군가의 말을 계속 들어야 하는 미용사가 직업인 샨텔은 상대방이 편하게 말할 수 있게끔 대화를 능숙하게 주도할뿐더러 배려심이 깊다. 엄마와 친구처럼 지내는 쾌활한 딸들과 함께하는 샨텔의 집은 팬지의 집과는 다른 유쾌한 웃음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이들이라고 해서 "내 말 좀 들어줘"라고 외치고 싶은 순간이 없었을까. 회사에서 신제품 개발 기획을 맡은 샨텔의 딸은 열심히 의견을 피력했음에도 수용되지 못했다. 단순히 그의 능력 부족이나 미숙함에서 비롯된 결과라기엔 장면의 연출이 다소 찝찝한 걸 보니, 누군가 그의 말을 의도적으로 '들어주지' 않은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곧장 가까운 사람과 이야기하며 불쾌한 감정을 풀어낸다. 그렇다고 상사에 대한 비난이나 회사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다. 회사에서의 일은 스스로 적당히 맺음을 짓고, 다른 주제를 가져와 타인과 대화하면서 에너지를 얻는다. 샨텔 역시 언니 팬지에게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외치지만 팬지의 방어적 태도에 계속 실패한다. 하지만 지속해서 대화를 시도하며 결국 팬지의 속내를 끌어내는 데 성공하기도 한다. 건강한 대화의 방식이다.
결말부에서 팬지의 행동에 대한 이유가 어느 정도 설명되지만, 영화에서는 이로써 모든 갈등이 해결되었고 모두가 행복해졌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샨텔을 통해 마음을 정리한 듯한 팬지지만 수십 년을 걸쳐서 형성된 성격과 행동 방식이 쉽게 바뀔 수는 없다.
영화는 마지막에 상당히 인상 깊은 연출과 함께 남편인 커틀리에게 주목하며 마무리된다. 마치 팬지에 대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체념한 듯 보이는 그지만, 상처가 무뎌질 수 있을지언정 생기지 않을 수는 없다. 아들 모제스는 집 밖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지만, 집 안에 머무르는 커틀리의 깊게 뿌리 박힌 상처가 강조되는 장면에서는 영화 내내 느낄 수 없었던 절망감까지도 보인다.
수많은 사람이 매 순간 "내 말을 들어줘"라고 외친다. 영화는 그중 타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대비한다. 준비된 사람의 말은 상대방에게 닿고, 반대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타인의 말은 듣지 않으면서 내 말을 들어주길 바란 팬지는 자신과 주변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쉬이 낫지 않을 것이다. 그 바탕에 어떤 이유가 있든, 영화는 팬지의 이유가 모든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아는 듯하다.
누군가에게 닿는 말, 누군가를 찌르는 말, 누군가를 위로하는 말. 나는 누구에게, 어떤 말을 들어달라고 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에게 닿고 있는 말은 누구의, 어떤 말인가? 되돌아보고 생각하게 만드는 웰메이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