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지나가면>은 누군가에겐 잠깐의 일탈, 누군가에겐 생존일 문화와 세계를, 어른들의 접근이 차단된 그 영역을 온전히 관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영화는 ‘충분히 알지 못하는’ 어른들의 모순, 편견, 그리고 그 대척점에 놓인 아이들을 비춘다.
기준은 농어촌 전형을 위해 시골 마을로 전학을 온다. 뜨거운 햇빛, 낯선 집, 낡은 교실을 맞닥뜨린 기준의 경계심은 극에 달하고, 사춘기 소년 특유의 반항기가 얼굴에 군데군데 묻는다. 기준은 선생님과의 만남 전 새 아디다스 운동화를 벗지 않으려 버티다 결국 실내화로 갈아신는다. 까치발을 조금 들어야 보이는 창밖, 반질거리는 복도 너머로 보이는 푸릇한 풍경은 짜증을 돋굴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만남을 끝내고 복도로 나오니 신발이 사라졌다. 누군가 가져갔음이 분명하다. 누군가 기준의 신경을 제대로 건드린 것이다. 낡은 신발장 위 보란 듯 놓였던 하얀 운동화가 사라지자, 기준과 ‘그곳’의 경계선이 더욱 짙어진다. 작은 사건 이후 어둠이 내린 시골, 찌르르 벌레 소리를 들으며 일찍 누웠는데, 서울의 친구는 이제야 학원이 끝났단다. 기준은 잃어버린 신발이 거슬린다. 도무지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영화는 이내 빠르게 마을에 적응해 가는 기준을 비춘다. 그 나이대 아이들이 다 그렇듯, 기준은 반장 석호와 게임을 통해 친해져 어울리기 시작한다. 경계심 가득하던 얼굴에 웃음꽃이 피고, 친구와 게임을 즐기고 운동장에서 뛰어놀며 여름다운 여름이 펼쳐진다. 와중에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건, 어딘가 삐딱한 영준이다. 기준은 잘하는 것도 없어 보이고, 매일 사고나 치는 꾀죄죄한 영준이 거슬린다. 그런 영준에게는 ‘건들면 안 되는’ 형이 있다. 끽해야 두 살 차이지만, 강렬한 포스의 영문은 학교를 다니지 않고 동네 치킨집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어둑한 터널 속 오토바이에 앉아 돈을 뺏는 영문을 보며, 기준은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영문과 영준은 시스템 밖의 아이들이다. 관객을 포함한 어른들을 형제에게 접근할 수도, 형제를 깊이 알 수도 없다. 허름한 집에 살면서 복지사의 도움마저 거절하는 형제는 경계와 수군거림의 대상이다. 어린 나이에도 각종 범죄 행위에 능숙하며, 집은 노는 아이들의 아지트가 된 지 오래다. 형제의 비행은 아스팔트 위 아지랑이처럼 아이들 사이에서 전염된다. 기준은 눈썹 아래로 내려오는 영문의 앞머리와 매서운 눈빛을 따라 해본다. 어색한 욕설과 사투리는 덤이다. 아이들의 문화는, 동경과 어설픈 모방으로 어른들의 예상보다 빠르게 확산한다.
영화 후반, 기준은 자처해서 아이들의 돈을 뺏고, 영준을 앞세워 자전거를 훔치려 든다. 새로운 환경에서 기준에겐 모든 과정이 체험이고 재미이지만, 그곳에 발을 붙이고 있는 형제에겐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영준의 얼굴에 난 작은 상처에도, 영문은 크게 흔들린다. 형제에겐, 축구나 싸움 따위에서 얻은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면서 “사내애들이 다 그러면서 크는 것 아니겠냐”며 웃어줄 부모님이 없다. 동생의 얼굴에 난 상처는 울타리의 부재를 일찍이 깨달은 영문의 눈엔 그 무엇보다 위험한 신호다.
마을 아이들의 축구 대회가 끝난 후, 부모님은 그늘 밑 돗자리를 펴고 앉아 아이들의 땀을 닦아주고 과일을 먹여준다. 형제는 해가 내리쬐는 돌계단에 앉아 숨을 고른다. 돗자리 위 복작복작하고 단란한 세계와 돌계단의 거친 회색빛 세계가 대비를 이룬다. 시야 밖의 영문과 영준은, 바위 사이 간신히 자리 잡는 잡초처럼 억세고도 여리게 자란다. 돗자리 위 아이들은, 멋져 보인다는 이유로 형제를 모방한다. 비행을 마친 후, 돌아갈 곳이 있는 아이들의 여유다.
영화 속 어른들은 다정한 미소 뒤 냉정한 분류와 편견으로 아이들을 정의하고 배척한다. 어른의 시각에서 자녀가 ‘어울려도 괜찮은’ 아이들과 ‘멀리해야 하는’ 아이 정도는 금세 분별할 수 있다. 기준의 엄마는 집에 놀러 온 석호에게 은근슬쩍 성적을 물어본다. 그러곤 지인과의 통화에서 석호가 “괜찮아 보인다”라며, 근데 시골 아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남의 집에서 양말을 벗더라, 등의 평가를 늘어놓으며 웃는다. 영준에 대해선 “딱하다”라는 포장으로 아이의 상황을 판단한다. 기준 엄마가 철저한 외부인의 시각과 말들로 형제를 보호해야 한다고 피력할 때, ‘그렇고 그런’ 아이들에 대한 사회적 프레임과 손쉬운 연민의 기시감이 느껴진다.
기준 엄마의 피상적인 동정과 염려는, 형제의 기류가 기준에게 닿자마자 날카로운 경계로 바뀐다. 기준은 날이 갈수록 수위 높은 일탈을 지속하며, 영문에게 게임기를 넘기고 형제와 부쩍 친해진다. 반에선 뒷자리에 앉아 무섭게 분위기를 잡고, 석호와의 사이가 틀어져도 그저 형제를 닮아가는 데 여념이 없다. 그런 기준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 엄마는 영문을 찾아가 기준으로부터 멀어지라고 말한다. 변해가는 기준을 앞에 두고 절망적인 엄마가 할 수 있는 건, 모든 문제의 근원인 영문에게 기준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는 것뿐이다.
기준 아빠는 영문의 친구가 탄 오토바이와 충돌하며, 영문을 처음 만난다. 상황을 되짚거나 이유를 묻는 등의 적확한 의사소통을 제쳐두고, 영문에게 가장 절실할 수밖에 없는 돈을 건네 상황을 무마시킨다. 마치, 거래라도 하듯, 형제의 집에 허락도 구하지 않고 들어가 돈을 내밀며 ‘착하게 굴라’라며 암묵적으로 강요한다. 경계의 대상으로 정의되었던 형제는 이제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존재들로 범주화된다. 위험한 눈빛의 기준에게, 기준 엄마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너 왜 이렇게 됐니”라며 묻는다. 이렇게 키운 적이 없는데, 억울하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마치,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착한 아들을 완전히 망쳐놨다는 듯.
기준은 신발 가게에서 일어난 절도 사건과 관련해 경찰서에 출석하게 된다. 경찰들은 문밖 취조실의 영문 영준 형제를 두고, 기준에게 “너가 저 애들과 같은 줄 아냐”라고 묻는다. 기준은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 영화의 질문이다. ‘그렇고 그런’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가 어떻게 나뉘고, 각각 어떤 대우 속에서 어떤 모양으로 자라나는지 질문하는 첫 인물이 13살 아이이다. 기준의 엄마와 기준, 그리고 경찰관들은 전등 아래 모여 문턱 밖의 어둠 속 형제를 바라본다. 빛의 대비와 낮은 문턱이 두 세상을 나누고, 어둠은 고립된다. 경찰서에 갔다 온 날 밤, 기준의 집 유리창을 뚫고 벽돌이 날아든다. 칠흑 같은 어둠으로부터 날아든 그것은, 형제가 던지는 처절한 경고장이자 작별 인사다.
여름 동안 평소와는 조금 다른 치기로 엄마를 당황케 했던 기준은 다시 ‘원래’로 돌아가기 위해 동네를 떠난다. 떠나기 전, 기준의 엄마와 선생님은 운동화를 훔친 아이의 모습이 담겼을 CCTV를 확인한다. 복원된 화면이 일그러져 운동화를 훔치는 세 아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가장 분명하게 보이는 건 영준의 파란 티셔츠다. 기준의 엄마는 “그래. 영준이 맞네”라고 말하고, 어른들은 분별이 옳았다는 사실에 내심 평온해진다. 그런데, 화면에는 총 세 명의 실루엣이 보인다. 기준의 엄마는 묻는다. “나머지 두 명은 누구죠?” 선생님은 말한다. “영준이 밖에 안 보이네요.” 특정 상황에만 어른들의 시야에 발이 묶이는 아이들이 있다. 영준이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준이만 보려고 하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다. 두 어른은 나머지 두 명 또한 운동화를 탐냈다는 사실은 묻고 넘어간다. 구태여 알려고 하지 않는 게 모두에게 편한 쪽일 것이다.
기준은 꾸준히 문제의 원흉이 되었던 게임 기기를 분리수거장에 후련히 버리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채비를 한다. 버려진 기기를 줍는 건, 쓸 만한 게 있을까, 싶어 분리수거장을 서성이던 영문 영준 형제다. 기준이 가볍게 내다 버린 그곳에서의 찰나를 주워 담는 형제를 보니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검은 세단을 탄 기준과 엄마, 그리고 오토바이를 탄 영문과 영준의 눈이 마주친다. 이내 세단은 미련없는 움직임으로, 매끄럽게 형제를 지나친다. 형제는 차를 바라보다가, 빈 도로를 달린다. 도시의 복잡한 풍경이 외딴섬 같은 두 뒷모습과 대조된다. 서울로 올라간 기준은, 새로운 친구들에게 영문과 영준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부풀린 무용담으로 여름의 낭만을 회상하지는 않을까. 흉흉한 소문이 되어갈, 더더욱 억센 잡초로 자라날 그 형제와의 여름은, 어떻게 기억되고 잊힐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