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뮤지컬을 보았다. 극의 시작 직전, 영화관보다 몇 배는 더 큰 것 같은 극장의 모든 불빛이 꺼지는 그 순간만큼은 언제나 가슴이 두근거리게 되는 것 같다. 이 암막의 끝에서 나를 환영할 새로운 이야기는, 조명의 점등을 기다리고 있을 배우는 나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을까?
오늘 나에게 전해진 것은 한 학자의, 여자의, 이방인의, 그리하여 군중의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리 스클로도프스카 퀴리. 노년의 마리와 그의 딸 이렌의 대화로 시작된다. 이렌에게 마리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그가 왜 이렇게 미친 듯이 연구에 집착하는지, 죽을병에 걸려서마저 지나치게 덤덤한 유서와, 같이 묻어 달라는 정체불명의 흙주머니는 도대체 뭔지. 왜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냐며 답답한 속을 털어놓는 딸에게 막힌 둑에 송곳을 찌른 듯 마리의 한 마디가 터져 나온다.
“길잡이 흙이야.”

안느와 마리
기차에서 만난 인연을 계기로 죽음 전까지 우정을 이어갔던 안느와 마리의 이야기는 극적이고 사랑스럽지만, 실존 인물에 기반한 등장인물인 마리, 이렌, 피에르와 달리 ‘안느 코발스카’는 허구의 창작 인물이다.
그럼에도 안느는 매력적이다. ‘마리’라는 한 명의 인물만으로는 다 할 수 없는 마리 퀴리의 이야기를 빛내주는 별이 바로 안느이기 때문이다. 주기율표라는 지도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겠다던 마리에게 꼭 그 일을 하라며 안느가 건네준 주머니가 바로 길잡이 흙이다. 돌아갈 곳을 알려주는 곳.
안느는 마리의 대척이자 연장선이다. 아마 평생을 돌아가지 못할 고향을 손에 쥐고 출발한 이민자, 아무리 남장을 해봐도 결코 남자가 될 수는 없는 여자임과 동시에 과학을 모르는 노동자, 마리를 좋아했던 순박한 신봉자라는 점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인물이다.

마리와 폴란드
라듐 시계 공장에서 일하는 안느의 동료들은 폴란드인이다. 그들 또한 고향 땅을 떠나 머나먼 프랑스로 온 이주 노동자고, 따라서 굳은 노동을 도맡아 해야 하는 낮은 계급 사람들이다. 당대의 많은 폴란드인들이 블루칼라 직종에 종사했다고 한다. 안느의 동료로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에게 하나하나의 꿈과 이야기를 부여한 극이 달가웠다.
소르본 대학에서의 마리는 ‘블랙 미스 폴란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름’이라는 소재 자체가 극 내내 마리를 괴롭히는 존재인데, 돌이켜보면 마리의 가장 강한 정체성을 이루는 것이 처음 등장했던 별명인 ‘미스 폴란드’였다고 생각한다. ‘폴렉’이라는 명칭을 누구보다 싫어했던 그에게 ‘폴란드의 별’이라 불러주는 안느와 노동자들의 편지가 얼마나 반갑고 또 소중했는지, 마리를 연기했던 박혜나 배우의 연기가 실감 나게 전해주었다.

군중과 폴란드
안느의 등장 장면은 군상극의 느낌이 날 정도로 섬세하게 연출됐는데, 특히 ‘사장님’인 루벤과 함께 등장하는 장면들이 생생했다. 실제로 이런 사장이, 이런 노동자가 있었을 것만 같은 장면들이 있었다. 마음에도 없는 조문과 노동자에 대한 존중 없는 운영 결정 같은 것들 말이다.
뮤지컬 [마리 퀴리]는 마리 퀴리라는 과학자 외에도 당대 라듐 공장에서 죽어갔던 수많은 ‘라듐 걸스’를 소재로 해 제작된 극이다.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죽어 나갔던 수많은 목숨을,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려 했던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들 또한 많았다.
생각해 보면, 마리 퀴리라는 인물은 이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빠진 마리의 이름을 남편인 피에르가 올리고, 당시의 노동자였던 폴란드계 이민자들의 입을 통해 고국으로 그의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약소국 출신의 여자가 폴란드의 별이 되기까지, 그의 이야기를 전했을 수많은 ‘군중’ 속 사람들이 뮤지컬 [마리 퀴리]에도 있다. 이 점이 이 극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라듐, 나의 이름
1막의 끝, 라듐이 인체에 해로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마리의 절박한 노래가 심금을 울렸다. 내가 이뤄낸 성과만이 나인 것 같고, 나 스스로는 절대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란 생각. 현시대를 살아가다 보면 누구라고 흔하게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닐까 싶다.
성취랄 것은 이것 하나인데, 이것마저도 잘못되었다면?
지금은 나를 찬양하는 저 사람들이 내 라듐을, ‘나’를 다시 비난한다면 내가 설 자리는 어디일까?
마리의 고민은 설 자리 없는 모든 이들의 고민이다. 괴짜, 이민자, 외국인. 유일한 여자 입학생, 남편과의 결혼으로 신분 상승한 여자, 뜨개질도 못 하는 반편이. 이 중 몇 개의 명칭이 참 남의 일 같지 않게 다가온다. 몰아붙여진 마리가 방사선의 항암 작용에 매달리는 것 또한 자연스럽게 공감이 간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너는 나의 별
그러나 여기서 안느가, 또 다른 내가 나를 일깨운다.
아냐, 마리. 나는 당신이 ‘당신’이어서 좋았던 거야. 그래서 존경했던 거야.
네 꿈은 나의 꿈이고, 너는 언제나 나의 별이야.
로맨틱하다. 마리가 내적 갈등의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안느는 이를 외적 갈등으로 갈음함과 동시에 마리의 고뇌를 승화한다. 그의 죄를 지적하고 그럼에도 너는 나의 친구라며 감싸안는다. 내 눈물을 가장 많이 뽑은 장면이다.
길잡이 흙이 이끄는 곳으로 가
안느는 그렇게 마리의 별이 되었다. 마리 퀴리가 폴란드의 별이었던 것처럼 폴란드 또한 폴란드인 마리 스클로도프스카에게 커다란 별이었을 것이다. 옛날 옛적, 우리 선조들의 시대부터 우리는 별을 보고 길을 찾았다. 결국 첫 등장에서 안느가 건네준 길잡이 흙이 그의 정체성이었던 셈이다.
안느는 마리뿐 아니라 관객석에 앉은 우리에게도 길을 안내한다. 극의 끝, 마리에게 안느의 편지가 전해진다.
나 네가 이룬 모든 것들을 지켜봤어. 너의 첫 강의, 네가 찾아낸 방사선이 살린 목숨을 지켜봤어. 애썼어, 마리.
정말 자랑스럽다는 목소리로 이어지는 전민지 배우의 목소리가 왜 그렇게 감동적이었는지 모르겠다. 이쯤 되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눈물과 함께 봉해져 나에게 도착한 이야기는 한 학자의, 여자의, 이방인의, 그리하여 군중의 이야기. 꿈과 희망, 잘못된 선택과 후회, 그리고 약속을 지키는 한 걸음 한 걸음의 발자국을 듣고 보았다.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