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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마리퀴리 메인포스터, 제공 라이브(주).jpg

 

 


위인전에서 걸어 나오는 <마리 퀴리>


 

어릴 적 위인전을 읽을 때마다 든 생각은 이 사람은 나와 다르다는 거였다. 의지나 열정이나 지식이나 환경이 달라도 너무 달라서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나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뛰어난 작품이라고 높게 쳐주는 영화에 모두가 박수를 치듯이 일단 반사적으로 기계적으로 박수를 치며 그런 책들을 덮었다. 그리고 어느새 그런 책들을 멀리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삶에서 성공과 교훈만을 퍼서 떠먹여 주는 책들. 누군가의 삶에서 업적만을 천편일률적으로 집어내 편집한 책들을.


어쩌면 그때 읽은 위인전 중에 마리 퀴리의 위인전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무슨 원소를 발견했고 노벨상을 받은 것으로만 기억되는 사람의 책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삶을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내가 본 소설엔 위인이 나오는 경우가 적었다. 대부분 범인(凡人)이었다. 그들은 지독하게 평범했고 가난했으며, 벗어날 수 없는 늪에 빠진 듯 허우적댔다. 뛰어난데 실패하는 사람도, 못난데 기회를 얻는 사람도 있었다. 벗어날 수 있는데 벗어나지 않기로 한 사람도 있었다. 세상에 위인이 있을지 몰라도 삶에는 위인이 없다는 게 소설을 읽으면서 나의 지론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 뮤지컬 <마리 퀴리>가 못내 궁금했다. 위인전의 재생산일지, 아니면 삶의 비하인드를 길어내는 작품일지.

 

 

01. 마리퀴리_캐릭터포스터_마리_김소향.jpg

 

 

 

이중의 차별을 이겨내며 과학자로


 

뮤지컬은 노년의 ‘마리 퀴리’(김소향 배우)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삶의 반추가 이 극의 목적인 것이다. 뮤지컬은 세상에 가져다준 성과 측면이 아닌 오로지 마리 퀴리의 입장에서 그녀 삶의 하이라이트를 비춘다.


그 시작은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로 가는 열차 안. 거기서 우연히 만난 ‘안느 코발스카’라는 여성(강혜인 배우)은 소르본 대학교에 입학하는 그녀를 응원해 준다. 그에 힘 입어 마리는 러시아 식민 지배를 받는 폴란드인이자 여성이라는 이중의 차별을 이겨내며 학계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한다. 그러다 만난 게 과학자 ‘피에르 퀴리’(테이 배우)다. 퀴리는 대부분 사람들이 한 것처럼 ‘여자가 왜 과학을 하느냐.’ 묻는 대신, ‘당신은 왜 과학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퀴리는 말한다. 궁금해서요. 궁금하게 해서요. 명쾌하면서도 명확한 대답이다.


둘은 동료이자 연인으로서 과학계에 족적을 남기기 시작한다. 그러다 발견한 게 ‘라듐’. 그 공로로 그들은 노벨상을 수상한다(마리는 여성 최초 노벨상 수상자다).

 

 

 

이야기에 드리우는 먹구름


 

이 장면까지만 보면 여느 위인전과 다를 바가 없으나, 이야기에 이제 먹구름이 드리운다(나는 그 먹구름이 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라는 걸 예감했다). 인류의 선을 위해 과학을 한다는 모토를 갖고 있던 퀴리 부부는 라듐에 대한 특허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라듐을 전 세계에 ‘상품’으로 퍼지게 만든다. 학생인 마리의 가능성을 보고 그녀를 후원했던 기업가 ‘루벤 뒤퐁’(강태을 배우)은 라듐을 프로메테우스의 불이라며 칭송한다. 그는 라듐을 여러 상품으로 내걸고 백화점에 납품하면서 돈방석에 앉는다.

 

 

10. 마리퀴리_캐릭터포스터_루벤_강태을.jpg

 

 

그 장면은 마치 뮤지컬 <위키드>의 ‘에메랄드 시티’(유색인종이 자유롭게 다니는 도시)처럼 초록빛 천국으로 비치는데, 관객인 우리는 알고 있다. 라듐은 방사능물질이며 인체에 아주 해롭다고. 그래서 라듐 화장품 판매원들과 그걸 만드는 공장 사람들이 자신의 피부에 마치 크림처럼 라듐을 바르는 장면에선 누구나 소름이 돋는다. 그때 나는 무대와 관객석 사이의 백 년이라는 시간적 거리감을 느꼈다. 지금 우리가 보기엔 무대의 상황이 아주 무섭지만, 무대 속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럼 지금 우리도 그렇게 모르고서 생활에 편입시킨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백 년 뒤의 누군가가 지금 우리 삶의 무언가를 보며 경악하고 있진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삶의 절정에서 만난 낭떠러지


 

라듐의 발견자였던 마리는 라듐으로 루벤의 병원 환자들의 임상실험(시력 회복에 관한)을 하면서 점점 라듐이 가진 위험성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마리는 실험을 멈출 수가 없다. 얼마나 위험한지를 정확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규명되지 않고 일단 라듐의 위험성부터 알려지면 아무도 라듐을 쓰지 않을 것이고 그건 과학자인 자신의 삶이 끝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1부의 마지막 장면에서 마리는 라듐을 자신과 동일시하기에 이른다. 내가 온 삶을 바쳐서 찾아낸 무언가가 내 삶을 끝내버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노래하는 마리의 모습에서 강한 아이러니가 드러난다. 세계대전으로 인해 인류의 악이 퍼져나가고 있던 시기, 과학만큼은 인류의 선에 두고 싶었던 마리의 바람이 그녀의 의지와 무관하게 악으로 기울고 있다는 거에 나도 괴로웠다.

 

 

 

두 번의 이별


 

08. 마리퀴리_캐릭터포스터_피에르_테이.jpg

 

 

마리는 라듐의 해로움을 정확히 규명하기 위해 자신의 몸에 실험하기에 이르는데, 그걸 본 남편 피에르는 마리와 동참하기 위해 무릎에 라듐을 묶어둔 채, 공장 사망자들을 부검했던 의사를 만나러 떠난다. 그 길이 그들을 영원히 이별하게 만드는 길인 것도 모르고. 피에르는 의사를 만나고 돌아오던 길에 마차에 치여 죽는다. 사인은 라듐으로 인한 무릎 연골의 손상. 그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길을 건너다 마차에 치인 것이다. 마리는 자신의 실험실에 부고 소식과 함께 찾아온 피에르의 혼과 인사를 나누며 이별한다.


한편, 아주 멀리서 라듐의 위험성을 깨닫는 안느가 있다. 안느는 마리의 도움으로 루벤의 공장에 취업하여 일하고 있었는데, 주위 동료들이 하나씩 죽어나가는 걸 보고 수상하게 여긴다. 루벤의 병원에서 부검해도 나오는 사인은 죄다 매독, 즉 성병으로, 개인의 책임으로만 치부될 뿐이다. 그러나 안느는 의심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녀가 직접 보았던 동료들의 증세는 매독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마리는 루벤을 찾아가 라듐을 인체에 적용하는 모든 공장의 가동을 중단해달라고 한다. 그러나 루벤은 라듐으로 시력 손상을 회복하는 실험에서 성과를 내야 한다며 마리를 계속 병원에 머물게 하고 몰래 공장을 가동한다. 동료들의 계속되는 죽음을 보다 못한 안느, 이제는 자기 차례가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진 안느는 직접 루벤을 찾아갔다가 마리와 재회한다. 서로의 삶을 응원하며 멀어졌던 두 친구가, 인체의 세포를 무력화시키는 라듐을 세상에 내놓은 가해자와 그것의 피해자로 만난다.


두 사람을 동시에 루벤의 속셈을 알아차리며 그들은 서로의 사정을 알게 되는데, 그때 안느가 태도를 바꿔 마리에게 건네주는 위로는 슬프면서도 뜻깊다. 라듐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점점 걸어 잠그고 있던 마리에게, 안느는 당신은 나의 별이었다며 노래한다. 마리는 라듐이 아니라 별이라고. 안느는 안느대로 노동 현장에서 투쟁하고, 마리는 마리대로 그 위험성을 정확히 규명하고 알리겠다며 그 둘은 이별한다.


마리가 라듐의 위험성을 정확히 규명해 세계 각지의 실험실에 규정이 생기고 논란이 잠재워지면서 이야기는 현재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녀의 딸 ‘이렌 퀴리’를 통해 안느가 멀리서 그녀의 삶을 지켜보며 응원했다는 걸 알리고 두 사람의 우정과 마리의 다른 업적을 조명하며 끝이 난다.

 

 

 

안느를 통해 보는 마리의 삶과 현대


 

05. 마리퀴리_캐릭터포스터_강혜인.jpg


 

뮤지컬을 다 보고 나서 찾아보고 알게 된 바로, 안느는 실존 인물이 아니었다. 안느는 가상인물이었다. 그 점이 놀라웠는데, 생각해 보면 마리의 삶이 위인전으로만 남지 않고 이런 작품이 되기 위해서 안느는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그녀가 있었기에, 나는 이 작품을 마리의 삶(하이라이트와 비하인드 모두)을 재해석하는 작품인 동시에, 현대 작품으로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마리가 안고 간 모순과 슬픔에 깊이 공감하기도 했지만, 보랏빛 조명이 드리운 죽은 노동자의 혼들 앞에서 안느가 분노의 노래를 쏟아낼 때가 정말 슬펐다. 보는데 괜히, 고된 노동을 끊임없이 인내하며 삶의 무수한 가능성을 꿈꾸다 유명을 달리한 이들이 떠올랐다. 2인 1조 같은 간단한 규칙을 지키지 않았고, 무수한 경고와 사전 절차를 무시해서 벌어진 일들, 그러니까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방치되어 죽음으로 이어진 사건들이. 그래서 이 이야기가 굉장히 멀고도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인간이지만 너무나 인간 되기가 힘든 세상이다. 욕망을 꿈이라 포장하는 사람들과 꿈을 욕망이라 생각해 주저하는 사람들이 모두 있는 세상이다. 욕망과 접촉하기 쉬운 이기심을 점검하고 꿈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누군가의 삶이 함부로 짓밟히는 일부터 없어져야 할 테다. 안느가 부르짖은 분노의 노래는 그런 노래였을 테고, 안느가 마리에게 전하고자 한 별의 의미도 그런 것이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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