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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과학도, 특히나 여성 과학도라면 도서관에 빼곡히 꽂힌 세계 위인전집 중 '마리 퀴리'라는 이름 앞에서 한번쯤 마음이 머무른 적이 있을 것이다. 노벨 물리학상과 노벨 화학상, 두 번의 노벨상을 수상한 최초의 인물이자 여성 차별이 만연하던 시기에 폴란드 출신으로 이중의 차별을 겪으면서도 말년까지 연구를 놓지 않은 과학자. 사실만 나열해도 그저 천재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경외감과 언젠가는 저런 위대한 발견을 하고 싶다는 내밀한 갈망이 함께 차오른다.

 

그러니 이미 책장이 덮인지 오래인 마리 퀴리의 생애를 배우들의 생생한 연기로 다시 마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경탄스러운 경험이다.


 

2025 마리퀴리 메인포스터, 제공 라이브(주).jpg

 

 

 

넘버 "모든 것들의 지도": 제 이름을 찾을 거야


 

뮤지컬 마리 퀴리는 단순한 위인의 업적 나열성 뮤지컬은 아니다. 물론 마리 퀴리는 그 생애만 좇아가도 소위 '이과 뽕'이 차오르게 하기에 충분한 서사를 가진 인물이지만, 뮤지컬은 여기에 '안느 코발스카'라는 가상의 인물을 추가한다.

 

현실을 바탕으로 한 극에서 추가된 가상의 인물은 연출자가 강조하고 싶은 극의 방향성을 단적으로 드러내기 마련. 안느는 마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때로는 대립하며 마리 퀴리의 고뇌를 심화시키고 그녀의 행동에 대한 감정적 이유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주요 인물은 바로 실제 역사에서도 마리 퀴리와 노벨상을 공동 수상하며 그녀의 든든한 연구 동료였던 '피에르 퀴리'. 그는 여전히 마리의 동료이자 남편, 그리고 삶의 동반자로 존재하지만 서사에서 강조되는 인물은 아니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과는 어느 정도 괴리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극을 감상하는 것이 좋겠다.


 

04. 마리퀴리_캐릭터포스터_마리_김려원.jpg

 

 

마리 퀴리는 피에르와의 첫 대면에서 "당신은 왜 과학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녀의 답변은 궁금해서, 그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서. 그렇게 실험을 하다보니 사람들이 이것이 과학이라고 했다고 답한다. 당시의 세상은 지금보다도 더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것들 투성이었을 것이다. 그 '예측할 수 없고 알려지지 않은' 신비를 밝히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가. 아마 그것이 가장 직관적이고 마리가 평소에 익히 생각해 오던 대답일 것이다.

 

과학을 하는 데 이보다 더 명쾌한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마리는 안느와의 첫 대면에서는 조금 더 낭만적인 이유를 든다. 이 차이가 뮤지컬이 만들어낸 허구와 기록된 사실, 감정과 논리의 간극일지도 모르겠다.

 

 

불린 적 없는 이름 없는 것들

자리를 찾아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 

 

한 번도 누구도 불러준 적 없는

이름 없는 것들 우리들

차고 어두운 빈자리 제 이름을 찾을 거야

 

- 모든 것들의 지도, '마리 퀴리' 넘버

 

 

뮤지컬의 첫 넘버, "모든 것들의 지도"에서 마리는 말한다. 불린 적 없는 이름에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고. 그리고 그 이름 없는 것들은 '우리'로, 마리 퀴리 본인도, 넘버를 듣고 있는 안느도 그 대상에 포함된다. 아직 아무런 성취를 내지 못한 폴란드 여성 과학자 마리와 노동자 인권을 위해 투쟁하다 해고당한 여성 노동자 안느. 아직 세상의 지도 속에 자신의 밝은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차갑고 어두운 이름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여 이름을 붙여 당당히 세상의 원소로 등극하듯 그들 자신도 언젠가 제 이름을, 제 자리를 찾기를 원했으리라.

 

 

 

넘버 "또 다른 이름": 라듐, 그건 나


 

마리에게 인간적 서사를 부여하기 위한 장치는 하나 더 있다. 그녀의 연구 성취 뿐 아니라 고뇌를 추가하기 위한 안느의 존재 자체. 안느 코발스카는 미국의 '라듐 걸즈'라 불리는 라듐의 피해자들을 대변한다. '라듐 걸즈'는 미국의 군용시계에 라듐을 이용해 숫자를 그리는 일을 했던 소녀들로 프랑스가 주 활동 무대였던 마리 퀴리와 실제 역사에는 큰 접점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뮤지컬은 마리의 친구인 안느가 그녀들과 비슷하게 라듐공장에서 일을 하게 설정함으로써 마리 퀴리가 보다 직접적으로 라듐의 부작용을 대면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라듐공장에서 일하는 안느와 동료들은 '폴란드의 별'이라며 마리를 우러러보고 라듐처럼 본인들의 인생도 빛날 거라 믿지만 결국은 그 라듐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들의 병명은 매독. 수상함을 느낀 안느는 마리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마리는 이미 투자자이자 라듐 공장의 대표인 '루벤 뒤퐁'의 감시하에 연구실을 떠나 병원으로 거처를 옮긴다.

 

 

06. 마리퀴리_캐릭터포스터_안느_이봄소리.jpg

 

 

뮤지컬에서는 이 시점에서 마리도 이미 라듐의 위험성을 의심한다. 그리고 피에르 퀴리와의 첫 대립. 여기서 마리 퀴리의 인간적인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이 둘은 같은 곳을 바라보지만 어쩔 수 없는 입장의 차이가 있다. 이번은 미뤄두고 다음에 다시 시도해보자는 피에르의 말에 마리는 처음으로 그와 대립한다. "너에게는 다음이 있지만, 나에게는 다음이 없어."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도 다음에. (그녀는 실제 역사에서 결국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가입하지 못했다.) 연구도 다음에.

 

프랑스 과학계의 뿌리깊은 성차별에 의해 위해가 밝혀져 연구가 중단되면 자신에게 다시는 연구를 재개할 기회가 없을 거라는 공포에 사로잡힌 마리는 라듐의 치료 효과를 밝혀낸 후에 이 위험성을 함께 공론화하기로 결정한다. 공장은 문을 닫기로 했지만, 결국 공장문을 닫지 않은 것은 물론 결국 라듐의 위험성에 노출되는 일반 시민들의 건강을 어느 정도 타협한다는 의미다.

 

 

넌 이상한 괴짜야

넌 떠도는 이민자

넌 설쳐대는 폴렉

내 이름 없었지

홀로 작은 유성처럼 떠다니는 짙고 푸른 너

제 몸에 상처를 내어 폭발하는 독하고 모난 나

나의 또 다른 이름

나의 또 다른 이름

너 라듐

바로 너

그래 바로 나

라듐

그건 나

 

- 또 다른 이름, '마리 퀴리' 넘버

 

 

마리 퀴리는 이미 본인과 라듐을 동일시하고 있었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넘버가 바로 넘버, '또 다른 이름'이다. 떠돌고, 설쳐대고, 어두운 빈자리에서 연구를 거듭하며 마침내 발견해 낸 빛을 내뿜은 라듐은 그녀가 인생에서 이루어낸 다시 없을 성취. 연구에 실제로 참여한 것이 맞느냐는 의심마저 받은 마리로서는 이 물질이 자신을 증명하고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는 연구를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물질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폭발하는 라듐의 성질은 오히려 스스로를 갉아내며 연구를 지속하는 마리가 더 라듐에 이입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특징이 됐을 뿐. 세상이 마리 퀴리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기에 마리 퀴리는 그들이 사랑하는 라듐을 본인의 다른 이름으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넘버 "그댄 내게 별": 너의 꿈이 나를 설레게 했어


 

물론 마리 퀴리와 라듐을 어떻게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으랴. 그렇지만 연구자의 사생활이 연구 업적과는 별개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실제 마리 퀴리의 말처럼 연구 업적이 곧 연구자 본인은 아니다. 이 때 마리 퀴리를 붙잡을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사람으로서 맺었던 개인적인 관계들. 또 다시, 안느다. 안느에게 마리는 라듐이 아니다. 그보다 더 빛나는 밝고 푸른 별 하나다. 안느가 마리에게 불러주는 '그댄 내게 별'이라는 넘버는 안느에게 마리의 존재가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별이 제자리를 잃었을때 수많은 별들 사이를 헤맬때

내가 너의 옆에 있어줄게

밝고 푸른 그 별 하나


넌 항상 나였어

너의 꿈이 나를 설레게 했어

난 항상 너였어

내 손을 잡은 너를 따라 멀리 뛰어도 

조금도 숨차지 않아

 

- 그댄 내게 별, '마리 퀴리' 넘버

 

 

설사 별이 헤맬지라도, 마리가 나아가는 그 길이 누구도 개척하지 않은 길이었기에 그녀가 꾸는 꿈은 당시 소수자였던 모든 이들을 기대하게 만든다. 마리 퀴리가 해냈으니, 그녀가 새로운 길을 개척했으니 그 다음을 따라가는 것은 훨씬 쉬운 일. 그리고 그 단순한 감사를 넘어 안느는 마리를 믿는다. 연구 결과가 설령 실패이고 그 연구가 치명적인 위해를 품고 있더라도 결국 그 또한 마리가 해결할 것이라고 믿기에. 이 마음은 우정을 넘은 경애다. 그렇게 마침내 다리가 연결되고 둘의 마음이 통하는 부분은 단연 2막의 하이라이트. 여기서 둘의 감정적 교류가 조금 더 보여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직후 피에르의 죽음으로 그녀의 인생에 다시 큰 변화가 발생하며 둘의 관계성이 흐지부지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업적보다는 마리 퀴리의 인간적 고뇌를 다룬 작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이룬 찬란한 업적이 결코 흐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여전하게도 빛나는 별이며 마침내 세상에게서 이름을 부여받아 제자리를 찾았다. 퀴리, 마리 스크워도프스카 퀴리의 그 빛나는 이름을 위하여.

 

 

09. 마리퀴리_캐릭터포스터_피에르_차윤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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