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1. 첫발 – “하라고요? 그냥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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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생각해보면, 보통 색다른 경험은 내가 큰 결심을 하지 않는 한 주변 사람들을 통해 겪게 되는 것 같다. 이번 <백조의 호수>도 그렇다.


클래식 공연 리스트는 줄줄이 꿰고 있었지만, 유니버설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공연이 있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내 곁에 있는 취미 발레인(내 눈에는 거의 전공생)의 선예매를 도와주다가, 함께 관람까지 하게 되었다. 이 기회에 나도 견문을 넓혀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 공연을 명분 삼아 7월 12일 줄라이 페스티벌 ‘쉬니트케’ 편을 함께 관람했으니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정말 어려웠지만..)


사실 발레가 이토록 일상 가까이에 있을 수 있는 장르인지 몰랐다. 클래식보다 훨씬 멀게 느껴지는, 내가 이번 생에는 절대 향유하지 않을 문화예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발레에 정말 진-심이신 취미인과 친구가 되면서, 발레의 매력이 무엇인지 살짝 궁금해졌다.


상대는 꽤 종종 “발레 해보세요. 아니, 하시라니까요?” 라고 권유하지만, 아, 절대 못한다. 내 몸이 불쌍하고, 그 광경을 목격하실 선생님도 가련하고... 우리 모두의 자존감을 위해 발레 학원을 가는 것보다 <백조의 호수>를 보러 가는 게 훨씬 낫다.


 

 

2. 발끝으로 들어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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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그렇다면, 내가 발레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무엇이었나? 나열해보자. 토슈즈를 신는다. 높게 점프하신다. 발끝으로 서 있다. 복장이 하늘하늘 예쁘다. 근력이 장난 아니다. 발레 무용수한테 발차기 맞으면 큰일 난다. 자세가 바르다. 이 정도겠다.


그렇다면 발레극은? <백조의 호수>에 대해 아는 바가 있었나? 전혀. 유일하게 아는 건 “따-라라라라-라-라라-” 하는 허밍뿐이다. 그 상태로 냅다 19일, 오페라 극장에 발을 들였다. 그러니 얼마나 갖가지 요소들이 신기했겠는가? 약간 해외여행을 나와, 전혀 다른 풍경에 신기해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기분이었다.


클래식 공연을 관람하러 콘서트홀에는 자주 와봤지만, 빙글빙글- 층고 높은 오페라 극장은 처음이었다.


신기했던 건, 관람객분들의 신체 비율이 다들 무용수같으셨다는 점이다. 뭔가 1/3은 발레 관련 전공생이거나 관련 종사자 같은 분위기를 풍겼달까. 어디서 그걸 느꼈냐고? 유달리 머리 정돈이 단정하고, 아래로 로우번을 한 자세가 곧은 여성분들이나, 키가 유달리 멀끔하고 어깨가 직각인 느낌의 남성분들이 많았다. 그렇게 키가 크지 않은(오히려 작은 축에 속하는) 내가 보기엔, 발레 월드에 놀러 온 소인족 관람객이 된 느낌이랄까(?)


나와 함께 관람한 동행도 준발레인(취미생)답게 꽤 무용수 같은 체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녀와 비슷한 특징(의상, 머리스타일, 뼈대)을 지닌 사람들이 곳곳에 계시니 이리저리 눈이 바빴다. (내 세상엔 단 한 명뿐이었지 않은가) 아무튼, 그랬다.


나는 첫 관람이니까 전체적인 군무나 분위기를 느껴보기 위해 3층 중간 객석을, 동행은 무용수들의 발 모양이나 표정 연기를 눈에 담기 위해 1층 3열(!)에서 관람했다. 견우와 직녀처럼 떨어진 자리였다. 공연이 끝나고 서로 찍은 사진을 공유했는데, 확실히 눈에 담기는 장면 자체가 달랐다. 오늘의 대표이미지도 그녀 손에서 탄생했다.


3층에서 명화의 한 장면을, 1층에서는 무용수들의 섬세한 움직임과 눈빛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나같이 고난도의 32회전 푸에테(한쪽 다리로 돌면서 반대쪽 다리를 휘둘러 회전하는 발레 동작)를 봐도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 사람은, 조금 거리를 두고 풍경으로서 관극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굳이 어려운 동작이 아니더라도, 모든 요소와 표현들이 나한텐 다 너무 대단했다.)


그렇다면, 오늘의 무용극은 무슨 내용인가? 의외로 간단하다. <백조의 호수>는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가 1877년에 만든 고전 발레로, 마법에 걸려 백조로 변한 여인 ‘오데트’와 그녀를 사랑하는 ‘지그프리드 왕자’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네 막에 걸쳐 그린다.


오데트는 밤이면 백조로, 낮에는 인간으로 살아야 하는 저주를 받고 있으며, 왕자는 진정한 사랑으로 그 마법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하지만 왕자는 악당 로트바르트의 계략에 속아 오데트와 닮은 흑조 ‘오딜’에게 사랑을 맹세하게 되고, 이로 인해 비극이 시작된다.


이 정도의 흐름을 기억해두고, 이제는 차이콥스키의 선율 안으로 빠져들 차례다. 나는 왜 발레에 클래식이 전면적으로 활용된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소리와 선율이 주인공인 공연만 잔뜩 찾아다니다 보니, 이렇게 안목이 좁다.


발레가 무엇인가. 연극의 대사 대신 춤으로 서사가 진행되는 무용극이다. 무용수의 손끝과 발끝으로 모든 극이 흐르는 것이다. 얼마나 흥미로운가?


사실, 공연이 시작되기 전까진 어떤 걸 보게 될지 상상조차 잘 되지 않았다. 기본적인 에티켓만 익힌 뒤 공연장 안으로 발을 들였는데, 극장의 탁 트인 뷰에 나도 모르게 “와!” 했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과는 달랐다.


콘서트홀은 비주얼적인 압도감보다는, 가라앉은 공기의 서늘한 기운이 가득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것을 분명하게 잡아채겠다는 예민한 기운이 맴돈다. 무대 자체도 엄청 크진 않고 층고가 꽤 높은 편이다. 뒤편의 각진 벽 구조를 마냥 구경하다가도, 멀리 있는 천장 구조나 조명에 시선을 두는 재미가 있다.


 

 

3. 오페라극장, 크리스탈 오르골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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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오페라 극장은 어떤가. 나는 디즈니랜드에 온 줄 알았다. 방금 전까지 빌라와 감성이라곤 1도 없는 한국식 건물들 사이에 있다가, 갑자기 두둥— 채도 높은 붉은 커튼이 무대 전면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 커튼 위엔 황금빛 액자 형태의 구조물이 있고, 양옆에는 파도를 닮은 박스석들이 있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1층 오케스트라 피트 안에 연주자들이 오늘의 공연을 기다리고 있다. 너무 신기했다. 동화 속 한 장면이 내 앞에 갑자기 딱 놓이니까, 마음이 마냥 들뜨기 시작했다. 약속된 7시가 되고, 관객석이 어두워진다.


유니버설발레단의 단장님이 무대 위에 나타나 오늘의 극을 소개하며, 주요한 발레 동작에 대해서도 간단히 설명해주시는데… 너무 우아하셨다.


단장의 첫인사가 끝나고, 오늘의 막이 시작된다. 아래쪽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악보 위에 주광색 반딧불이를 하나씩 띄워놓고 있었다. 약간 마음이 편해지는 오렌지빛 수면등 같기도 했다. 그 사이로 차이콥스키의 서곡이 시작된다. 나는 그 2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엇을 눈에 담았던가?


 

 

4. 소리의 끝에 머무는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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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릴리


 

모든 게 화려했다. 무대 배경은 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양화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고, 궁전의 연회를 노니는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의상은 지금 내가 웹툰 <재혼황후>를 보고 있나 싶을 정도로 퀄리티가 수준 이상이었다.


포털 사이트의 웹소설을 보면 한 회차마다 일러스트가 있지 않은가? 로맨스 판타지 장르에서나 볼 수 있는 화려하고 금빛의 옷자락들이 내 눈 앞에서 나풀거렸다. 이거 맞나? 누가 만든 거지…? 옷도 외국에서 내한한 건가…?


무용수들의 발걸음마다 통통 튀던 흰 레이스 치맛자락, 군더더기 없는 라인의 귀족풍 복장, 위엄 있게 흐르는 왕비의 금빛 드레스, 한쪽은 검정색, 한쪽은 흰색 레깅스를 입은 광대까지.. 그 재간둥이 광대가 무대를 이리저리 쏘다니는 얼굴 표정이 3층인데도 다 보였다. 깔깔거리며 분위기를 띄우는 눈빛도 보이고…(실력도 장난 아니다), 1막과 3막에 있는 무용수들의 장기자랑 타임 같은 페어댄스나 독무 무대도 인상 깊었다.


무대를 채워주는 인물들이 양끝에 우아하게 앉아 있는 모습도 아직 기억난다. 에티튜드가 그냥 중세 귀족이다. 너무 우아하다. 뭐 하나 내디딜 때마다 “부인~”, “이리 오시지요~”, “어디 가시나요~”가 저절로 떠오른다. 무용을 마친 무용수가 퇴장할 때면 앉아 있던 무용수가 꼭 손을 들어 바래다준다. (이야)


매 막이 바뀔 때마다, 여러 가지의 크리스탈 오르골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궁전의 노란빛으로 포근하게 물든 색감 안에서 연회를 즐기다가, 조명이 시리게 변하면서 차가운 푸른빛의 강가 장면이 깔린다. 무대 바닥이 생각난다. 호숫가에 사람의 인영이 비쳤다. 검은색 위에 하얀 복장의 무용수가 선명히 반사된다. 그 위에서 지그프리드와 오데트가 처음 만나게 되고,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한다.


불현듯, 오데트의 첫 등장이 떠오른다. 흩날리는 흰 꽃잎 한 조각을 발끝으로 묘사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어찌나 가녀리고 또 우아하게 무대로 등장하는지. 빛을 뿌리는 희고 넓은 튀튀(동그란 치마)에도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저 의상 분명히 엄청난 비용을 치렀으리라)


동작이 일단 말이 안 됐다. 펼쳐진 풍경 자체도 환상인데, 그 안에 말도 안 되는 곡선과 자태를 지닌 인물이 반짝거리며 무대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절로 박수가 나오는 것이다. 차이콥스키의 음악 안에서 오데트는 제 것을 뻗어 낸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오케스트라의 모든 음의 끝자락에는, 잔향처럼 무용수의 손끝과 발걸음이 머물러 있었다. 뭐야! 소리선이 이토록 일치한다고? (심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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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릴리


 

보통 내가 클래식 공연을 가면, 이런 소리를 찾아 듣곤 했다.

 

너무 조급하면 안 되고, 충분히 기다려주면서 파동 쳐야 한다. 대략 ‘나—’ 하고 지나갈 수 있는 부분이 ‘나——’ 정도의 간격이고, 그 중간 영역부터는 서서히 사그라지는 비브라토가 있어야 한다. 고저를 깊숙이 파고들되, 비행할 때는 실크 리본이 휙— 날아오르듯 단숨에 뻗어내는 우아한 느낌이 필요하다. 왼쪽 아래에서 시작해 오른쪽 위로 쉭— 상승 곡선을 그리는 형태겠다.


작은 영역 아래에서 시작할 때는 소멸하듯 숨죽였다가, 서서히 내 쪽으로 다가오는 흐름이 좋다. 단박에 뻗쳐 있거나 쨍하면 내 마음을 담을 틈이 없다. 반대로, 지나치게 속도를 지체하는 것도 싫다. 충분히 달려나갈 수 있을 때는 맹렬히 앞쪽으로 생동감 있게 휙— 나아가도 괜찮다. 파동을 충실히 이용하되, 감정의 기색이 너무 전면에 드러나면 곤란하다.

– 2025년 6월 20일

 

이걸! 무용수가 다 응해주었다. 그것도 춤으로, 동작으로, 다 펼쳐내준다. 연주가가 악기 위에 손을 떼도 소리가 뚝— 하고 바로 사라지지 않는 걸 아시는가? 잔향의 첫 시작에 꼭 무용수들의 손가락 끝이 놓여 있었다. (기절)


보통 내 글은 감정이나 눈앞에 그려진 것을 수직으로 내리꽂는 일이 잦았는데, 여긴 수평으로 금빛이 흩뜨려져 있으니 그걸 내가 펼쳐놓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황홀할 수가 없다. 내가 오데트에 빙의해서 지그프리드와 백조의 춤사위를 펼칠 것도 아니니까, 맘 편히 그들의 손끝과 기교와 군무를 음미만 하면 된다.


내 감정선을 굳이 분석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시각적 아름다움을 흠뻑 누리면 그만이었다. 이미 명화가 둥둥 떠다니고 있는데,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나 있겠나? 얌전히 손을 모으고, 가이드라인 뒤에 멀찍이 서서 흐뭇한 미소로 예절을 지키며 구경만 하면 된다.


아, 행복하다. 작곡가가 여기저기 흩뿌려놓은 문제지를 주섬주섬 주워 담아, 답도 없는 해설지의 빈칸을 채우는 기분을 아시는가? 그런 수고스러움 없이 완벽한 답안지가 눈 앞에 2시간짜리 길이로 촥— 펼쳐져 있다.


동작은 손끝에만 머물지 않는다. 상체를 깊게 젖히고, 부드럽게 턴을 돌며 소리선에 맞게 팔과 팔을 이어내거나 곡선을 펼쳐낸다. 지그프리드와 오데트가 함께 춤을 출 때, 발레리노가 발레리나를 부드럽게 한 손으로 들어 올리면, 오데트는 팔을 공중에 유영시키며 파동을 그려낸다.


남자가 뒤쪽으로 다리를 뻗어 사뿐히 내려앉으면, 여자는 높게 다리를 들어 올려 왼쪽 아래에서 시작해 오른쪽 상단으로 끝이 나는 하나의 곡선을 묘사한다. 왕자의 품 안에서 오데트가 발끝으로 서서 고요히 턴을 도는 그 순간, 오르골 안에 있는 유리 인형처럼 보였다. 어찌 그리 매끄럽고, 그토록 아련할 수가 있단 말인가.


 

 

5. 끝, 그리고 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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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정말, 인터넷에서 보는 발레 영상과 실제 무대는 차원이 달랐다. 그냥 듣기만 해도 좋은 드뷔시의 ‘달빛’이 초고화질 4DX로 눈앞에 펼쳐졌다. 그 서늘한 기색의 푸르고 어둑한 조명 속, 피어오른 백조들의 장면은 아직도 선명하다.


거기다 군무 씬에서의 그 대칭! 갑자기 왠 대칭인가 싶겠다. 대칭이란 무엇인가? 균형을 위하여 중심선의 상하 또는 좌우를 같게 배치된 것이다. 최소 8명 이상의 무용수들이 일자로 샤라락— 펼쳐내는데, 모든 움직임과 손동작이 양옆, 앞뒤까지 정교하게 맞아떨어진다. 색감마저 통일감, 균형감이 기가 막힌다. 백조들이 바닥 아래로 사그라드는 동작이 있었는데, 그때 튀튀(무용수들의 둥글게 퍼진 치마)의 각도까지 일치했다. 이런 것까지 계산합니까?


아— 너무 신기했다. 이러니까 공연을 관람하는 내내 등 뒤가 뜨끈했다. 시각적으로 너무 화려한 대상들이 막 튀어나오고, 내려앉고, 뛰어오르고, 회전하고, 날아다니고, 춤을 추고, 균형을 맞춰가는데… 내가 어떻게 식은땀 한 방울 안 흘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 발레의 관객들은, 누구보다 솔직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몰랐다. 발레는 중간에 무용수의 무대에 감동하면 박수를 쳐도 된다. (!) 꿈이나 생시냐. 클래식에서는 꿈에도 꾸지 못하는 장면이 아닌가? 오히려 악장 사이나 연주 중간에 박수를 치면 아마 백 살까지 살 수 있을 거다. 그런데 발레에서는 그게 허용된다고? 아무리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있다고 한들, 이 또한 고요 속에 피어나는 장르 아닌가?


뭐가 중요하겠나! 나도 그날, 사람들이 박수칠 때마다 열심히 따라 치고 왔다. 아니, 안 칠 수가 없다. 이렇게 아름답고 경이로운 장면을 보면서, 어찌 가만히 있나? 나는 보통 박수를 끝까지 치지 않고, 중간까지만 치다가 핸드폰으로 커튼콜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내는 편인데, 이때만큼은 정말 신나게 박수를 쳤다.


너—무 재밌어!


솔직히, 19일의 <백조의 호수>는 내게 <우와의 호수>였다. 오후 7시, 단장님이 동작을 설명해주시던 순간부터, 커튼콜이 몇 차례 반복될 때까지— 3층 중간에 앉은 한 관람객이 속과 겉으로 내뱉은 “우와”는 족히 백 번은 넘었을 것이다.


역시 문화 생활은 다양하게 영위해야 한다. 이렇게까지 색다른 즐거움을 겪을 수 있다니. 1층과 3층, 각자의 위치에서 공연을 관람했던 우리는 1층 로비에서 재회했고, 어깨가 잔뜩 치솟은 채로 못 다 나눈 말들을 우다다 쏟아내며 사인회를 위해 등장한 오늘의 오데트와 지그프리드를 구경했다. 동행이 가까이서 보고 싶어하여 발레리노 다닐 심킨(Daniil Simkin) 옆에 살짝 다가가 사진을 찍었는데, 어쩌다 보니 팬사인회처럼 찍혀버렸다. 구경하세요, 거의 아이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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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공연장을 빠져나오니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공기에는 습기가 가득했다. 예술의전당의 밤은 오렌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까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조명과 비슷한 색감이다. 오늘의 동행이자 발레사랑단 그녀가 왜 이리 발레를 좋아하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흥미롭고 극적인 것이 또 있을까. 3층까지 울리던 무용수들의 쿵쿵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생각난다.


클래식 공연장에서 특히나 현악기의 실내악 공연을 보러가면 이따금씩 바이올린 본체가 내는 삐걱거리는 특유의 나무 소리가 있다. 나는 그 소리를 꽤 좋아하는데, 오늘의 그 발자국들이 그 감각과 묘하게 이어졌다. 좋아하는 소리까지 떠올리게 해주는 움직임들. 참, 모든 게 예쁘고 신기했다. 무엇보다, 친절한 세계였다.


백조의 호수. 왜 고전 중의 고전인지 이제는 제대로 알 것 같다. 발레 이전에, 차이콥스키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선율을 만든 작곡가인지, 클래식과 조금 더 편하게 가까워지고 싶은 이라면 이런 무용극으로 시작하는 것도 꽤 괜찮은 선택지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는 클래식 공연을 앞으로도 좀 더 시선에 둘 테지만, 19일의 오데트 덕분에 정말 거대한 힐링을 받았다. 내가 상상 안에서만 그려왔던, 그 음의 끝에 누군가의 손짓이 머문다는 그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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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

 

 

바이올린이 얇은 실선처럼 트릴을 하는 것처럼,

홍향기 발레리나가 발끝으로 부드러운 은빛 잔물결을 그려낸 장면은,

오래도록 마음 속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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