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어원은 어디에서 올까.
언어의 기원처럼 모호한 게 따로 없지만, 대체로 두 가지의 의견이 있는 듯하다. “살다”, “사르다”와 같은 고어에서부터 출발해서, 사랑이라는 단어로 확고해졌다는 설과 양주동 시인이 주장한 한자어 “사량(思量”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물론 더 깊숙이 들어가면, “괴다”라는 단어도 있으며, 닷다, 어루다, 같은 단어들에서부터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어의 기원이 아니라, 의미에 집중한다면 어떠한 갈래를 나눌 필요는 없을 듯하다. 모두 “애틋하게 생각한다.” 혹은 “상대를 깊이 생각한다”로 통일되기 때문이다. 사랑의 발화법은 모두 다를지언정, 사랑에는 길이 있다. 마침내 도착한 곳에는 내가 그토록 생각하는 당신이 있을 것이다.
다만 닿지 못하는 감정은 부재한 채,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도착한 곳에 그대가 없었으므로, 사랑은 길을 헤매기 시작한다. 결코 닿지 못하는 타인을 볼 때마다, 우리는 절망하고 만다.
파스빈더의 영화,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은 그런 영화다. 가지지 못하는 타인에게 절망하고, 애원하고, 증오한다. 한 편의 연극과도 같은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서로의 감정을 증명하고자 한다. 타인은 나를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나를 이용하고 있을 뿐인가? 페트라 폰 칸트가 흘리는 쓰디쓴 눈물에는 결코 단순한 절망이 아니다. 눈물 속에는 사랑이 가져온 상하관계가 침전해 있다.
유명 디자이너인 페트라는 비서 마를렌과 호화로운 아파트에 지내고 있다. 어느 날 젊은 모델인 카렌을 만나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카린이 페트라에 집에서 지내기 시작하면서, 페트라는 자신의 모든 것을 카린에게 주고자 한다. 카린은 페트라의 마음을 이용하며 경제적인 후원과 명예를 얻고자 한다.
점점 카린에게 종속되기 시작하는 마음을 알아챈 페트라는 카린에게 사랑을 증명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카린은 페트라를 떠나서, 남편에게 돌아가게 된다. 페트라는 홀로 남은 듯 보이지만, 주위에서 머무는 마를렌의 존재를 눈치챈다. 마침내 마를렌에게 사랑을 요구하지만, 마를렌조차 그녀를 떠나고 만다.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요구한 게 아니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인간을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 페트라의 요구가 카린에게 맞닿을 무렵, 카린은 분명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카린과 페트라 사이에는 상하관계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느껴야만 하는 상하관계가. 카린과 페트라의 사이는 동등하지 않다. 페트라가 유명한 디자이너라고 하더라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인 감정의 상하 속에서는 페트라는 그저 카린에게 종속된 존재일 뿐이다.
종속을 강화하기 위해서, 카린은 페트라에게 말할 사랑의 언어를 유보한다. 그저 기만에 불과한 발화는 전혀 사랑을 논하고 있지 않다. 페트라가 카린에게 집착하듯, 사랑을 요구하는 것도 여기에 있다. 사랑의 언어가 유보되는 순간, 페트라의 사랑은 요구를 넘어서서 증명을 원하기 시작한다. 카린의 전략은 페트라를 완전한 타인으로 탈바꿈한다. 모호한 사랑을 논하고,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기만이 더해지는 순간, 페트라는 카린이 가진 감정에 완전히 종속되게 된다.
마침내 카린이 떠난 순간, 페트라는 전화기 앞에서 기다리기 시작한다. 단 한 번만이라도, 사랑을 말하고 싶다는 열망. 하지만 카린은 응답하지 않는다. 페트라는 종속된 카린의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미 깊숙이 자리 잡은 상대를 도저히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종속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절규가 프레임을 파고들 때, 사랑이라는 순수한 감정은 찾아볼 수 없다. 사랑이라는 기만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사랑이 무엇인가?
페트라가 흘린 쓰디쓴 눈물 속에는 동일성을 찾을 수 없다. 누군가를 사랑한 순간부터, 우리는 주지해야 한다. 사랑은 결코 홀로 설 수 없음을.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은 타인에게 사랑해달라고 비명을 지를 때의 고통을 형상화하는 영화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