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기 중세 잉글랜드의 수도승, 십자군 전쟁의 참전용병, 그리고 추리소설.
이 언밸런스한 조합은 얼핏 들으면 다소 생경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낯선 조합으로 장장 18년 동안 집필된 엘리스 피터스의 <캐드펠 수사 시리즈>는 특유의 화려하고 절제적인 문장과, 목가적인 수도원 생활 디테일, 내전의 여운과 복잡한 인간 군상 묘사를 자랑하며 22개국에 소개, BBC드라마로의 제작까지 이어지며 국제적인 사랑을 받았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는 우리나라에도 19997년 소개되었다.
사실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나, 모리스 르블랑의 <괴도 루팡> 시리즈에 비하면 그 인지도는 낮다. 그러나 이 소설은 역사추리소설의 정수라고 불리며 국내 마니아층들에게도 지대한 관심과 환영을 받아온 대작이다.
1. 작가, 엘리스 피터스
별다른 정보 없이 시리즈를 읽으며, 막연히 작가 엘리스 피터스가 20세기 이전 인물일 거라 짐작했다. 12세기 잉글랜드, 무정부 시대를 다루는 작품 내의 묘사가 너무도 출중하고 정교했기 때문이다.
첫 장을 펼친 이후 빼곡하게 휘몰아치는 중세 영국의 목가적인 풍경 묘사, 눈앞에 이야기의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듯한 회화적인 문장들은 작가가 해당 시대를 직접 살아본 인물이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들게 만들었다.
11권 위대한 미스터리를 읽은 후 엘리스 피터스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자, 더욱 놀라게 되었다. 이 시리즈가 1977년 처음 집필된 것도 놀랍지만, 1913년생인 엘리스 피터스의 화려한 인생 이력이 눈에 띄었다. 약국 조수와 해군 장교를 거쳐, 삶의 후반에 들어서는 60대 중반에서야 처음 소설을 집필하고 18년 동안 이 시리즈에 매진해 온 인생 경로는 어딜 가도 범상치 않다.
그러나 그런 연륜과 경험이 소설에도 묻어나는 것인지, 작품 속에서 그의 인물들은 너무나도 세밀하게 숨 쉬고 있다. 역사적 질감과 인간적 내면을 함께 품은 존재로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캐드펠 수사는 정통 추리소설 탐정 상과는 조금 차이가 있는 인물이다. 추리 시리즈의 탐정, 하면 모자를 쓰고 파이프를 빼문, 약간 괴팍하고 냉철한 천재 이미지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캐드펠 수사는 이와 거리가 멀다.
오히려 숱한 삶의 굴곡을 지나, 인간을 돕고자 하는 ‘늦깎이 수사’이자 따뜻한 해결사에 가깝다. 작가 엘리스 피터스의 인생 경로를 비추어 보았을 때 약간 겹쳐 보이는 바 있다.
사실 작중에서 캐드펠의 과거를 집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오히려 완결 이후 출간된 단편집인 21권 <특이한 베네딕토회>에서 그의 과거를 좀 더 풀어낸다. 캐드펠은 본디 수도사가 아니었다. 그는 웨일즈 출신의 전직 용병 출신이며, 십자군 전쟁에 참전한 적이 있다. 오랜 세월 전장을 떠돌다 은퇴 후 슈루즈베리의 수도원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생 경험을 통해, 캐드펠은 약초에 능하며 ‘수도원 바깥의 삶’ 역시 잘 알고 있다. 뛰어난 두뇌가 아니라, 경험을 통해 쌓인 관찰력과 예리한 통찰, 풍부한 인간 이해력을 바탕으로 캐드펠은 폐쇄적인 수도원뿐만 아니라 수도원 안팎의 사건을 해결한다.
슈루즈베리 수도원의 정원, 사회적 약자의 삶, 여성과 하인의 처지, 신분 갈등, 정치적 음모와 십자군 전쟁의 여운, 내전과 무정부 시대의 혼란. 소설 내에 묘사되는 것처럼, 12세기 영국에서의 삶과 지식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그러나 캐드펠은 인생을 통해, 늘 자발적으로 문제에 뛰어들고, 인간적 고민과 고뇌로 사건을 대한다.
단순히 범인과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것이 아닌, 이 일로 누구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지 윤리적인 결단에 가닿고자 하는 캐드펠의 면모는 무척이나 상냥한 바 있다. 때론 신랄하게 말하고, 가끔은 규율을 어길지라도.
만일 캐드펠이 전쟁이나 삶의 무참함을 겪지 않고, 오로지 종교에만 신실한 수도승이었다면 이 이야기는 집필되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 시리즈는 살인 소설을 다루고 있음에도 전체적으로 잔잔하고 밝은 분위기를 띠고 있다. 그것에는 독자와 인물들이 믿고 따라갈 수 있는, ‘캐드펠 수사’라는 정의롭고 진실한 주인공의 매력이 한몫했을 것이다.
20권 <캐드펠 수사의 참회>는 이 장대한 서사의 종국을 보여주는데, 캐드펠 수사가 아닌 아버지 캐드펠의 면모를 보여주게 된다. 정의와 가족, 속죄가 무엇인지 끈질기게 고민하고 고뇌하며, 끝내 아들을 위해 수도원을 떠나는 캐드펠의 모습은 ‘수사 시리즈’의 완결을 각인한다.
그러나 이 떠남은, ‘캐드펠’이라는 인물의 완성이 아닌, 새로운 챕터로 이어지는 시작이기도 하다.
기존의 클래식 블랙 에디션은 1~10권의 어둠을 다뤘다면, 11~21권은 빛으로 이루어지는 여정을 형상화한 로열 골드 컴플리트 에디션이다.
캐드펠 수사의 매력에 빠져 그를 보내주기 아쉬울 즈음, 그의 기원을 밝혀주는 프리퀄 3편이 담긴 단편소설집 또한 수록되어 있다.
책을 배송받았을 때 패키지의 아름다움과 고급스러움에 무척 놀랐는데, 골수 깊은 팬들 역시 아쉽지 않을 구성이다. 독립된 각 권을 따로 읽어도 이해가 어렵지 않기에, 접해본 적 없는 기존의 독자에게도 부담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