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주차는 과제로 구상해온 원고를 다듬고 스토리보드 작성까지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첫 시간에 글이 없는 그림책 레퍼런스들을 보면서 글 없이 서사를 전달하는 것에 대한 호기심도 일었고, 함축적인 언어로 원고를 쓰는 것에 대한 막연함도 있었기에 곧장 책에 실릴 문장을 뽑아내는 것이 아닌 이미지 중심의 내러티브를 우선 구성해보기로 했다.
일주차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핵심 소재는 ‘감정의 소화’라는 은유다. 내가 느끼는 순간순간의 감정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을 어떻게 시각화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그저 직관적으로 사람의 ‘소화 과정’을 빌려오는 방식으로 서사를 짜게 되었다.
(아직 구체화 되지 않은) 탁자 위에 놓인 덩어리들이 입으로 들어가고, 위를 거쳐 배출되기까지의 과정을 나열했다. 각 장면은 안으로는 우리 몸의 장기와 움직임을 배경으로 하고, 밖으로는 감정들의 결합이 심장의 두근거림, 눈물 등으로 표출되도록 했다.
원고 작성
1~2: 섭취 준비 – 입으로 들어감
탁자 위에 다양한 형태의 감정 덩어리들이 놓여 있고, 주인공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 앞에 앉아 있다. 이는 감정과 마주하기 직전의 긴장감과 거리감을 상징한다. 감정을 받아들이는 ‘입’은 하나의 문이자 경계이다.
3~5: 씹기 – 식도 – 위에 도달
감정을 씹는 장면에서는, 과거의 기억과 외부로 뾰족뾰족하게 나가는 말들이 동시에 존재하며 내면화 과정의 혼란이 시각화된다. 식도를 통과하며 각기 다른 감정들은 격렬하게 뒤섞이고, 위 속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정적인 침잠의 상태를 맞는다.
6~9: 위 속의 반응 – 위산 분비 – 변화/잔류
감정은 위 속에서 가라앉거나 녹으며 변한다. 이때 감정들 사이에는 서로 흡수되기도, 들러붙기도, 전혀 반응하지 않기도 한다. 특히 ‘녹지 않는 감정’은 아무리 위산이 닿아도 변하지 않으며 바닥에 가라앉는다. 이는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잔재, 혹은 이해되지 않는 감정의 덩어리이다.
10~11: 심장으로 가는 흐름 – 심장의 반응
일부 감정들은 심장으로 올라간다. 이는 감정이 사고가 아닌 신체 감각의 층위로 이동하는 순간이다. 반짝이는 기포나 관의 곡선은 감정의 불안정성을 시각화하고, 심장의 두근거림은 이 모든 감정이 결국 ‘나’라는 존재 안에서 물리적으로 반응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2: 감정의 분류 – 융모의 선택
작고 섬세한 융모들이 지나가는 감정들을 분류한다. 이는 ‘어떤 감정을 받아들이고, 어떤 감정을 흘려보낼 것인지’에 대한 무의식적 선택을 상징하며, 인간의 감정적 필터링을 은유한다.
13~15: 눈물 – 침전 – 배출
감정이 몸 밖으로 배출되는 마지막 단계에서는 침묵과 여백이 강조된다. 감정은 더 이상 설명되지 않고, 그저 사라지거나 남는다. 눈물 한 방울은 언어 이전의 감정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16: 새로운 하루
다시 탁자 앞, 어제와는 조금 달라진 감정들이 놓여 있다. 이는 감정이 끝나도 삶은 이어지며, 새로운 감정은 또다시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순환의 서사를 담는다.
스토리보드 작성
원고 작성이 막막해서 시각적인 내러티브를 먼저 짠 건, 결국 고민을 한 단계 미뤄둔 셈이었다.
스토리보드를 시작하자 용두사미식의 나의 약점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처음 떠올렸던 아이디어에 비해 그걸 엮어내는데에는 주저함이 많은 탓이다.
그에 더해 그림과는 영, 안 친하다. 머릿속에선 이미지가 나름 또렷하게 지나가는데, 손은 도무지 따라주질 않았다. 선은 조심스럽기만 했고, 구도는 지나치게 정직했다. 장면 간 리듬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여백을 어디에 두고 컷을 어떻게 나눠야 감정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질지 같은 지점에서 계속 막혔다.
또 하나의 과제는 판형을 정하는 일이었다. 원래 정사각형 판형을 생각했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한 방향으로 밀고 나가야 하는 구조 상, 가로형 혹은 세로형이 더 적절하겠다는 고민을 하게 됐다. ‘식도’나 ‘미끄럼틀’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세로의 움직임이, ‘탁자’나 ‘심장 박동’ 장면에서는 가로의 흐름이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아직 최종 결정은 내리지 못했지만, 내 이야기에 맞는 물리적 포맷을 스스로 고른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다음 수업 후에는 실제로 더미북을 제작해야 하는 만큼 더 치열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