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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향한 열망이 한여름 태양처럼 뿜어져 나오는 영화가 왔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이름을 알린 배우 노애미 메를랑이 직접 감독과 주연을 맡은 ‘발코니의 여자들(Les femmes au balcon)’이다.

 

개봉 이후 국내 관객들의 호평과 혹평을 동시에 받고 있으며, 여성 인권 의제 중 최근 가장 활발히 거론되는 ‘비동의 강간죄’를 다룸으로써 말 그대로 아주 ‘뜨거운’ 작품이다. 마르세유의 강렬한 햇빛이 내리쬐는 아파트 발코니 사이를 활공하며 시작하는 이 영화는, 시끄러운 클럽의 어지러움과 동트기 전 새벽 공기의 시원함을 모두 선사한다.

 

그리고 그 여운에서 한 걸음 벗어난 뒤 생각해 본다. 여자들의 비명은 어디를 찔렸기에 그칠 줄 모르고, 또 무엇을 찢어버리고자 내질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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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이렇다. 세 여자 친구들이 신나는 밤을 보내던 중 옆집 남자의 집에 초대되는데, 어쩌다 홀로 남겨진 루비를 강간하려던 남자는 2층에서 떨어져 죽게 된다. 이후, 이 시신을 은폐하고 바다에 투기하기까지 벌어지는 일들을 유쾌하게 그렸다.

 

혼란스럽게 생동하는 컷들은 관객을 마구 흔들어놓는다. 오프닝 시퀀스의 미학적 성취에 이 영화에 호감을 느꼈던 사람들은, 곧 어디서 본 듯한 경망스러운 코미디의 방탕에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끝에 가서는 거의 해설하듯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영화의 주제 의식은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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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여성의 자유를 수복하고자 취하는 방법은 ‘드러냄’이다. 툭 튀어나와 있는 곳을 통해 자유를 향유하고 또 시위한다. 이러한 드러냄은 극 중 다양한 소재로 실현된다. 먼저 공간으로서 ‘발코니’가 그러하다. 발코니에 앉은 ‘니콜’은 작가 지망생이다. 맞은편 건물에 이사 온 남자를 구경하며 사랑에 빠지고, 그 미스테리한 남자에 대한 글을 쓰기로 한다. 짝사랑으로 솟구치는 욕망의 예술적 표출이다.


또한 ‘가슴’은 자유를 희구하는 또 다른 상징적 소재이다. 화려한 메이크업과 코스튬을 입고서 성적 자유분방함을 온몸으로 발산하는 ‘루비’는 상의를 발가벗은 채로 발코니를 돌아다닌다. 그리고 감독은 여성의 가슴을 ‘그냥’ 드러낸다. ‘슬며시’도, ‘에로틱하게’도, ‘과감하게’도 아닌, ‘그냥’ 드러낸다. 신비로움의 대상으로 규정해 꽁꽁 싸매놓고는, 허물을 벗기고 그것을 탐하는 자는 나여야 한다는 성적 욕망, 즉 남성 욕망에 의한 가슴의 대상화에 반격하는 전환이다.


세 친구 중 마지막 여자는 무명 배우인 ‘엘리즈’이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파리에서부터 차를 끌고 달려, 우당탕 마르세유에 도착한다. 마릴린 먼로의 분장을 그대로 한 채, 엘리즈는 차를 아무렇게나 세워두고 숨을 연신 헐떡이며 친구들을 찾는다. 이후 그녀를 찾는 남편 폴의 병적인 집착, 성관계의 강요와 임신중절까지. 이제 페미니즘 영화에서 클리셰라면 클리셰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차라리 영화적 클리셰이기만 하다면 좋을, 지긋지긋한 여자의 현실적 클리셰에 엘리즈는 더 이상 분노를 참지 못한다. 옷이 거의 벗겨진 채 뛰쳐나온 그녀는 길거리에서 자신에게 말을 거는 남자에게 증오와 복수심이 가득 찬 포효를 뿜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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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지라고 소리치는 입, 단전의 고통을 밀어내는 입, 상처를 고백하는 입. ‘발코니의 여자들’은 여성의 입이 겨우 남성에게 틀어막히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피해자가 말을 영영 잃거나, 무시당하는 경우는 노애미 멜랑의 세상에서는 더 이상 없다. 여성 발화의 자유는 착하게 살인을 자백하는 방식이나, 고분고분한 순응, 넓은 마음의 타협 따위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뒤틀린 ‘남성성’을 난사하다 죽어버린 영혼들을 불러내서 그들을 고발한다. 죄를 꼬치꼬치 따져 묻는다. 잘려 나간 고환, 한심한 언행을 전시하며 남성성을 조소한다. 친구의 선택을 무조건 지지하고 죽어라 돕는다. 다른 여성들과 무언의 공감을 나누고 연대한다.


영화는 화면의 색채만큼이나 뚜렷하게 선과 악을 나누기에, 무언가 그 이상을 기대했다면 아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서 오는 희열과 통쾌함을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극 중 루비와 엘리즈가 말라 죽은 화분에 손을 넣으며 기분 좋아하는 신이 있다. 죽은 화분을 채운 흙의 뽀송함. 우리는 그걸 즐길 자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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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의식을 잃은 자신을 강간한 전 남편과 50명의 남성을 공개 재판에 세운 지젤 플리코가 프랑스 최고 훈장을 받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녀는 “수치심은 피해자의 몫이 아닌 가해자의 몫이어야 한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올여름, 남성적 본능이란 욕구를 제어 없이 마구 분출하는 것이라고 하는, 죽어도 제 잘못은 없다고 호소하는 이들을 마음껏 비웃어주자. 세상은 변하고 있고, 여성은 자유롭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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