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신을 산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 것 같다. 진지하게 성인 ADHD 검사를 받아볼까 고민하는 사람들도 많고, 유튜브에는 ‘집중 잘 되게 하는 플리(플레이리스트)’도 많다.
나도 집중하는 것을 정말 어려워한다. 뭔가를 찾겠답시고 스마트폰을 켰는데, 유튜브나 각종 SNS의 유혹적인 아이콘을 보면 홀린 듯 그것들을 누르게 된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잔잔한 클래식을 들으면서 글을 쓰려고 유튜브에 들어갔다가 몰아치는 쇼츠들에 휩쓸려 본래의 목적을 잃고 떠돌곤 한다.
도서 <창조적 영감에 관하여>는 산만함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책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산만함’이라고 정의해왔던 행위들의 대부분은 진짜 산만함이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앞서 이야기한 나의 경우도 이 책이 이야기하는 산만함에 포함되지 않는다. 조금 민망하게도 나의 경우는 책에 따르면 ’쓸데없이 웹 서핑을 하거나 별생각 없이 스마트폰을 터치하는 주의력 결핍’이자, ’의지박약’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이 이야기하는 산만함은 ‘몽상‘에 가깝다. 무언가를 하다가도 갑자기 밖에 나가서 산책을 하고 싶어 한다든지, 그저 멍하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든지. 머리에 휴식 시간을 주는 것과 거의 같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간 집중력을 좋은 것으로, 산만함을 나쁜 것으로 치부하며 늘 자기 자신을 채찍질했던 사람들은 이 책을 읽어보면 좋겠다.

몽테뉴의 <수상록>이 산만하고 일관성이 없는 글처럼 보인다면,
그 책임은 ‘게으른 독자‘에게 있다.
실제로 몽테뉴는 ”자유롭고 변화무쌍한“ 상상력의 충동에 자신을 맡기지 않은 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깊은 사유를 발견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P. 52
16세기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는 자신의 비선형적인 글이 오히려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한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선형적이고 논리적인 글은 깔끔하지만, 결론까지 나아가는 과정에서 독자들에게 사유할 틈을 주지 않는다.
산만함의 긍정적인 면모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산만함을 통해 즉각적인 만족을 얻을 수 없다.
무언가의 결론까지 나아가는 과정을 간단하게 등산에 비유하면 좋을 것 같다.
높은 산을 직선으로 오른다면 정상에 빨리 도달해 쾌감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빙빙 돌아가며 산을 오른다. 정상에 일찍 도착할 순 없지만 굽이굽이 돌아가는 산만한 과정에서 자연을 만나고, 스스로의 호흡을 느끼고, 다양한 생각을 떠올린다.
정상에 다소 늦게 도달했다고 해서 우리가 느끼는 만족이 반감되는가? 아니다. 이것이 산만함이 주는 ‘만족 지연‘이다.
미래의 더 큰 만족을 위해 현재의 즉각적인 즐거움을 뒤로 미룰 때,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자유롭게 순환한다.
P. 56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이성적이고 선형적인 사고를 배제해야 할까? 산만함은 우리의 삶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해야 할까?
저자는 데이비드 흄을 언급하며 ‘중용의 길’을 제시한다.
한 가지 문제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성향이 강했던 흄은
과도한 집중의 덫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중략) 흄은 논리적이고 일관된 선형적 사고에서 벗어나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다양한 삶의 순간들을 경험하고자 했다.
P. 105
흄은 논리적 사유를 ’냉정하고 억지스러우며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에게 있어 산만함은 주사위 놀이를 하고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등 타인과의 관계 형성에 중요한 요소였다. 그렇기에 홀로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넘겨 보는 행위는 삶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행위와도 같았다.
결과적으로 흄 또한 논리적 사유만큼 산만함과 감각적 경험을 중요하게 여겼고, 저자는 이를 통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랑시에르 또한 집중과 산만함의 균형을 강조했다.
그는 일과 놀이, 선형적 사고와 비선형적 사고의 경계를 허물고 집중과 산만함이 공존하는 가운데
평범한 일상을 독특하고 창의적으로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P. 134
하지만 무엇이든 ‘적당히’가 가장 어렵다. 우리는 집중과 산만함을 50대 50으로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여기서 저자가 책의 말미에 내린 결론을 살펴보면 나름의 길을 찾아볼 수 있다. ”산만함과 몽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그것이 주는 기쁨과 고통을 경험해 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산만할 수밖에 없다. 하루 중 집중하는 시간이 얼마고 산만한 시간이 얼마든 간에, 그 얼마간의 산만함 속에서 우리 나름의 몽상을 해보면 된다.
물론 이것 또한 어렵다. 산만함을 단순히 디지털 기기 속 산만함이 아니라 몽상의 세계 속 산만함으로 바꾸는 것부터가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한 번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 앞에라도 나가보자. 집 밖을 나가는 게 정 어렵다면 거실로 나가 냉장고라도 한 번 열어보자. 키르케고르가 어떤 이의 지루한 담론을 들어주다 지쳐 그 사람의 얼굴에서 흐르는 땀에 집중한 것처럼 분명 산만하지만, 또 새로운 어딘가에 집중하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집중과 산만함의 소소한 공존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오늘 하루, 단순한 '멍때림'을 통해서라도 아주 짧은 산만함을 허락해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