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족을 좋아한다. 글의 큰 틀에서 벗어나는 걸 알면서도 작가가 굳이 욱여넣은 사담 같은 것들. 주석도 좀 좋아하는 것 같다. 인용 출처 같은 재미 없는 것들 말고, 문화적 맥락을 설명하느라 넣었다지만 독자의 이해를 위했다기보다는 그냥 역주의 북받쳐 오르는 애정 때문에 들어간 듯한 역주 정도를 좋아한다.
요즘은 나도 글을 쓸 때 사족 비스름한 것을 많이 넣고 있다. 예전 같으면 맥락에 맞지 않는다고 지웠을 말들을 최근에는 대충 괄호 안에 때려 박는다(하지만 이 때문에 문장과 문단의 완성도는 계속 퇴화하는 것 같다). (바로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면 필사할 때도 난 사족이 많다. 필사를 즐기지는 않지만 도서관 책을 읽을 때는 책에 밑줄을 긋거나 메모하지 못하니 필사를 종종 했는데, 그때 특이한 방법을 썼다. 책의 내용은 공책에 평범하게 적고, 거기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달 때는 공책을 90도 돌려 가로로 적었다. 그러니까 책 본문은 세로로, 내 첨언은 가로로. 그러다 보면 가끔 가로로 적은 글 분량이 더 많다.
<창조적 영감에 관하여>도 좀 그런 책이다. 재밌는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책을 읽으면 끈이 아주 긴 풍선을 잡고 산책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나는 여기를 걷는데 내 생각은 저 멀리. 그런 책을 읽으면 나야 재밌지만, 그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할 때면 곤란하다. 내가 한 생각이 정말 책에 관한 생각인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걸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 같다. 풍선이 흔들릴 때 그 방향이 일직선도 아니고 예측도 하기 어렵듯이, 내가 이 책을 읽으며 한 생각들도 중구난방이다. 평소의 나라면 그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 애쓰다가 하나둘 지워나가며 하나의 선을 만들 텐데 지금은 그냥 여기저기 다 늘어놓으련다.
2.
어릴 적에 아빠한테 해찰하지 말라는 말을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내가 딱히 대단한 해찰을 해서 훈계를 들은 건 아니고, 그냥 아빠가 해주신 여러 좋은 말 중 하나(라고 생각하며 여태 살았는데 지금 글을 쓰며 생각해 보니 같은 말을 여러 번 들었다는 건 역시 내가 대단한 해찰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해찰’이라는 단어는 어린 시절에 아빠에게 들은 이후로 한 번도 내가 직접 마주한 적은 없는 듯하다. 아무래도 실생활에서는 굳이 쓸 일이 없는 단어고, 글에서는 그래도 몇 번 봤을 법한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랜만에 이 단어를 마주하고 아빠에게서 이 단어를 듣던 날을 떠올린 것은 내가 좋아하는 뉴스레터에서였다.
안녕하세요. oo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매 호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뉴스레터 ‘인스피아’는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는 뉴스레터다. 내가 닮고 싶은 글이기도 하다. 저 인사말에서 해찰이라는 단어가 너무 오랜만에 떠올랐다. 어, 아빠가 하지 말라고 했던 거다!
나도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한다. 사실 느릿하게 해찰하며 누워 있는 것을 좋아한다.
3.
컴퓨터 키보드를 너무 능숙하게 다루다 보니, 우리는 이따금 스스로를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착각하는 듯하다. 빠른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릴 때, 우리는 어떤 일에 완전히 몰두해 구체적인 목표와 예정된 성공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p.119)
다시 연필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몇 달 전에 했다. 간단한 메모나 마인드맵을 제외한 모든 글쓰기를 키보드로 했는데, 그 문제점을 얼마 전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키보드는 머리의 속도를 손이 따라갈 수 있게 해준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래서 머리의 속도가 느릴 때는 손이 멈춘다. 그러면 머리는 손이 멈췄으므로 자기 할 일도 끝났다고 생각하나 보다.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길이 뚫릴 텐데, 손이 움직이지 않으니 머리도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고 착각하며 덩달아 멈춰버린다.
그래서 요즘은 생각할 거리가 많은 글쓰기를 할 때는 손으로 먼저 쓰고 있다. 그러면 아무래도 손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리지만, 머리의 속도도 같이 느려서 리듬이 얼추 맞춰진다. 속도는 더 느린데, 글쓰기 진도는 더 많이 나간다.
4.
비슷한 생각을 그림에서도 한 적이 있다. 어렸을 때는 장래 희망이 그림과 관련한 것이었고 학창 시절에도 그림 공책을 일 년에 두세 개씩 갈아치우던 나인데, 지금은 사 년째 같은 공책을 쓰고 있다. 사실 그 공책이 어디 갔는지도 모르겠다. 간단한 낙서조차 마지막으로 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난다.
이 큰 변화의 중심에는 마찬가지로 연필이 있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공부를 노트북으로만 하니 연필을 쥘 일이 많지 않다. 그래서 실은 내가 그림 자체를 좋아한 게 아니라 공부 대신 하는 딴짓으로서의 그림을 좋아한 것인가, 하는 묘한 서운함과 배신감(둘 다 나를 향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위의 가설이 사실일지라도 내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는 것 또한 여전히 사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탓할 거라면 딴짓을 좋아한 나를 탓할 게 아니라 딴짓할 환경을 제공하지 않은 나를 탓해야겠다.
5.
우리는 왜 강렬했던 ‘첫 느낌’의 특성을 그대로 간직하지 못할까?
(p.126)
“안 본 눈 삽니다.” 끔찍한 광경을 봤을 때 쓰이는 옛날 유행어이지만, 전혀 다른 경우에도 쓰인다. 너무 재밌는 작품이 있을 때 그 작품을 처음 감상하는 경험을 다시 하고 싶어서, “안 본 눈 삽니다”. 아무리 대단한 작품이어도 그걸 처음 보았을 때의 소름을 똑같이 느끼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저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그 작품을 무한 반복해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해리포터 전 시리즈를 삼백 번 정도 본 사람이 “ㅠㅠ해리포터 안 본 눈 있으면 사고 싶다” 이러고 있다는 뜻이다.
왜 이런 미련한 짓을 하냐면 한 번 보면 한 번 본 느낌이 좋고, 두 번 보면 두 번 본 느낌이 좋고, 세 번 보면 세 번 본 느낌이 좋아서 그렇다. 첫 느낌의 강렬함은 없지만 다른 맛이 생긴다. 하지만 줄거리나 요약본, 정보 글 같은 걸 여러 번 본다고 곱씹는 맛을 느낀 경험은 아직 없다. 하지만 또 모르는 일이다. 시리에게 질문하는 게 자연스러운 세상에서는 저런 정보를 웹서핑으로 찾아본 것이 내 몸이 직접 한 경험이 될지도. 또 정보를 칩 이식으로 제공받는 게 자연스러운 세상에서는 시리에게 물어본 게 의미 있는 경험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