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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요즘 나는 좀처럼 집중하지를 못한다. 집중력이 확실히 떨어지고 있다. 집중력도 습관이고 관성임을 뼈 저리게 느끼며, 무언가에 몰두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책하곤 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을까. 당장 내 주변에도 휴식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목적이 없는 일에 재미를 찾기 어려워하는 사람들. 성취와 결과만을 좇으며 뛰어가는 사람들. 그들처럼 열정적으로 뛰어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편안히 여유를 즐기지도 못하는 나는. 언제나 갈팡질팡 몰입과 산만함의 경계에 서있다.

 

몰입이 미덕이며 산만함이 악덕이라고 칭해지는 요즘, <창조적 영감에 관하여>는 다소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원제목 'The Plenitude of Distraction'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머리나 밴줄렌은 산만함에 깃들어 있는 풍요로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소 산만하게 전개되는 140여쪽의 페이지는 몽테뉴, 데카르트, 버지니아 울프, 프랜시스 베이컨, 니체, 흄의 말과 작품을 통해 구체화된다. 중간 중간 삽입된 흑백의 사진들은 멈춤의 미학을 직접적으로 적용하는듯 보이기도 한다. 머리나 밴줄렌이 말하는 산만함의 풍요로움은 과연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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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 지연


 

먼저, 긍정적인 산만함의 핵심에는 '만족 지연'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한다. 즉, 우리가 침대에 누워서 유튜브 쇼츠와 인스타그램 릴스를 생각없이 내리며 쾌락을 얻는 행위는 여기서 말하는 산만함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즉각적이고 자극적인 보상은 우리 뇌의 보상 체계를 망가뜨린다. 그렇게 뇌는 사소하고 잔잔한 것에서는 더 이상 행복감이나 쾌락을 느끼지 못하게 변해버리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수많은 산만함 중에서도, 더 큰 만족을 위해 현재의 즉각적인 보상을 잠시 미뤄둘 수 있도록 하는 행위들이 아닌 것들. 디지털 기기에서 비롯되는 산만함은 이 책에서 긍정하는 산만함에 포함될 수 없다는 것을 단단히 짚고 넘어가고 있다.


 

 

목적 없음


 

윌리엄 제임스는 미묘하고 다양한 감정의 층위를 느끼기 위해서는 아무런 목적성 없이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한다고 말한다. 칸트 또한, 아름다움이 '목적 없음'에서 생겨난다고 이야기 한다. 당장에는 쓸모 없어 보이는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삶이 꼭 필요한 것만으로 채워질 수는 없는 법이니 말이다. 자신의 취향을 설계하고 발전시켜나가기 위해서는 단순히 아름다움, 혹은 재미만을 추구하는 관점을 장착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더 근본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애초에 세상에는 목적이 없지 않은가. 내가 여기 이 세상에 등장하게 된 것은 어떠한 중대한 임무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함이 아닌, 그저 존재 자체로 목적이고 의미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반추와 깊은 권태


 

니체는 반추를 역설한다. 우리 인간은 네 개의 위장을 가진 소들에게서 배워야한다고 이야기한다. 먹이를 천천히 되새김질하며 소화를 하는 소들처럼, 우리 현대인들도 어려운 개념을 꼭 꼭 씹어 느리게 이해하여 내 것으로 만들어내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깊이 사유하고 성찰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관조적으로 침묵하는 연습이 되어야한다. 또한, 우리가 뒤로 물러서는 것은 어떤 하나의 목표를 찾기 위해서가 아닌,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함임을 깊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하이데거 또한 같은 맥락에서 '깊은 권태'를 이야기한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산만함은 자기 성찰의 괴로움을 피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방어 기제라고 이야기한다.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오히려 우리는 그 괴로움을 대면하고 마주해야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깊은 권태 속에서 인간들이 자가 존재, 본질적인 자아를 마주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권태가 없다면, 우리는 그저 피상적으로 삶을 살며 그 무엇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로 권태의 긍정적인 면을 포착한다면, 우리는 그제서야 집중력을 다르게 쳐다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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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보면, 내가 알던 집중력과 몰입 그리고 산만함의 개념이 무너지고. 대체 정확히 무엇을 긍정하고 있는거지? 라는 의문이 생기는데. 바로 그런 의문 자체가 이 책의 메시지이다. 흄이 중용을 강조했듯, 머리나 밴줄렌은 일과 놀이, 선형적 비선형적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집중과 산만함이 공존하는 가운데 평범한 일상을 독특하고 창의적으로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영어영문학을 전공한 나는 버지니아 울프를 특히 좋아한다. 그 인상주의적인 문체, 의식의 흐름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기법은 우리의 일상과 매우 닮아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글은 마치 내가 누군가의 머릿속에 들어와있는 것처럼 자유롭고 톡톡 튄다. 일상 속에서의 비일상적인 것들을 포착하는 연습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글은 아마도 산만함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여자가 온전히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지 않았던 그때에, 버지니아 울프는 거실에서 글을 집필했다. 손님이 들락날락 거리고, 온갖 다양한 외부의 요소들에 의해 순간 순간 멈춤이 개입된 그의 글은. 더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산만함을 담고 있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목수를 관찰하며 느꼈던 것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산만함이나 집중력도 아닌, 그 모든 것이 혼합된 일상 속에서의 확장이다. 랑시에르는 '소유하다'라는 것이, 단순히 무엇을 가지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그것을 감각적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방법을 알았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깊은 권태와 반추, 목적 없는 몰입, 긍정적인 산만함을 통해 찾아낼 수 있다.


혹자는 권태를 그저 특권이라 여길 수 있다. 당장 먹고 살기 바쁜데, 당장 취업 준비하기 바쁜데 무슨 권태야-. 그러나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창문과 마루를 바라보며 상상을 하는 목수를 보자. 독일에서 마주한 권태 속에서 방울토마토를 집어든 나를 보자(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2728). 나름의 방법으로 현실을 재구성해나갈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내적 해방에 이른다. 우리는 삶을 과연 소유하고 있는가? '나의' 삶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나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인가?

 


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는 진실은 때때로 게으름 속에서, 몽상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 버지니아 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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