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그 어느 때보다 갈등이 심하고 양극화된 세계에서 음악은 이 어지러운 세상을 바꾸는데, 그 어떠한 힘도 발휘하지 못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매년 6월,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철원에선 ‘음악으로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다’라는 말이 결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피부에 와닿는 현실이 되어 다가온다. 지난 6월 13일부터 3일간 고석정 일대에서 개최된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올해 DMZ 피스트레인은 그 어떤 해보다 유독 향기로웠다. 협찬사로 참여한 러쉬코리아가 땀 냄새 나는 페스티벌 부지를 러쉬 고유의 향으로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러쉬는 페스티벌 리프레시 존에 브랜드를 대표하는 향 ‘카마’, ‘그래스’ ‘슬리피’, ‘더티’를 테마로 꾸민 화장실을 설치했다. 보통 페스티벌 화장실은 더럽고 불쾌하다는 고정관념이 있는데, 러쉬가 설치한 화장실에선 페스티벌 내내 은은한 향이 퍼졌고, 축제가 끝날 때까지 비교적 청결하게 유지되었다.
화장실 내부뿐만 아니라 페스티벌 부지 곳곳에서 관객들은 러쉬의 글리터 미스트, 바디 스프레이 등을 마음껏 이용하며 보송보송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남성 화장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여성 화장실의 수를 크게 늘려 여성 이용객들의 편의성을 높였다. 어디를 가든 화장실이 깨끗하고 쾌적하면, 그 장소에 대한 인상이 확연히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러쉬와 DMZ 페스티벌의 만남은 모두에게 완벽한 윈윈이었다.
금요일 전야제로 축제의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린 DMZ 피스트레인의 본격적인 첫 무대는 단편선 순간들이 맡았다. 장엄하고도 경쾌한 그들의 음악에 무용수들의 춤이 어우러진 모습은 마치 잘 구성된 현대예술을 보는 것만 같았다. “여러분들은 미래로 가십시오. 더 이상 울지 않고 더 이상 죽지 않는” 소외된 자와 연대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는 ‘음악만세’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큰 환호로 답했다.
헤드라이너가 없기로 유명한 DMZ 피스트레인은 신선하고 독창적인 라인업을 자랑한다. 특히 세대를 초월한 가수들의 명곡을 직접 라이브로 들을 수 있는 게 디엠지의 가장 큰 묘미다. 올해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낸 무대 중 하나는 바로, 토요일 밤을 수놓은 김현철과 김민규의 공연이었다.
김현철의 히트곡 ‘왜 그래’, ‘달의 몰락’과 비슷한 연배이거나 혹은 노래보다 한참 어린 관객들도 이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 부르며 신나게 춤을 췄다. 좋은 음악은 절대 늙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 무대였다. 김민규가 델리스파이스의 ‘항상 엔진을 켜둘게’, ‘챠우챠우 –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해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 ‘고백’을 부를 때는 현장에 있는 모두가 각자 자신만의 타임머신을 타고, 이 노래를 즐겨듣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음악은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타임머신으로, 잊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을 순식간에 현재로 소환한다. 어쩌면 누군가는 앞으로 델리스파이스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선선한 밤공기와 함께 철원 고석정에서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외치던 2025년의 초여름으로 몇 번이고 되돌아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올해는 유독 펑크를 기반으로 한 밴드들의 무대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일본에서 온 4인조 록밴드 텐도지는 ‘EASY PUNK’라는 자신들의 지향점을 그대로 담은, 경쾌하고 밝은 에너지 넘치는 음악으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영국에서 온 노이즈 펑크 듀오 람브리니 걸스는 파괴적인 에너지로 무대를 순식간에 장악하더니, 관객들과 함께 ‘프리 팔레스타인’을 외치고 퀴어 친화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며 뜨거운 연대의 힘을 보여줬다.
페스티벌의 마지막을 장식한 한국 펑크의 대부 사랑과 평화는 자신들을 ‘신인 그룹’으로 소개하는 너스레와 함께 연륜이 묻어나는 멋진 무대를 선보였다. “모두 기죽지 말고, 다 함께 힘을 내, 함께 가야 해”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거세게 퍼붓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관객 모두가 마지막까지 한목소리로 외친 이 가사는 험난한 세상에 꺾이지 말고 함께 살아가자는, 서로를 향한 격려이자 다짐과도 같았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순간이 있다. 앞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비가 거세게 오던 축제의 마지막 날 밤, 미국 인디 밴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의 보컬 미셸 자우너는 암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고향 한국에서 1970년대 가요 김정미의 ‘햇님’을 불렀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언어를 이해하고 싶어 1년간 한국에서 생활하며 한국어를 배웠다던 그는, 한국어로 된 가사를 또렷한 발음으로 진심을 담아 부르기 시작했다. ‘햇님’이라는 노래가 울려 퍼지던 그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축제가 진행된 사흘간 비가 가장 많이 오던 때였다. 앞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비가 거세게 몰아쳤지만, 얇은 우비 하나를 걸친 사람들은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노래를 크게 따라 불렀다. 물폭탄 수준의 비도 음악 안에서 하나가 된 사람들을 방해할 순 없었다.
DMZ 피스트레인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분비자’, SCR 스테이지의 열기 역시 올해도 뜨거웠다. 고석정 분수대에 있어 누구나 무료로 즐길 수 있는 이 무대에선 부모님과 함께 온 어린아이부터 페스티벌을 즐기는 젊은이, 철원에 거주하는 중장년층이 한데 어울려 춤을 추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기차놀이를 하는 모습 속에서 ‘서로에게 선을 긋기 전에 함께 춤을 추자’라는 DMZ 피스트레인의 모토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생생하게 와닿았다.
사회는 다름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별, 가치관, 정치적 입장 등 나와 다른 타인을 이해하려 노력하기보다, 쉽게 판단하고 경계를 긋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음악 안에서 우리는 나라는 사람을 규정짓는 모든 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온전한 '나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처음 만난 사람과 손을 맞잡고, 눈을 마주치며 웃고, 함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던 그 순간, 타인에게 날을 세우던 뾰족한 마음은 금세 무뎌지고 만다.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행위가 더 많은 연결과 넓은 연대로 이어지는 마법 같은 일이 철원에서 일어난 것이다.
공연 내내 록스타의 면모를 뽐내며 질주하던 김뜻돌은 마지막 곡 ‘요가난다’에서 템포를 낮추고, 관객 모두가 옆 사람과 손을 잡도록 유도했다. 사람들은 양옆의 손을 맞잡으며 자연스럽게 큰 원을 만들어갔다.
“나는 어제와 다른 나 / 나는 엊그제와 다른 나 / 나는 일 년 전과 다른 나
너는 어제와 다른 너 / 너는 일 년 전과 다른 너 / 너는 내일과 다른 너”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여전히 확실한 답을 내리긴 어렵다. 그러나 음악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음악 아래에서 타인과의 경계를 허물고 마음 깊이 연결된 경험을 한 사람은 깨끗하고 맑아진 영혼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어제와 다른 나’, ‘어제와 다른 너’가 만나 조화롭게 얽힐 때, 비로소 모두가 꿈꾸는 평화가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