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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화회관] 포스터_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5.16~8.31).jpg

 


나는 그림을 잘 모른다. 무언가 구도가 이러하고 이 작품 속 인물과 화가에겐 어떠한 관계가 숨어져 있고, 같이 깊은 파악이나 내용을 잘 모른다. 그래도 그림을 좋아한다. 책을 읽을 때도 저자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로 골라서 읽고, 재미있어서 이후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는 방식이다. 사람을 알아보고 팬이 된 다음이 아니라 작품을 먼저 보고 그 사람의 팬이 된다. 그러다 보니 잘 모르는 화가가 있어도 내가 좋아하는 풍경화나 꽃 같은 정물화가 있으면 보러 가게 된다. 이런 식으로 한 화가의 그림은 전시가 기획될 때마다 세 번이나 고등학교 친구와 보러 간 적이 있다.

 

전시회에 가는 건 시선이 그림에 맞닿는 시간과 보는 순서가 비슷한 사람과 간다. 그래야 서로 정적인 채 그 그림을 마음껏 볼 수 있다. 그래서 비슷한 사람과 다녀왔다. 그림은 143점으로 정말 많았지만 길게 보고 싶은 건 길게, 짧게 보고 싶은 건 짧게 보는 등 가감하여 한 시간이 걸렸다.


이번에 본 [모네에서 앤디워홀까지]는 특이하게도 전국을 순회하는 방식으로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경주와 부산, 제주를 지나 이번에는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 열렸다. 세종문화회관이 있는 광화문은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라 들뜬 마음으로 갔고, 무려 173번이란 웨이팅 번호를 받았다. 처음엔 인기가 많구나 놀랐다가, 이번 전시는 서양미술사 거장들의 명화를 가까이서 마음껏 볼 수 있는 기회라 금방 납득되었다. 입장을 기다리는 한 시간 반 동안 광화문의 바닥 분수도 찰박거리고 청계천도 시원하게 돌아다녔다.

 

항상 광화문에서 힐링하는 코스대로, 근처 옷가게를 다녀갔다가 교보문고에서 신간 도서와 핫트랙스의 귀여운 말랑이들을 보고 있으니 시간이 지나갔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에서 20세기 현대 미술까지의 400년짜리 미술사 주요 흐름을 볼 수 있다는데 이 정도 기다림은 가벼운 기대감을 지녀도 금방이었다.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명화와 촬영 불가한 명화가 있다는 안내를 받고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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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대로, 이번 전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의 주요 소장품 143점을 아홉 구간에 나누어 시대별로 구성한 대규모 전시다.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립미술관이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를 포함해 18-19세기의 영국과 유럽 거장 작품뿐 아니라 현대까지 3만 점이 넘는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설립자 플로렌스 필립스는 20세기 초반 유럽 미술품을 남아프리카로 들이며 요하네스버그가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가 되길 바랐다고 한다. 이에 맞추어 한국에 상륙한 이번 전시에선 앙리 마티스, 클로드 모네, 빈센트 반 고흐, 파블로 피카소, 장 프랑수아 밀레 등 서양미술을 대표하는 89인의 거장들의 작품을 보며 미술사의 흐름을 살필 수 있었다. 나는 도슨트 없이 그림을 즐겼는데, 평일엔 도슨트 해설이 존재한다. 오디오 도슨트의 경우 언제든 무료로 들을 수 있어 작품을 깊이 있게 즐길 수 있으며, 전시의 웨이팅을 통해 입장하는 인원수를 제한하여 더욱 쾌적하게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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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공간에 맞추어 당시 역사나 사회적 상황에 비롯한 미술사를 설명해준 덕분에 공간을 꾸린 의도가 잘 보였다. 긴 벽에 비슷한 사이즈의 그림 서너 개를 배치하여 시선의 높이를 맞춘 디테일이 엿보였다. 특히 친절하다고 느꼈던 부분은 그림에 관한 설명이었다. 으레 그렇듯 어떤 작가의 그림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작가가 어느 시대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추가적으로 설명을 넣어 그 작가에 관해 관객들이 이해를 한 다음 작품을 볼 수 있어 더욱 입체적이고 풍성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Seghers, Daniel, Flower in a vase, oil on oak panel, pre-1661, Johannesburg Art Gallery, Republic of South Africa (1).jpg

 

 

이번 전시에서 가장 마음에 든 작품은 다니엘 세이거스(1590-1661)의 <꽃병에 꽂힌 꽃(Flower in a Vase)>였다. 17세기 바로크 시대 당시 플랑드르(현 벨기에)에서 최고의 꽃 화가로 손꼽힌 다니엘 세이거스는 벨기에 출신이지만 당시 신교도로 개종 후 네덜란드에 정착한 뒤 네덜란드의 상징화인 튤립을 그려내었다. 당시 신교도는 학문과 예술을 통한 선교 활동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세이거스가 그림을 통해 신앙을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 위 정물화는 단순한 꽃 그림이 아닌 이상의 가톨릭적 의미가 존재한다. 위로 솟은 튤립은 부활과 인간의 덧없음을 곧고 당당하게 보여준다.

 

또한 앞으로 툭 튀어나오듯 입체적인 장미의 모습은 순교와 사랑, 예수를 뜻하며, 그림을 풍성하게 돋보이게 한 사선의 백합은 순결과 성모 마리아를 상징한다. 작고 좁은 유리컵 같은 화병에 큰 꽃들을 모아두고 정밀하게 묘사한 사실주의를 통해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찬양하지만 동시에 ‘꽃’이 주는 유한한 시간 속 탄생과 죽음으로 신의 섭리 속 영성과 조화를 보여준다. 이를 알고 나면 더욱 풍성하게 그림을 즐길 수 있게 된다.

 

 

Boudin, Louis Eugéne, Trouville Port, oil on canvas, 1893, Johannesburg Art Gallery, Republic of South Africa (2).jpg

 

 

이외, 배가 정착되어 있는 등의 풍경화는 타 그림보다 벽의 간격을 넓혀 더욱 시야가 확장된 기분을 느낄 수 있었고, 물에 비친 배와 사람들의 일렁임이 맑게 다가왔다. 이상하게 물에 비친 흐릿함을 볼수록 그림이 더욱 인물화의 경우 그림 속 여성과 눈을 마주치다 보면 그녀가 앉아 있는 팔걸이 소파의 촉감과 허리의 꼿꼿함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좁은 공간의 전시나 넓은 공간의 전시 모두 매너 있는 관람으로 조용히 작품을 즐길 수 있었다.

 

전시를 다 본 이후, 나가는 길에 굿즈샵이 있는데 패브릭 포스터나 그림 엽서, 에코백 등 작품을 활용한 다양한 굿즈를 보며 여운을 맛볼 수 있다. 그림 속 화가들의 작고 섬세한 붓 터치 질감으로 그들의 열정 어린 시간을 엿본 덕분에 삶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어 감사하다. 이번 전시는 8월 31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진행된다. 즐겁게 전시를 다녀온 후 광화문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여유를 만끽하는 건 어떨까. 훗날 우리의 삶도 그림처럼 묘사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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