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교환학생 시절, 흥미로운 소식을 들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이탈리아 프로듀서에 의해 연극으로 각색돼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공연된다.”
한국에서도 공연된 적 없는 이 작품이 유럽 무대에 오른다는 사실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게다가 당시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직후였기에, 그 자부심은 더 크게 다가왔다. 내가 이곳에 있는 지금, 직접 그 공연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큰 기회처럼 느껴졌고, 망설임 없이 예매 버튼을 눌렀다.
극장에 갔을 때, 내가 본 관객들 중에 한국인은 아무도 없었다. 이탈리아인들이 가득한 공연장에서 유일한 한국인으로서 <채식주의자>를 본 경험은 어땠을까? 이 글에는 내가 그 공연을 보고 느낀 여러가지 인상깊은 포인트들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1. 언어를 넘은 공감, 한국적 정서의 힘
연극 속에는 '소주', '김치', '불고기' 같은 단어들이 번역 없이 그대로 등장했다. 순간, 혼자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방인의 도시에서, 낯선 언어 속에서, 나만 아는 언어가 울려 퍼지는 순간의 묘한 쾌감.
내 앞에 앉은 이탈리아 관객이 옆 상대에게 “소주가 뭐야?(Qual e' soju?)”라고 속삭이는 장면에서, 나만이 알고 있는 무언가를 공유하는 듯한 특별한 감정이 들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울려 퍼질 땐, 한국인으로서 느끼는 정체성과 자긍심이 교차하며 짧지만 강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게다가 나는 그 때 당시 이탈리아 생활이 길어지며, 이탈리아 커뮤니티 내에서 느끼는 이방인으로서의 서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한국인이 아니면 이해하지 못 하는, 그런 포인트들을 나 혼자 이해할 수 있다는 것에, 공연이 내게 위로를 건네는 듯 했다. 마치 낯선 나라에서 느끼는 고향의 향기랄까?
비주류로 살고 있는 이국의 생활 속에서, 비로소 중심에 선 듯한 순간이었다.
2. 서양이라서 가능한, 또 다른 무대의 해석
이 연극은 표현의 수위가 한국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속옷을 다 벗고 등장하거나, 성관계를 하는 장면들이 그 예시이다.
나체나 섹슈얼한 장면들이 예술적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했고, 전혀 자극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연극이란 장르가 주는 직접성과 육체성이 <채식주의자>라는 작품에 굉장히 잘 맞아떨어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3. 똑똑한 무대 연출, 감각적인 시각 언어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형부가 영혜의 몸에 그림을 그리는 ‘몽고반점’ 챕터 속에서 등장했다. 나는 실제로 배우의 몸에 붓을 대는 줄 알았지만, 무대는 더 감각적인 방식으로 풀어냈다. 배우에 몸에 조명이 비추어지고, 그 위에 빔 프로젝터를 해 그림이 겹쳐지는 방식이었다. 직접 닿지 않지만 분명히 닿는 듯한 시각적 연. 이것이야말로 연극, 미술, 기술이 맞닿는 순간이었다.
4. 무대화를 꿰뚫어 본 연출의 통찰
텍스트만으로도 강렬한 <채식주의자>는 무대 위에서 더 빛났다. 특히 형부의 직업이 ‘비디오 아티스트’라는 설정은 무대적으로 훌륭히 활용되었다.
그의 시선으로 영혜를 바라보는 구조는, 관객 또한 비디오의 시선에 동참하게 만들었다. 자극적일 수 있는 이야기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각도로 풀어내느냐에 따라 그 감정의 온도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 공연은 단지 책을 옮긴 것이 아닌, 연극이라는 언어로 재창조된 작품이었다.
5. 공연을 향유하는 문화의 차이
한국에선 젊은 관객들이 ‘덕질’의 연장선에서 공연장을 찾곤 한다. 하지만 이탈리아 공연장엔 노년의 관객들이 대부분이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극장에 들어오는 모습은, 나에겐 꽤 낯설고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들은 클래식 공연이 아님에도 말끔하게 차려입고 극장에 왔고, 나는 청바지를 입은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문득, 이들에게 공연은 단순한 ‘문화소비’가 아니라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이 끝나고 로비에 삼삼오오 모여 공연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모습도 인상 깊었다. 그들이 어떤 감정으로 이 한국 작품을 받아들였을지 궁금해서, 나도 이탈리아어 후기를 찾아보곤 했다.
이 연극은 나에게 다시금 예술의 본질을 생각하게 했다. 언어와 문화, 국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은 어떤 형태로든 공유될 수 있다는 사실.
익숙하지 않은 무대, 낯선 언어, 생소한 나라. 그럼에도 나는 무대 위에서 고향의 냄새를 맡았고, 한국이라는 문화가 당당히 세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또한, 예술은 국경을 넘고, 감정을 공유하게 만든다는 것도 확신했다. 나는 세계 속에서 한국 예술 컨텐츠가 주목 받을 때, 큰 희열을 느끼는 것 같다. 앞으로도 한국과 이탈리아, 그리고 세계 사이에서 예술이 교류의 다리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 마지막으로, 반가운 소식 하나!
이 공연은 2025년 6월, 부산국제연극제에 초청되어 한국 무대에도 올랐다.
한국 관객들도 그 작품을 보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한국에 정식적으로 연극이 올라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예술이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