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아하는 국내 작가로 언제나 배명훈 작가를 꼽는다.
그의 글에는 어떤 힘이 있다. 문장이 미려할 뿐 아니라, 예열 없이 독자를 곧장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그러니까 몰입감이다.
<기병과 마법사>는 그의 최신작으로, 기사(knight) 대신 우리 문화권에 맞게 기병이, 그리고 삶을 통제받는 여성이 마법사로 등장하는 판타지 소설이다.
폭정으로 나라를 얼어붙게 만든 왕을 숙부로 둔 주인공 영윤해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침묵하며 살다가,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외곽지역 군 지휘관이 되어 조력자 다르나킨과 함께 삶과 세상을 개척한다. 초원 지대 부족(마목인)과의 세력다툼, 이상한 인물의 등장과 기묘한 현상, 가늘지만 뚜렷한 사랑 구도 등 판타지 소설에 들어가야 할 법한 요소는 모두 들어가 있어 한 번 읽기 시작하면 그대로 자리에 앉아 되는대로 오래 앉아있게 하는 매력이 있다.
한반도 중심부터 북부 너머까지를 떠오르게 하는 가상공간이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어, 설정된 용어가 어려울지언정 분위기만큼은 꽤 친숙하다. 바른대로 말하자면, 한자 공부를 상당히 게으르게 한 나는 초반 100페이지 가까이를 꽤 더디게 읽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놓지 않은 까닭은 당연히 하나다. 참을 만큼 재미있어서! 특히나 전쟁 장면이 묘사될 때면, 머릿속에서는 자동으로 백억 대의 대작 드라마가 재생되곤 했다. 동시에 사전 조사를 위해 머리를 싸매야 했을 작가의 모습도 그려졌다.
주인공 영윤해는 송곳 같은 여자임에도 스물 중반이 되기까지 자신을 세상에 펼쳐 보일 기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오래된 집에 똑같이 오래도록 한 자리에 머물러 눈에 띄지 않는 가구 같은 삶. 답답하고 억울해도 어디 한 번 제대로 하소연할 수 없이 순응해야 했던 인생.
전근대 시기의 여성 캐릭터로 설정된 것치고 나이가 많은 윤해를 보면서,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구한다는 장대한 서사를 지켜보면서 작은 위로를 얻었다. 지브리의 <마녀 배달부 키키>가 사회 초년생 여성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듯, <기병과 마법사>는 자신을 드러내는 데 어려움을 겪거나 어색함을 느끼는 젊은 세대를 위한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너는 특별해. 너 자신의 힘을 믿고, 또 너를 믿는 사람들을 믿고 네 삶을 살아 봐. 라는 응원이라고 해야 할까?
남주인공인 다르나킨 역시 마찬가지다. 마목인이면서 경작인이라는 두 가지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그는 인종을 비롯한 현대사회의 정체성 고민을 담고 있는 인물이다.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해 외로워하던 그가 윤해를 만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또 고민하며 자신을 찾아가는 모습은 특히 일부 독자들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리고 결국은 단순하고 순수한 믿음으로 강직하게 맡은 몫을 해내는 이 캐릭터를 보면서, 한편으론 누구도 방황하지 않고 성장할 수 있도록 세상이 조금만 더 친절하길 바라게 된다.
믿음이라는 단어로 등장하는 경계를 넘는 연대는 배명훈 작가 글의 특징인 듯하다. 그것이 전략적인 것이든, 마음에서 우러나는 관계로서이든. 우리는 모두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는 손을 잡고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강력한 태도를 보여준다.
예상치 못한 조력자들이 함께 세상을 바꾸는 데 동조하는 장면들이 있다. 그들의 동조에는 기다란 설명 대신 짧고 단순한 믿음이 따라붙는다. 단지 맞을 것이거나 맞다는 믿음이다. 주인공을 돕는 인물들을 보고 있자면 괜히 나까지도 감동을 받는다. '세상을 구한다'는 너무 거시적인 말로 들리지만, 서로 손을 잡고 같은 목표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서로가, 우리가, 모두가 맞다는 믿음은 그렇게 단순한데 '함께'의 힘은 강력하다.
근래에 발행된 책 중 이렇게 속이 꽉 찬, 그리고 세계관이 확실한 국내 판타지는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판타지 팬들에겐 가뭄에 단비 같은, 또 일반 독자들에겐 판타지라는 장르의 매력을 확실히 각인시킬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