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단어는 가끔 투명하다 ― 공연을 마주하기 전, 내가 있던 자리
아레테 콰르텟에 따르면 공명은 '사상, 감정, 행동에 대해 공감하여 그와 같이 따르려 함'이고, 감각은 '바깥의 어떤 자극을 알아차림. 사물에서 받는 인상이나 느낌'이라고 말했다. 앞선 단어는 2025년의 전체 주제이며, 뒤의 '감각'은 상주음악가로서 하는 두 번째 공연의 부제다.
어쩌다 보니 공명을 주제로 한 공연에 현재까지는 모두 참석하고 있다. 지난 첫 번째 공연 때는 내가 이번 생에선 이해할 수 없는 스토리의 규율적인 곡들이었기 때문에 쉽게 몰입할 수 없던 기억이 있다. 더군다나 한참 현대 음악을 골라 듣고(?) 있는 와중이었어서 하이든의 곡은 평소보다 두 배는 더 갑갑하고 힘들게 느껴졌다. 설상가상, 아레테 콰르텟이라는 실내악팀은 어떤 색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사전 정보도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어렵게 느껴졌던 첫 번째 공연이었다. 그렇다면 지난 5월 29일은 어땠는가?
귀는 여물고, 마음은 어수선했던 ― 더 이상 멍은 안때립니다.
그 전에, 이 공연을 마주하기 직전의 나는 어떤 상태였는가? 일단 지난 1월보다는 훨씬 귀가 트인 상태임을 다짐할 수 있다. 3월에 엄청난 바르톡 소나타 청취라는 도전이 있었기도 했고, 다양한 연주자들을 오가면서 사람마다 가지는 해석(연주 스타일)의 서로 다른 재미를 알았다. 더군다나 이젠 사실 듣기만 하지 않는 시점이 되었다. 악장이 지나갈수록 보이는 게 많으니까(내 머릿속 생각이).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면서 공연을 관람하던 시기는 지났다.
어쩌면 나는 '감각'을 하기 시작한 것 같다. 나를 둘러싼 여러 자극들에 하나하나 귀를 기울이면서, 그 인상체들이 주는 느낌을 머릿속 안에 문장으로 죽- 나열하는 즐거움을 알았다. 그러니까 이 공연의 부제가 꽤나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음악 전공자도 아닌 내가 악장별 해석을 어떻게 하고,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를 어떻게 판단하겠나? 내 시야에 담기는 '풍경'을 담기 바쁘다. 어쩌면 그 공간에서 나는 누구보다 바쁘게 감각하고 있던 사람 중 하나지 않을까 싶다. 어떻게 섣불리 판단하냐 생각이 들겠지만, 늘상 그랬던 것처럼 아직 나는 내 마음의 10프로도 이 글에 담지 못했다. 어쩌겠나 나는 길게- 말하는 데 도가 트지 않았던가.
비플랫이라는 명랑한 틀 ― 시대를 따라 흐르는 네 개의 조성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먼저 감각했나? 순차적으로 나열해보자. 시대의 흐름 순이라고 하였다. 이 네 곡은 모두 공통점이 있다. 비플랫이라는 조성으로 시작하고, 마지막 브람스를 제외하면 '사냥'이라는 제목이 있다. 금호아트홀 카드 뉴스에 따르면 비플랫이란 '시'가 중심인 조성으로, 곡 자체가 밝고 활기찬 느낌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이든은 보다 경쾌하고 또렷할 것이며 모차르트는 유연하고 섬세한 감각을, 브람스는 따로 정해진 부제가 없어도 그 깊이를 스스로 증명해낼 것이라 자신했다. 좋다. 그렇다면 내가 아직까지 알고 있는 네 명의 작곡가는 어떤 느낌인가? 내게 하이든은 바흐만 같고, 모차르트는 아주 동그랗고 붕- 뜬 가볍고 투명한 소리의 곡들을 만들어내는 사람이고, 비트만은 딱 봐도 현대음악 작곡가 같고, 브람스는 특유의 '쪼'가 있고 장엄한 노래를 잘 만드는 사람이다. 이 정도의 생각을 가진 정도로 가볍게 아레테 콰르텟의 해석을 바라보자.
단정한 사람들 ― 아레테 콰르텟의 공명의 방식
그 전에! 내가 알게 된 이 콰르텟은 어떤 느낌이었는가? 아주- 아주- 모범적이다. 누구의 앞에서 모범적이냐? 작곡가 앞에서 아주 바른 자세로 서 있는 사람들이다. 소리가 모험적이지 못하고, 재미없다는 소리가 아니다. 앞서 그들이 내건 2025년의 주제는 공명이었다. 그들은 작곡가가 음악에 담아낸 사상, 감정, 행동을 공감하여 그와 같이 따르며 현악 사중주라는 장르에 집중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 포부가 하이든부터 브람스까지 너무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들의 소리 합 자체는 누구하나 튀지 않았다. 4중주지만 1중주 같았다. 첼로가 첼로 역할을 하는게 아니고, 바이올린이 바이올린 역할을 하지 않았다. 이미 흐름 자체가 하나의 결이어서 어디 하나 모난 곳 없는 '아레테'의 소리였다.
조용한 색채들 ― 네 개의 악기, 네 개의 파스텔
소리 자체의 느낌은 어떠했는가? 아무래도 제1바이올린의 소리가 가장 큰 흐름을 주도하기 때문에 전채안 바이올리니스트가 이 콰르텟의 큰 색채감을 담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채안 바이올리니스트는 은은한 아이보리가 섞인, 밀키함이 있는 딸기우유색과 연하늘색을 보여주었다. 연분홍과 연하늘색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따듯하고 포근하고 안정감을 준다. 정말 안정적이고, 우아한데 가까이서 보니 빛도 있다. 빛이 있다는 건 소리가 쨍-하고 선명하다는 것이다. 근데 그마저도 따듯하다. 뭔가 더 날 것처럼 휭- 날아오를 수도 있는데 딱 언저리에 머물러서 다른 영역까지 안아버리는 흐름이다. 파동 자체도 깊게 타기보단 잔잔한 물결처럼 흘러온다. 연주를 하며 상체가 앞으로 내려올 때도, 대각선 뒤로 물러날 때도 과격하지 않다. 게임 중에서 타이밍에 맞춰서 가운데 쯤에 놓여있는 특정 영역에서 stop을 눌러야 하는 것이 있지 않은가? 제1바이올린은 남들이 어려워 전혀 깨지 못하는 '중간지대' 안에서 따듯한 소리를 내는 사람이었다. 그 흐름 안과 밖과 옆에 또 하나의 바이올린이 함께하고, 첼로도 보이고 비올라가 곁에 있다. 첼로는 육중하게 내려앉는 사람은 아니었다. 여기도 딱 그 닿기 어렵고 머물기 어려운 바이올린의 딱 아래 위를 오갔다. 비올라는 정말 때로는 첼로 같았다. 이렇게 목소리가 큰 악기였던가? 가끔은 빠르게 기교도 부리는데 가볍지 않았다. 그런 소리였다. 다들 일단 파스텔톤은 확실했다. 전채안 바이올리니스트가 연하늘과 연분홍을 오가는 사이에 박은중 바이올리니스트는 그 옆을 연두색으로 지켰고, 비올라는 톤다운된 다홍색, 첼로는 무겁지 않으나 연보라보다 짙은 언저리의 색으로 아래를 지켰다.
어떤가? 내가 감각한 이 팀의 색이 보이는가? 따듯한 사람들의 소리다. (연주가님들 성격좋으시죠?) 누구하나 높게 튀어오르지 않고, 자신들의 특유의 부드러운 말랑카우같은 색감을 가진 채 작곡가의 '의도'를 정확히 반영시켜버리는 무서운 모범생같은 사람들이다. 특히나 고전의 작곡가들은 종교적인 배경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하이든과 모차르트 할 법에는 정말 수도원에 소속된 정규 현악 4중주 팀이 공연하는 줄 알았다.
그들의 바깥에서 ― ‘사냥’과 ‘비플랫’의 진짜 얼굴
작곡가의 악보 안에서 충실히 공감하고, 진동하는 게 보였다. 왜냐면 하이든 때는 잔잔하고 좋았지만 여전히 내게는 규율적인게 느껴졌고, 모차르트는 하이든을 존경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반영하면서도 그가 그려내는 통-통- 튀기는 물방울을 조금 더 확장해서 보여주었고, 비트만 때는 작곡가가 지시한 게 아니라면 절대 못보여줬을 엄청난(?) 텐션의 힘으로 연주와 괴성을 질러주었으며, 마지막 곡에서는 정말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고전을 중시했던 브람스만의 느낌과 풍성한 사운드감을 보여준게 기억에 남는다. 비트만은 논외로 치고 하이든-모차르트-브람스 순서대로 소리와 표현 자체가 조금 더 확장 되고 있음이 충분히 전달되었다. 이러하니 내가 모범생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다. 모범적으로 그들의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청중하게 건넸다. 작곡가와 공명한 현악4중주를 내가 또 언제 보겠는가?
사실 내가 그들에게 공명할 수는 없었다. 주제 자체도, 곡 표현 자체도 나(청중)에게 닿고자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가운데서 피어난 소리가 뒤쪽에서 위로 향하는 게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관람객이었다. 영화나 전시회에서 작품을 감상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겠다. 전람회의 그림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그것도 안되면 곡 자체가 비 플랫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비트만을 제외하면 이 곡들에 화려한 기교나 서글프거나 한없이 서정적인 표현 자체가 없다. 그저 흐름을 느껴보는건 정말 평화 안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게 무엇인지 탐구하는 시간에 오히려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곡에 대한 얘기는 하나도 못했는데 벌써 말이 많다. 그렇다면 내가 진짜로 '감각'한 시선을 논해보자. 나는 아레테콰르텟을 통해 어떤 '사냥'과 '비플랫'을 만났는가?
그림자 없는 활 소리 ― 하이든의 ‘사냥’은 들판을 고르고 있었다.
Haydn: String Quartet No. 1 in B-flat major, "The Hunt", Op. 1 No. 1, Hob. III:1
아직 사냥을 해본 적이 없어서일까(?) 이 감미로운 곡들의 제목이 ‘사냥’이라는 것 자체가 좀처럼 와닿지 않았다. 너무나도 고아하고 귀족적인 곡들인데 왜 ‘헌트’일까? 한글로 적힌 ‘사냥’은 뭔가 더 공격적이고 날것의 느낌이 있다. 이게 귀족들 특유의 기만인 걸까. 살생을 하면서도 이렇게 고아하려 하다니. 만약 이 생각이 맞다면 조금 무섭겠다. 뭐가 되었든 현대를 살고 있는 나에게 하이든의 ‘사냥’은 오히려 고요한 들판이었다. 사냥의 무자비함이 아니라, 인간의 손에 '사냥터'로 지정되기 직전의, 아무것도 모른 채 평화로운 들판 그 자체다. 제1바이올린의 우아하고도 쨍-한 소리로 연하늘- 연하늘- 하면서 그림을 길게 펼쳐놓으니 들판 위의 파란 하늘이 두둥- 하고 떠올랐다. 제2바이올린은 구름이다. 하늘의 표정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미소를 띤 채 지켜보며 흰 구름을 동동- 띄워낸다. 첼로는 조용한 나무다. 크게 흔들림은 없지만, 하늘이 가져오는 바람 소리에 나뭇잎을 흩날리며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현 위를 가볍게 스치면서도 분명한 소리를 내는 게 신기하다. 비올라는 아마도 이미 스며든 빛이겠다. 모습 자체는 크게 보이지 않지만, 하늘 바닥에 노랗고 맑은 빛이 첼로와 바이올린 사이 언저리에 머물고 있다.
그래. 여긴 사냥터가 아니라, 사냥터로 점 찍힌 불쌍하고 고즈넉한 들판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아 자연 그 자체로 이미 원 상태인 곳. 딱 그런 아름다움이다. 4악장부터는 조금 더 트럼펫 같은 짱짱한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이제 이 들판이 사냥터가 되었음을 알리는 인간의 팡파레겠다. 발견자가 상사와 백성들에게 고하는 어떤 발표만 같다. 제3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나로서는 그 당당한 외침이 어이없으면서도 또 소리는 좋아서 아이러니하고 재밌었다. 마지막 5악장은 조금 더 신난 느낌이었지만, ‘빠르게 나를 두고 달려 나가 버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워낙에 연주가들이 따뜻한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하이든이라면 이 정도의 빠르기와 질감으로 연주하라고 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이 곡으로 하이든에 대한 나만의 선입견을 깼다. 마냥 규율적인 분은 아니시네, 좋네..라고 말이다. 물론 여전히 ‘규범’적인 결은 있지만, 그 안에 담긴 균형의 숨결이 느껴졌다.
절제의 끝에서 빛나는 ― 모차르트는 오늘도 정확하다
Mozart: String Quartet No. 17 in B-flat major, "The Hunt", K. 458
모차르트의 사냥은… 여전히 귀엽다. 일단 하이든보다는 더 신났다. 아직 덜 교육화된 것만 같다. 여기도 누가 봐도 사냥은 아니다. (주제에 어긋난 연주라는 게 아니라, 곡 자체가 왜 사냥인지 이해가 안된다) 1악장에서 제1바이올린이 ‘또로롱~’ 하고 활 하나를 긋는 그 순간이 몇 번있다. 그 모습은 볼 때마다 너무 신기하다. 전채안 바이올리니스트는 내가 본 연주자들 중에서도 꽤나 특색이 있는 연주가 같았다. 막 날뛰는 타입도 아니고, 춤추는 것도 아닌데, 그 정말 아득한 중간지대에서 우아하게 절제되어 있다. 그 머묾이 매력적이다. 또로롱- 할 때마다 음이 중간마다 선명해지는데도 더 뻗어내지 않는다. 신년음악회에서 종교곡을 연주할 땐 그 절제가 갑갑하게 느껴졌지만 이 곡 안에 들어오니 귀족적인 느낌이 맞아떨어졌다. 매번 톤과 자세가 일치하는 걸 보면… 이게 바로 프로인가? 싶다. 잘하는 사람은 남이 보기에 쉬워 보인다더니.. 진짜구나 싶었다.
모차르트의 사냥은 오히려 사냥터로 발걸음을 옮기는 귀족과 자녀들의 천진한 행렬처럼 느껴졌다. 만약 사냥 장면으로 굳이 묘사해야 한다면, 귀여운 동물 인형을 향해 쏘는 큐피드의 장난감 화살로 하는 사냥일 것이다. 생명체가 아닌 것을 대상으로 표- 하고 귀엽게 쏘는 정도. 그러다 3악장에서 이상하게 아련한 기운이 몰려온다. 왜지? 사냥을 유흥으로 즐기러 왔지만, 진짜 사냥 장면을 목격하니 살짝 미안해하는 중세 귀부인이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이중적인 면모가 떠오른다. “우리… 이래도 되나?” 하는 귀부인들의 속삭임들. 수근수근- 너무 잔인한 거 아니냐면서. 사냥복을 입기 직전의 멈칫 거림이다. 그러면서 안 입는 건 절대 아니고..
도륙의 현과 짓이겨지는 선율 ― 끝까지 음악이었다는 게 더 끔찍했다
Widmann: String Quartet No. 3, "Jagdquartett" ("Hunt Quartet")
이 곡은 정말 기가 막히게도 사전에 미리 못 듣고 갔다. (그게 신의 1000수였다) 내가 플레이리스트에 비드만을 넣으려다 베토벤 현악 사중주 곡을 잘못 넣은 덕분에(진짜 바보) 나 스스로에게 파격 of 파격적인 곡을 초연으로 선사했다. 공연 시작 전, 연주자들의 의자가 치워지고 보면대 위엔 악보 대신 태블릿이 올려졌다. 의자가 치워졌길래 뭐지? 하던 찰나 갑자기 4명의 연주자가 갑자기 허공에 활을 확확- 내리치면서 바람 소리를 내더니, "에잇!!!!!!!!" 하고 소리를 지른다. 본인 목소리로, 악기 아니라 (!!!!) 진짜 깜짝 놀랐다. 박은중 바이올리니스트랑 박성현 첼리스트의 목소리는 어찌나 크고 짱짱하던지 진짜 기절할 뻔했다. (;;;;) 그러다 갑자기 신나게 달려가기 시작한다. 진짜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4명의 사냥꾼이 말 위에 몸을 얹었다. 소리가 기우뚱거리는 부분은 말발굽 같기도 했고, 기세 좋게 달려가다가 에잇! 헤이! 하며 채찍을 휘두르며 소리를 지른다. 그 다음의 소리 모양은 어땠는가? 표적을 마주한 사냥꾼의 형상이다. 눈이 뒤집혔다. 무자비하고 잔혹하게 쫓아간다. 거기서부터 기분이 서서히 나빠지기 시작한다. 작곡가를 향해서 가던 소리가 표적 자체로 타깃이 변경된 것이다. 분명 처음엔 사냥꾼의 시점이었지만, 소리 묘사가 점점 어느새 도망가는 쪽, ‘사냥당하는 동물’의 시점으로 넘어갔다. 그 공간에서 표적 동물에 감정이입한 자는 누구인가? 바로 '관중'이다. 말에 올라탄 인간은 여전히 승부욕에 오른 채 달리고 있다. 그 4쌍의 눈 안에 담겨 버린 동물은 죽음의 문턱이 달겨드는게 느껴진다. 멈추면 안 된다. 정지하는 순간 끝이다. 공포감에 근육이 굳어가나 절대 멈추지 않으려하지만.. 붙잡힐 수밖에 없는 결말이다. 결국 예상된 장면이 드러난다.
심장과 다리에 활과 칼날이 박힌다. 살가죽을 벗기고 토막 내기 시작하는 인간들이다. 어느 시점에는 바이올린을 수직으로 내려 들어 위에서 아래로 현을 마구 긁어낸다. 지독한 인간들. 그렇게까지 다 먹어야겠는가?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생각난다. 토악질이 날만큼 매섭게 생살을 찢고 근육섬유로 파고들어 가는 칼날이다. 짜증 난다 진짜. (연주가분들이 신명 나고 생동감 있고 색다른 연주 방법에 웃으면서 연주를 하셔서 더 가중된 것 같다) 얼추 정리가 됐는지 요리도 한다. 얼마나 신났는지 난리가 났다. 대략 후반부에서는 거의 흑백요리사다. 튀기고 볶고 데치고... 귀신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찢긴 동물이 내는 소리다. 자신의 육신이 요리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는 비명이다. 서서히 짙어지는 복수심이지만 이미 이승에 없으니 내보일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으니 빗살만 계속해서 내려친다. 그러다가 첼리스트가 다시 한번 비명을 지르는데.. 그게 아마 최후의 목소리인 것 같다.
사람이 떠나고 동물의 사체가 널브러진 자리 위엔 잿더미의 장작들만이 남은 불씨로 타닥인다. 아주 불쾌하고 정확한 불협화음에 기분이 최소 10배는 더 나빠진다. (비드만 뭐 하는 사람이세요?) 이런 장면들이 싫어서 내가 진격의 거인도 못 봤는데.. 클래식 공연장에서 정통으로 마주해 버렸다. 바이올린은 이제는 끼긱- 낡은 문의 소리까지 낸다. 저 멀리 다른 일행이 또 다른 타깃의 심장을 노리는 소리도 들린다. 무한 굴레로 반복되는 비명 소리로.. 이 곡이 끝이 난다. (아; 밤에 듣지 마세요) 확실히 알았다. 아까 그 따듯한 소리들, 다 작곡가가 시킨 거고 일부러 절제감 있게 조절한 거였다. 모범생 연주가들이 정직하게 잔인한 화면을 정석적으로 그려내니까 더 잔혹한 것 같다. (무서운 사람들..)
비플랫으로 다시 돌아간 온기 ― 착한 사람들이 화내면 제일 무섭다
Brahms: String Quartet No. 3 in B-flat major, Op. 67
원래 비드만의 곡이 시작되기 전에 인터미션이었는데, 연주가들이 왜 휴식시간을 비드만 곡이 끝난 이후로 조정한 것인지 이제는 이해된다. 비드만 다음에 바로 브람스로 갔으면, 나는 그들은 완전한 이중인격자 혹은 사이코패스로 바라봤을지도 모르겠다. (호호호) 그렇게 마음이나 정신이 정돈된 15분 후, 다시 하이든과 모차르트를 연주하던 그들로 돌아왔다. 이상하게 웃기면서도 무서웠다. 인스타그램에서 인터뷰하던 모습은 소극적이었는데, 무대 위에서는 그렇게까지 확실하다니.. 역시 프로는 무섭다. 그날의 브람스는 역시나 평화로웠다. 하지만 1악장은 미묘하게 킹 받았다. 안 좋았다는 뜻이 아니다. 직전의 충격 직후라, 이 신명 나고 고급스러운 브람스의 ‘쪼’가 너무 능청스러웠던 거다. “얘들아~ 아까는 놀랐지? 다 픽션이야~” 하는 느낌. 에필로그로 아까의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 주는 것 같다. 움츠러든 어깨를 펴고, 의자에 머리를 기대며 비플랫의 선율을 들었다. 다시 말랑해진 귀와 어깨다.
어느 악장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아마 3악장인 것 같다) 크라이슬러의 ‘시실리엔느와 리고동’과 브람스 협주곡 3악장이 섞인 듯한 부분이 있었다. 선율은 크라이슬러의 흐름, 리듬감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의 리드미컬한 3악장이 절묘하게 믹스매치된 기분이랄까. 진중하지만 정리된 느낌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브람스-브람스- 하는 걸까. 놀라고 헝클어졌던 마음을 비플랫으로 정리하며 이 곡의 끝을 함께했다.
해가 뜨면 끝났다는 뜻이 된다 ― 앙코르는 앙코르 같지 않았다
오늘의 앙코르는 하이든 현악 4중주 내림나장조 ‘일출’의 3악장. 사냥 다 하고 해 떴나? 농담이다. 하지만, 딱 그런 느낌이었다. 앙코르이었지만 앙코르 같지 않은 일출이었다. 왠지 다음 악장도 이어서 연주해 줄 것 같은 농도의 몰입감이 있었다.
끝으로
오늘 공연은 전체적으로 프로그램의 일관성도 좋았고, 반전도 있었고 (;;;) 전반적인 구성도 탄탄했다. 비플랫이 자칫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박상현 첼리스트의 시작 멘트가 떠오른다.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평화와 다양성을 시대의 흐름 안에서 가볍지 않게 선보였다. 작곡가에게 충실히 공명한 그들은 자신들의 기량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이든, 모차르트, 비드만, 브람스의 작품을 정확히 전달하는 데 집중했다. 그게 그들의 목표였다면, 이 공연은 100% 성공이다.
갑자기 문득 든 생각인데, 아레테콰르텟으로 해리포터 기숙사를 배정해 보자면 후플푸프다. 그 기숙사에 배정된 아이들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느냐? 상냥하며 온화하고, 근면적이며 헌신과 협동 그리고 페어플레이 정신을 가지고 있다. 어떤 소리를 내는 연주가들인지 알겠는가? 소리도 온화하지만, 작곡가의 의도에 따라 '괴성'도 지를 줄 아는 플레이어들이다. 좋은 공연이었다. 원래 나는 클래식을 들으며(슬리데린 같은 현대음악 위주로) 집에 가는데, 그날은 다른 장르의 음악을 들었다. 29일의 공연으로 이미 충분했다. 그만하면 됐다. 날씨도 좋았고, 사방이 청춘이었고(대학 축제하더라고요) 오랜만에 일전에 자주 들었던 ‘선재 업고 튀어’ OST를 들으며 돌아갔다. 정말, 감각적인 목요일이었다. 그런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