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 제7갤러리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어린아이가 툭툭 그려낸 것처럼 보이는 선들이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익살맞은 캐릭터와 유쾌한 표정들. 얼핏 보기엔 장난 같고 서툴러 보이지만, 오래 들여다볼수록 그 안에 깃든 정교한 관찰력과 단순함의 미학이 느껴졌다. 선 하나로 표정과 감정, 움직임과 상황까지 담아내는 방식은 처음엔 그저 흥미로웠지만, 곧 단순함 속에 숨겨진 창의성과 철학이 느껴지며 오래도록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인 프랑스 출신 일러스트레이터 세르주 블로크는 2023년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을 찾았다. 회화, 출판, 광고를 넘나들며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그의 작업은 그 자체로 ‘자유’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그 자유로운 선들 사이사이엔 유머가 녹아 있었고, 그림을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따스함이 숨어 있었다.
전시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블로크가 세계 각국의 브랜드와 협업한 작업들을 만날 수 있다. 에르메스, 삼성전자, 코카콜라, 뉴욕 타임즈, 더 뉴요커, 르 몽드, 런던 지하철… 이름만 들어도 무게감 있는 이 브랜드들과 그저 몇 줄의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그런데 막상 그의 광고나 매거진 일러스트를 보면 금세 수긍하게 된다. 과하게 설명하지 않고,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을 정확하게 집어낸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에르메스와의 협업 작품들이었다.
사진 속 왼쪽 작품은 에르메스의 시계 광고로, 실제 시계를 중심으로 단 몇 줄의 선만으로 팔다리를 그려 넣어, 마치 시계가 두 발로 걷는 듯한 모습을 담아냈다. 이처럼 세르주 블로크는 사진에 선을 더해 상품에 생명력을 주고, 브랜드의 이미지에 생동감을 더한다.
오른쪽 작품에서는 에르메스를 상징하는 주황색 박스들이 정돈된 화면 위에 “le cadeau d'affaires(비즈니스 선물)”라는 문구가 쓰여 있고, 아래에는 실루엣처럼 등장한 그의 대표 캐릭터가 조용히 고개를 들어 상자를 바라보고 있다.
불필요한 요소 없이 간결한 선 하나로 고급스러움과 재치를 동시에 전하는 블로크 특유의 방식은, 에르메스라는 브랜드와 세련되게 어우러져 광고주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일러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의 후반부에서 만날 수 있었던 그림책 『어느날 길에서 작은 선을 주웠어요』는 블로크의 예술 세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업 중 하나다. 이 책은 한 아이가 길에서 작은 선 하나를 주우며 시작되는 이야기로, 그 선과 함께 다양한 모험을 겪는 과정을 담고 있다. 블로크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에게 꿈을 심어준 예술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 작품의 설명에 그는 “선은 저를 살게 했고, 모든 관점에서 스스로를 성장하게 했으며, 공유하고, 저 자신과 타인을 즐겁게 해줍니다.”라고 말했는데, 작가로서 자신이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선처럼, 이 책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용기를 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했다. 예술가를 꿈꾸는 또 다른 누군가는 이 그림을 보고 희망과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전시장 한편에서는 이 책의 이야기를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었는데, 블로크의 따뜻한 시선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져 인상 깊었다.
"선은 어디에나 있어. 길에서 우리를 안내하고, 구름 사이에서도 볼 수 있지. 내가 선에 대해 느끼는 이러한 감정들을 유머와 적절히 섞어 이 책에 녹여 냈어. 너무 심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인생은 그러기에는 너무 짧으니까"
세르주 블로크의 선은 단순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그 안에는 창의성과 통찰력, 그리고 사람을 향한 깊은 애정이 녹아 있었다. 가느다란 한 줄의 선이 이렇게 풍성한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고, 이토록 놀랍고 매력적일 수 있다는 것도 새로 알게 되었다.
전 연령층 모두 즐겁게 즐길 수 있는 이 전시는 8월 17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관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