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샤에게 찾아가거나 통화할 때마다 그는 항상 뭔가 만드느라 분주하다. 한겨울에 전화를 하면, 타샤는 "장난감 부엉이를 만드는 중이었어요. 이렇게 말해도 될는지 모르지만, 정말 신이 나요"라고 말한다. 그럼 바쁘지 않을 때 통화하자고 말하면, 타샤는 "말도 안되는 소리. 난 언제나 이런저런 걸 만드는걸요"라고 대답한다."] - p.9 [손으로 만드는 세상] 중
할머니 집의 뒤편에는 낡아빠진 지게가 한 구석에 버티고 서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그러니까 할머니가 할머니가 되기 전 마지막으로 사용됐을 것이 분명한 그 지게는 찬밥 신세여도 꿋꿋하게 집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타샤의 집>을 읽으면서 이상하게 그 지게가 떠올랐다. 한때 뒷산에서 나온 땔감 따위를 부지런히 날라 내 가족이 따뜻한 하루를 보내게 해주었을, 그러나 이젠 잊혀 병풍이 된 그것.
타샤의 코기 코티지에선 이젠 잊힌 옛 시절 물건들이 그녀와 함께 생생하게 살았다. 찬밥 신세였던 역사가 없다는 듯, 그들은 각기 한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돕고 제공했고 타샤 역시 부지런하고 열성적인 삶으로 그들의 쓸모를 증명했다. 나무로 꼰 바구니, 물레와 베틀, 땔감으로 돌아가는 스토브... 지금 젊은이들은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를 것들이지만, 그것들은 아직도 혹은 언제나 유효하다.
1800년대의 삶을 사랑한 여인, 타샤의 삶을 기록해 둔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그녀의 대쪽 같은 빈티지 취향, 아니 대쪽 같은 빈티지 아날로그적 삶에 감탄하게 된다. 살지 않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애정을 수집과 보관으로 나타낸다면, 그녀는 몸소 그 삶을 살았다. 가축을 키우고, 실을 꼬아 염색해 옷을 만들고, 직접 양초와 화장품을 만들었으며, 취미로 틈틈이 다양한 인형을 만들었다. 24시간이 부족할 만큼 성실하게 일하는 것이 그녀의 적성에 맞아서겠지만, 한편으론 18세기 사람도 이렇게까지 바삐 살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18세기의 사람보다 타샤가 더 18세기 사람 같아 보이리라.
그녀의 수공예적 삶의 방식에 집중한 책은 독자에게 힐링의 시간을 제공한다.
노동이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 속 '효율성'이라는 가치 아래, 현대인은 번잡한 일을 모두 돈과 산업에 맡겼다. 비효율을 실패와 연결 짓게 되는 세상사의 변화에 따라, 복잡함의 미학을 실천하는 사람은 목적을 가진 예술가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오랜 시간이 필요한,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노력이 필요한 일을 해냈을 때의 성취감이 무엇보다도 크다는 것을.
타샤는 옷을 만들기 위해 아마를 키우는 것부터 시작한다. 혹은 키우던 양의 털을 봄에 밀고 그것에서부터 실을 짜낸다. 그녀의 삶은 비효율의 극치지만, 단순하고 성실한 신체노동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는 현실에 지친 우리에게 직간접적으로 필요한 경험이다. 내가 정한 행위를 하고, 내가 목표한 결과물을 만들고, 모든 과정을 내가 판단하고, 나의 뜻대로 수정하고. 보석 십자수를 완성해서, 혹은 사내 프로젝트를 끝내서 뿌듯해하는 것과는 다른 효능감일 것이다. 당장 내 눈앞에 놓인 '삶'의 과제를 차근차근 수행함으로써 얻는 물리적 결과물의 심리적 만족감은 인간의 원초적 생존 욕구까지 충족시킬 수 있다.
뿐인가, 타샤의 삶의 방식은 <동물의 숲> 시리즈 같은 평화로움이 가득하다. 그녀의 직업적 성공, 그리고 20, 21세기의 안정이 더해진 아날로그적 삶은 모든 노동을 '즐길 수 있는' 행위로 바꿔놓았다. 쓸만한 물푸레나무가 없다고, 닭이 알을 낳지 않는다고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의 집에는 색색의 꽃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고, 강아지와 고양이가 뛰어놀며, 수많은 친구와 훌륭한 자식들이 늘 그녀를 찾아온다. 타샤 튜더의 집에는 자발적인, 즐겁고 성실한 노동만이 이루어질 뿐이다. -가끔 물건이 말썽이어서 짜증을 낼 순 있겠지만!-
타샤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힐링은 계절감이다. 출퇴근과 등하교에 치여 계절의 변화를 뒤늦게 깨닫고, 축제 한두 번 가는 것으로 계절을 느끼는 현대의 도시인들과는 다르게 그녀는 한 계절에만 할 수 있는 일들을 분명히 알았다. 부활절을 맞이해 달걀을 교회보다 더욱 화려하게 꾸미고, 만개한 꽃으로 집 안팎을 장식하고, 선선한 날에 양초를 만들거나 크리스마스트리를 위해 맛도 모양도 끝내주는 디저트를 굽느라 바빴던 그녀는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맞이했다. 내가 본 것은 고작 책 속 글자와 사진 몇 장뿐인데도, 타샤가 자연 속의 삶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을지를 알 수 있었다.
조금은 지루하지 않을까 싶었던 책은 단숨에 읽어버릴 정도로 몰입감이 좋았다. 동화 작가였던 그녀는 삶마저 동화 같다. 내내 느껴지던 인간적 따스함과 검소함은 잊고 있던 옛 가치들을 돌아보게 했다. 그러니까 지게를 짊어지고 마을과 산을 오가던 그런 시절의 가치 말이다. 그것들은 오랫동안 방치되었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저 자리에 묵묵히 있다가, 어느 날 사람들의 눈에 띄어 뭉클함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 뭉클함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잊고 살았던 무언가를 떠올리고 지금을 다짐하게 만드는 작은 떠밂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