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 제7갤러리와 1101라운지에 열린 프랑스 대표 일러스트레이터 세르주 블로크의 개인전을 관람했다.
세르주 블로크는 이번 전시에서 ‘선’을 통해 유머, 동심, 사랑, 인생을 그려내는 그만의 독특한 예술을 한국 관람객들에게 선보였다.
그는 지문과도 같은 특유의 그림체를 이용해 다양한 장르와 형식을 넘나들고 있다. 그림책과 잡지, 신문, 잡지, 애니메이션, 회화, 조형물, 설치작품, 도자기 등의 예술에서 그가 불어넣은 ‘선’을 볼 수 있다.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그의 작품들은 유연한 재치와 상상력으로 보는 이들로 하여금 미소를 자아낸다.
전시 제목 ‘작은 선의 위대한 여행’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별거 아닌 작은 선들이 휘어지고 끊어지고 또 모이면서 소박한 동시에 위대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확인시키고 있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담을 수 있을까? 아마도 모든 예술가가 작업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릴 커다란 질문일 것이다.
세르주 블로크가 그의 이야기를 하는 방식은, 적어도 나에게는, ‘선(線)’을 관객에게 명확히 드러낸 후 세상의 ‘선(善)’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세간의 호평을 받은 2007년 작 ‘L’ennemi(적)‘이라는 그림책은, 이러한 그의 소통법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전쟁 중 참호 속 홀로 남은 병사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참여한 세르주 블로크는 ’전쟁‘이라는 주제를 아주 가벼우면서도 결코 피상적이지 않게 풀어낸다.
스치듯 보면 귀여운 어린이 동화책 같지만, 전체 서사를 보면 전쟁에서 벌어지는 의미 없는 희생과 목적 없는 싸움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국가 간 긴장감이 치솟고 있는 오늘날에도, 이 작품은 전쟁의 불필요성에 대해 재고하는 평화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2005년 출판된 ’Moi j’attends(나는 기다립니다)‘는 또 다른 그의 수작이다. 빨간 ‘실’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매우 단순한 드로잉을 놀라울 정도로 매끄럽게 연결하여 한 인간의 생애를 표현했다.
이탈리아 작가 다비드 칼리가 집필한 글을 토대로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인데, 과연 사람이 태어나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기다리는 순간들을 표현하기에 탁월하다고 느꼈다. 기다림은 연속이기 때문이다. 어떤 기다림이 끝나면 새로운 기다림이 있다. 그 기다림은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하면서, 이어지는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훈훈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데, 우리도 그렇게 이어놓은 실 중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삶은 참 잔혹하고 고되지만, 기다리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기쁨뿐이다. 그 기다림이 예상했든 하지 못했든 어떤 끝에 닿았기에 지금 되돌아볼 수 있는 걸 테니 말이다.
세르주 블로크는 인간의 삶을 단순하게 표현한다. 그 단순함 속의 복잡함을 매일 살아내는 우리들은 그의 작품에 위로받고 치유받는다.
선으로 남은 우리들은 사랑할 줄 알고 화해할 줄 안다.
그에게서 보이는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이 있다면 바로 ‘유머’이다. 전시장 벽면에 유머에 대한 그의 신념이 이렇게 적혀있었다. ‘왜 유머인가? - 유머는 존엄의 선언이며 인간이 자신에게 닥친 일을 초월한다는 증거다.’
아무리 화가 나도, 슬퍼도, 힘들어도, 이내 또 피식 웃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끔 마법 같다. 슬픔이나 고난을 이겨내려고 억지로 그러는 게 아니라, 꼭 인간은 웃을 수밖에 없는 듯한 불가항력을 느낀다.
유머라는 게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아도, 그의 발랄한 작품들을 구경하다 보면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어린아이가 그린 듯 원초적이면서도 그림의 대상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는 그림들 덕에, 나도 함께 간 친구도 ‘이것 좀 봐’하면서 웃음을 짓게 되었었다.
전시장 안에는 편안한 빈백에 앉아 작은 선의 여행을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작은 선을 발견한 소년은 이차원의 세계에서 마음껏 생을 헤쳐나갔다.
선을 이용해 세상에 발 딛고, 또 선이 자신을 이끌어가는 상생의 관계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이는 작가 본인의 자전적인 이야기이면서도, 동심이 가득한 시절의 애착관계가 삶의 끝까지 어떻게 함께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역동적으로 형태를 바꾸며 이어지는 선의 무대는 인간의 작은 용기가 자라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작은 선이 어떻게 팽창하는지, 작은 용기가 어떻게 세상을 껴안는지, 작은 웃음이 어떻게 삶을 극복하는지. 작은 것들의 위대함을 가뿐하게, 그리고 유연하게 표현하는 세르주 블로크의 예술이 궁금하다면 8월 17일까지 예술의전당을 방문해 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