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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불멸의 화가 반 고흐’ 전시회를 보고 왔다. 사람이 붐빌 것을 예상하여 수요일 낮에 갔지만, 그의 인기를 과소평가했다. 족히 30분가량은 기다려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고흐는 고흐였다. 미술작품에 대한 어떠한 감식안도 없는 나와 달리, 동행했던 지인은 작품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감상했다. 그와 감상 속도를 맞추기 위해서는 작품 자체로는 모자라, 끝자락에 자그맣게 명시된 작품명이나 사용된 도구 등을 심드렁히 봐야 했다. 그렇게 원어와 그것을 번역한 한국어를 왔다갔다 보던 중, 한 단어에 자꾸만 시선을 빼앗겼다. 양자 간 괴리가 거슬렸다. 바로 ‘still life’이다.

 

초상화는 ‘portrait’, 인물화는 ‘figure painting’ 정도로 번역된다. 수채화는 ‘watercolor’이고, 풍경화는 ‘landscape’이다. 어느 정도 낯익거나 뜻이 직관적으로 연상되는 단어들이다. 하지만 정물화는 달랐다. ‘still life’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가만히 있는’의 뜻을 가진 형용사 ‘still’이 ‘생물(체)’을 뜻하는 명사 ‘life’를 수식한다. 그렇게 ‘정지한 생물(체)’, 즉, ‘정물’의 의미에 근접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still’은 형용사보다는 부사인 ‘아직도 (계속해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같은 의미로 익숙할뿐더러, ‘life’ 역시 ‘삶’ 내지는 ‘생명’과 같은 명사로 읽혔다. 그렇기에 ‘still life’를 처음 대면하였을 때는, ‘그럼에도 계속되는 인생’ 정도의 거창한 번역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단어의 다의적인 성격을 고려하지 못하였다기보다는, ‘정물화’에서 느껴지는 딱딱함과 ‘still life’가 가진 유연함을 동일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아닌 것이 되는 것


 

전시회장을 나간 이후에도 갈등은 지속되었다. 그림의 호오를 정리하는 지인의 말은 한 귀로 흘렸다. 그림은 모두 정지했으니까 다 정물이 아닌가 하는 일자무식한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물론 아니다. 사전에서 정물화는 ‘과일, 꽃, 화병 따위의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물체들을 놓고 그린 그림’ 정도로 정의된다. 즉, ‘정물화(畫/picture)’는 정물을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 ‘still life’는 ‘정물화(化/be)’로 다가온다. 초점은 ‘화’에 있다.

 

‘화(化)’는 ‘되다’의 뜻을 가진 한자이다. 그 기능은 객관화(客觀化), 극대화(極大化), 악화(惡化)처럼 그렇지 않았던 것이 그렇게 된다는 의미를 만든다. 따라서 ‘정물화(靜物化)’라 함은 정물이 아닌 것이 정물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정물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 우리 인간이 대표적이지 않을까. 인간은 겉으론 움직이고, 속으로 사고한다. 살아있는 한, 인간은 정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를 손쉽게 정지시키는 장치가 있다. 바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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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사진의 대중화’를 논하자면, 1차는 카메라의 확산일 것이고, 2차는 스마트폰의 확산일 것이다. 이후 아주 작은 챕터로 ‘셀프 사진관’을 언급하고 싶다. 현재 사방 곳곳에서 ‘셀프 사진관’을 만나볼 수 있다. 이전에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2017년 ‘인생네컷’을 기점으로 우후죽순 생겨났다. 처음 생겼을 당시에 한 친구는, ‘어떻게 인생을 네 컷으로 나눌 수 있냐’고 비아냥거리곤 했다. 얼핏 일리 있어 보이는 말인데, 나는 과장을 좀 더 보태 그 브랜드가 모델링보다 네이밍으로 성공했다는 입장이다. 친구의 말마따나 인생이 네 컷으로 나누면, 주제가 너무 심오해진다. 다만 그 당시의 인생을 네 컷으로 남긴다는 것은,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다.

   

 

 

이야기를 아는 것


 

우리가 사진을 찍는 이유는 단순히 그 순간을 기억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다르게 보면 행복한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서이다. 사진을 찍으면서 우리는 평소 얼굴을 맞댈 일 없던 친구들과 작은 틈바구니에 모이게 만들고, 말로만 하기엔 부족한 사랑의 표현을 연인과 증거로 남긴다. 또 한 사람의 성장을 꾸준히 포착하고, 한 순간을 영원히 박제한다.

 

이번 전시명은 ‘불멸의 화가 반 고흐’이다. 홍보 포스터에는 그의 대표작인 ‘자화상’ 중 하나를 내세운다. 이번 전시회에서 연계한 작품 중 가장 유명해서일 테지만, ‘불멸’과 ‘자화상’이 동반한 것은 꼭 우연만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정지된 것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알기 때문이다. 정물로서 멈춰있는 그 사진에서 우리는, 여전히 계속 되는 우리네 인생을 엿보기에 충분하다. 이는 죽어서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고흐를 영원히 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still life’는 '그럼에도 계속되는 인생' 내지는 ‘여전히 계속되는 삶’으로 읽어도 아무런 손색이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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