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화가를 돌아다닐 때 하는 취미 활동 중 하나는 근처에 있는 향수 브랜드들을 확인하고 평소 궁금해 하던 향수를 시향해 보는 것이다. 간혹 취향에 맞아 떨어지는 향을 맡을 때면 눈은 저절로 감기고 똑바로 서 있던 몸에 힘이 풀린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강렬한 만족감과 고양감이 일상의 긴장을 날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부단히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게 해 준다. 뜻밖의 호사. 얼마 전 서울미술관과 알럭스가 공동 주최한 <아트 오브 럭셔리> 전시에서 알게 된 럭셔리의 의미 중 하나다. 아끼는 향수를 뿌릴 때면 잠시 작은 호사를 누리게 되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좋은 향을 맡을 때면 말 그대로 ‘뜻밖의’ 호사를 누리는 것만 같다.
동시에 여러 전시를 선보이는 서울미술관은 전시 별 입장권이 아닌 서울미술관 통합입장권을 판매한다. 따라서 관람객은 서울미술관 소장품전인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와 <아트 오브 럭셔리> 전, 석파정, 별관에서 진행 중인 개인 사진전 <사란란>을 모두 감상할 수 있다. 서울미술관이 석파정 서울미술관으로 불리는 만큼 석파정 관람에 대한 기대도 컸기에 내 발걸음은 먼저 석파정으로 향했다. 실제 관람 시간도 석파정이 미술관 내 다른 전시들에 비해 한 시간 일찍 제한되므로 전시와 석파정을 모두 관람하고 싶은 분이라면 이를 알고 가시면 좋을 듯하다.
본관 4층 계단을 오르면 흥선대원군의 별서가 있는 외부와 바로 연결된다. 별서의 규모는 세월이 지나며 축소되었지만 별서가 자리잡은 공간 자체의 고급스러움은 여전히 유효했다. 내놓고 화려하지 않아도 당시 아무나 가질 수 없었을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안락하지만 별서를 둘러싼 자연의 기운이 오밀조밀하지는 않았고 공간이 시원하니 호방한 듯하다가도 비밀스러웠기 때문이다. 다양한 느낌이 동시에 공존하지만 그것이 혼란스럽지 않게 공간에 모두 품어지고, 또 발해지는 느낌. 이런 곳이 풍수지리적으로 상급지인가 하는 생각을 하던 중 산림의 향이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숨을 들이 쉴 때마다 나무와 풀 향기를 만끽했다. 높은 산을 타지 않고도 서울 한복판에서 삼림욕을 하는 듯하니 내게는 이것이 그날 하루 중 가장 호사스러운 한때였다.
다시 미술관으로 내려가 서울미술관 소장품전 <나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를 즐겁게 관람했다. 그날의 방문 목적인 <아트 오브 럭셔리> 전 전시장이 미술관 구조 상 소장품전을 보아야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감상하게 된 것인데 이 전시에서 마음에 와닿는 작품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전시명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이 소장품전은 화가들이 쓴 편지를 작품과 함께 보여준다. 한국미술사의 거장들과 그들의 유명한 작품들을 경직되지 않고 보다 포근한 심리 상태로 보게 만들어주는 전시였다.
이제 <아트 오브 럭셔리> 전 감상기를 본격적으로 다룰 시간이다. <아트 오브 럭셔리> 전에도 향이 공간 일부를 차지한다. 이 전시를 공동 주최한 알럭스는 럭셔리 뷰티 상품들을 큐레이션하고 하루만에 배송하는 서비스로, 알럭스에서 취급하는 럭셔리 브랜드의 향수를 전시 공간 내부에 배치한 것이다. 향수 브랜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바뀌는데 내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시슬리의 시그니처 향수가 있었다. 향수가 만들어진 배경, 향수병 디자인에 담긴 예술성 등이 같이 홍보되고 있었다.
알럭스는 럭셔리의 다면적인 의미를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이 전시를 열었고 전시는 Material Luxury, Spiritual Luxury, 그리고 Timeless Luxury로 섹션이 구분되었다. 개인적으로 각 섹션을 열고 규정하는 벽면 해설 디자인에서 패션 잡지 글의 디자인이 연상되었다.
‘럭셔리는 풍요를 뜻하는 라틴어 럭셔스(Luxus)에서 파생되어 17세기 이후 사치를 의미하였다. 오늘날 럭셔리는 호화로운 사치품이자 뜻밖의 호사를 말하며, 명품과 동의어로 여겨진다. 나아가 화려한 외면의 물질성과 더불어 시간이나 경험과 같은 희소성을 지닌 가치까지 그 영역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본 전시는 동서양의 다양한 시대정신을 반영한 예술품을 통해 가변하는 의미를 지닌 럭셔리 고유의 미학을 살펴보고자 한다.’
Material Luxury에서는 LOVE라는 단어를 입체 조각으로 만든 로버트 인디애나의 작품, 쿠사마 야요이의 <펌킨>, 살바도르 달리가 당대 셀러브리티의 입술 모양에 착안해 만든 소파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확립한 스타일이 강한 물성을 입고 제작된 예술 작품은 이미 하나의 명품이 되었다.
Spiritual Luxury는 사실상 두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앞선 섹션에서 예술작품이 곧 그 자체로 럭셔리가 된, 되고 있는 미술계의 현황을 강렬하게 보여준다면 두 번째 섹션부터는 ‘보이지 않는 가치들이 럭셔리로 인식되는 현상’을 살펴본다. 이 섹션부터 한국 유명 작가의 작품들, 특히 명상과 내면 수련의 성격이 강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이렇게 전시는 럭셔리의 정신적 측면, 한국예술계의 럭셔리로 대상이 전환된다. 박서보, 김환기, 이우환, 곽인식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한 데 모아 감상하고 있자니 평면, 반복, 변주, 서예, 먹, 수양 등의 단어가 연상되었다. 번잡하고 바쁜 삶에서 명상을 하고 그 가치를 누리는 일은 균형잡힌 삶을 사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러나 현실은 퇴근 후 집을 치우는 일에 쓰일 결정력과 체력마저 고갈된 현대인의 모습이다. 묵상이 삶의 풍요로 분류되는 일은 당연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서글프다. 너도 나도 자신을 돌아볼 시간 없이 바쁘게 살고 있다는 뜻 같아 그렇다.
이후 Spiritual Luxury 섹션은 조선 백자인 달항 아리를 모티프로 한 회화, 입체 작품들과 현대의 도예 장인들이 만든 오늘날의 달항아리와 팔각호 백자로 구성된다. 럭셔리의 정신적 여유와 만족감, 충만함 외에도 럭셔리의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 측면을 크게 뒷받침하는 것은 바로 인류가 일구어 온 문화적 유산 자체이다. 당장 어느 명품 브랜드를 보더라도 자기 브랜드의 유서 깊은 역사, 숙련된 장인의 손길을 강조하지 않는가. 젊고 현대적인 감각의 하이엔드 브랜드라 하더라도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특정 문화의 헤리티지를 적재적소에 활용한다. 오랜 시간 속에서도 잊혀지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노력 속에 보존되었으며 시간이 갈수록 더욱 귀하게 대접 받은 것들은 존재감 자체에 가치를 부여 받는다. 이 전시에서는 한국 작가들의 묵상적인 작품을 통해 럭셔리의 정신성을 보여주고, 나아가 한국의 달항아리를 통해 럭셔리에 심미적 권위와 풍부한 의미를 불어넣는 헤리티지를 설명한다.
큰 크기로 만들어지는 달항아리는 위와 아래를 따로 만들어 결합하는 형태의 도자기이기 때문에 정형화된 구의 형태가 아니라 다소 이지러진 형태를 취한다. 그리고 그 이지러짐에서 달항아리 특유의 오묘한 매력이 나온다. 달항아리처럼 둥글지만 자세히 보면 각이 져 있는 팔각호는 항아리의 두께가 균일하지 않으면 굽는 과정에서 터질 수 있어 고도의 기술을 요구한다. 익히 안다고 생각한 것은 백자와 달항아리의 표면적인 이미지였지 이런 특징들은 잘 모르거나 잊은 채였다는 것이 혼자서 다소 민망하다면 민망했다. 익숙하다 여긴 유산 또한 자세히 알 기회와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마지막 섹션인 Timeless Luxury에서는 헤리티지, 유산, 유물 그 자체인 조선 달항아리 한 점으로 전시의 방점을 찍는다.
다수의 유명 작가의 작품들을 한 전시장에서 모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는 전시였다. 무엇보다 럭셔리의 의미에 명품, 사치품 외에도 ‘뜻밖의 호사’가 있음을 알게 된 점이 이 전시의 큰 수확이었다. 예상치 못한 데서 좋아하는 것, 아름다운 것, 심신이 기분 좋게 이완되는 것 등 크고 작은 호사를 모아 인생을 보다 풍요롭게 즐기고 그 감각을 간직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