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대통령 선거 사전 투표가 하루 남았다.
불법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이 파면되고 치러지는 조기 대선. 지난 12월부터 친구들을 따라 탄핵 촉구 집회에도 몇 번 참여하고, 대학에서도 여러 정치적 사건과 사회 문제에 관해 공부하고 글을 쓰기는 했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정치를 잘 모른다.
당장 눈앞에 닥친 일신상의 문제에 전전긍긍하는 사람이며, 골치 아픈 정치와 사회 문제에서는 손쉽게 시선을 돌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마음 한켠에 늘 부끄러움을 안고 살고 있다.
그러던 중 아트인사이트를 통해 5.18 민주화운동을 주제로 만든 연극 <짬뽕>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해 광주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전두환 이후 44년 만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여전히 계엄을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는 지금, 이 연극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극을 통해 스스로에게 5.18이라는 화두를 던져야 할 것 같았다.
<짬뽕>은 5.18 민주화운동을 소시민의 시선으로 그린 블랙코미디 작품이다.
극은 1980년 광주의 한 중국집 ‘춘래원’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중국집 주인 ‘신작로’는 여동생 ‘신지나’와 배달부 ‘백만식’과 함께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열심히 일해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표다. 다방 레지로 일하는 애인 ‘오미란’과 결혼하고, 지나의 학비를 대주고, 만식에게 양복 하나를 사주기 위해.
5월 17일 밤에도 작로의 성화를 이기지 못한 만식은 배달을 나간다. 그런데 배달 도중, 배고픈 군인들이 국가의 명령을 들먹이며 만식의 철가방을 빼앗으려 든다. 만식은 총까지 겨누는 군인들과 실랑이를 벌이다 철가방으로 머리를 때리고 도망간다.
뉴스에서는 간첩으로 의심되는 폭도들이 군인들을 철가방으로 공격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만식은 억울한 마음에 사실을 밝히러 가려고 하지만 작로가 뜯어말린다. 불안에 빠진 작로는 간첩으로 오해 받아 고문을 받고 만식이 구타 당해 죽는 악몽을 꾼다. 다행히 꿈일 뿐이었지만, 이후 작로는 미란이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분노한 만식은 싸우러 나가고, 만식을 걱정한 지나도 곧장 쫓아간다. 어떻게든 사태에 휘말리지 않으려던 작로 또한 그들의 뒤를 따라나서지만, 결국 만식과 지나는 사망하고 오직 작로만이 살아남아 그들을 그리워한다.
연극을 보면서 가장 크게 동요했던 장면은, 군인과 경찰이 윽박지르거나 고문하는 대목이었다.
국가를 등에 업고 기세등등하게 시민을 찍어 누르고, 말도 안되는 논리와 함께 총구를 앞세워 위협하는 장면. 벌건 눈으로 무고한 시민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군인 연기를 보는데 아득해졌다. 단지 극을 위해 과장된 묘사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12월, 국회 앞에 모인 시민들 덕분에 비상계엄이 빠르게 해제된 후, 계엄이 자신과 무관한 것마냥 구는 사람들이 있었다. 종북 반국가 세력이 아니라면, 빨갱이가 아니라면 관계 없다고.
그러나 <짬뽕>이 보여주듯이, 1980년 비상계엄 당시 5.18 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은 정치나 시위와도 무관한 소시민들이었다. 당시 수학여행에서 돌아와 서점을 가던 14세 아이, 밖에서 뛰어놀다가 집으로 돌아가던 11세 아이, 남편을 기다리던 25세 여성이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렇게 계엄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짓밟았다.
12.3 비상계엄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이제 막 통과한 우리에게 5.18 민주화운동은 반드시 다시금 기억해야 하는 역사다.
특히 투사가 아닌 우리 대다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관점으로 당시를 돌아보는 연극 <짬뽕>은, 그 기억을 상기시키는 데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