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을 보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작품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상태로 공연장에 들어가는 거다.
간단하게는 제목의 의미와 줄거리,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부터 깊게는 작품의 해석과 창작진(연출, 감독, 배우)의 필모그래피, 원작이나 기존 공연과의 차이점 등을 사전에 살펴보고 가는 거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 경우 현장에서 작품을 더 다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이 들인 노력과 관심의 크기만큼 공연을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커져 작품을 재밌게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이미 스포일러를 당한 영화를 보듯 뻔하게 예측되는 다음 장면에 흥미가 덜 생길 수 있고 이미 본 공연처럼 지루해질 수도 있다.
게다가 전문가나 블로그의 깊이있는 해석으로 인해 나만의 새로운 해석으로 작품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이 경우 작품의 이해를 돕고 흥미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로만 정보의 균형을 미묘하게 잘 맞춰야 한다.
반면 두 번째 방법은 아무런 배경 정보 없이 공연장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제목과 포스터, 공연이 진행되는 일자와 시간만을 머릿속에 넣고 현장에 도착해 눈 앞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에 몸을 맡기는 거다.
그럼 예측하지 못한 서사와 대사들이 관객의 몸을 파고들며 새롭고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것을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작품에 따라서는 그 난해함으로 인해 오히려 집중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고 배경을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사소하고 중요한 요소들을 놓쳐버릴 위험도 존재한다.
이번 공연 '헤다 가블러'에서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연극 '헤다 가블러'는 5월 8일부터 오는 6월 1일까지 서울 중구에 위치한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다. '근대 연극의 아버지' 헨리크 입센이 1890년 발표한 희곡 헤다 가블레르의 현대적인 해석으로 지난 2012년 초연돼 전회차 전석 매진을 기록했던 연극이 13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한국형 헤다로 평단과 관객들의 찬사를 받으며 제5회 대한민국연극대상 여자 연기상 및 제49회 동아연극상 여자 연기상을 받은 이 작품은 개막 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헤다 역은 이혜영 배우가 맡았고 연출은 박정희 연출이 맡았다.
어느덧 공연 시간이 다가오고 어두워진 극장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탕- 하고 총성이 울린다. 윙- 청소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무대 위에 꾸며진 거실에 환하게 빛이 들어온다. 학자 테스만과 결혼한 헤다가 6개월 간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함께 살게 될 집이다.
이곳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테스만과의 결혼생활에서 지루함과 권태로움을 느끼던 그녀는 옛 연인 뢰브보르그가 학문적 성공과 함께 그녀의 앞에 나타나자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고, 여러 인물들이 얽히고 섥히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헤다 가블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입체적이다. 그래서 실제 인간처럼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공연을 보고 난 지금도 누군가 나에게 헤다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잘 모른다고 답할 것이다.
다른 인물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작품이 진행되며 개략적인 과거와 관계도는 그려지지만 그들의 명확한 행동 동기와 캐릭터는 파악하기 어렵다. 은유와 상징이 넘쳐나는 몸짓과 미묘하게 미끄러지는 대사는 이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주요한 축이다.
몽환적이고 모호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대사들이 모여 흘러가는 작품은 그야말로 매력적이다. 작품은 쉽게 설명하거나 단정하지 않고 인물들을 그저 보여준다. 무언가 하나씩 비틀려있는 인간들의 욕망과 솔직함이 비어져나올 때마다 묘한 카타르시스와 긴장을 자아낸다.
그야말로 공연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인간의 복잡성을 담아낸 작품이다. 하지만 그런 만큼 헤다가 누구인지, 그녀가 처한 환경은 어떤 것인지 더욱 깊이 이해한 상태에서 공연을 봤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헤다는 단번에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복잡다단한 인물이며 작품은 그것을 절대로 직관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미묘함을 즐기는 것이 이 공연의 매력인 만큼 원작을 이해하고 인물들이 어떤 방식으로 그려지는지에 집중하면 작품을 더 다층적으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원작을 알게 된 지금, 이 공연을 다시 한 번 보고싶다는 마음이 든다.
남편의 성인 '테스만'을 거부하고 아머지의 성이자 자신의 성인 '가블러'를 붙이고 살아가는 헤다는, 남성의 부속품이 아닌 독립적인 여성의 주체를 천명하며 지난 17세기부터 남성 중심적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켜왔다.
이번 작품에서는 일방적으로 가부장제가 부여한 역할 규범을 해체하고 수동적인 여성상을 거부하는 헤다의 캐릭터 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인간의 실존 의지를 더욱 깊이있게 들여다보며 사회 규범 너머 개인이 갈망하는 본능을 내밀하게 조명하는 것이다.
이번 공연을 맡은 박정희 연출은 이와 관련해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에서도 21세기판 헤다들은 존재하고 돈, 명예, 권력 등 사회 구조가 수직적으로 제안하는 가치들을 차지하는데 진절머리가 난 이들은 과감히 자기파괴를 행하기도 한다"며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일체의 사회적 가치를 내면에서부터 해체한 헤다는 마침내 자신의 육신까지 저버리지만 그녀의 실존은 끝끝내 살아남는다"고 말했다.
이번 작품에서 헤다를 "보편적 가치라는 말로 개인을 구속하고 강요하는 구조주의의 체면이 작동하는 가운데, 자아의 본질을 찾고자 헤메는 오늘날의 사회에 손을 내밀며 질문하는 인간상"으로 해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