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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의 좋은 단편을 소개합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억을 말하기까지
오랜 어느 겨울 날, 집에 돌아온 내가 추워하는 걸 본 어머니께서는 평소 내 습관과는 달리 홍차를 마시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셨다. (…)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이 기쁨은 마치 사랑이 그러하듯 귀중한 본질로 나를 채우면서 삶의 변전에 무관심하게 만들었고, 삶의 재난을 무해한 것으로, 그 짧음을 착각으로 여기게 했다. 아니, 그 본질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 분명히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팔딱거리는 것은 그 맛과 연결되어 맛의 뒤를 따라 내게로까지 올라오려고 애쓰는 이미지, 시각적인 추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멀리서 너무도 희미하게 몸부림치고 있어,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휘저어 놓은 색채들의 포착할 수 없는 소용돌이가 뒤섞인, 어렴풋한 그림자일 뿐이다.
(…) 그러다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그 맛은 내가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일요일에는 미사 시간 전에 외출할 수 없었다.) 레오니 아주머니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갈 때면, 아주머니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서 주던 마들렌 과자 조각의 맛이었다.
(…) 그것이 레오니 아주머니가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그 추억이 왜 나를 그렇게 행복하게 했는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고, 그 이유를 알아내는 일도 훨씬 후로 미루어야 했다.) 아주머니의 방이 있던, 길 쪽으로 난 오래된 회색 집이(…) 우리 집 정원의 모든 꽃들과 스완 씨 정원의 꽃들이, 비본냇가의 수련과 선량한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작은 집들과 성당이, 온 콩브레와 근방이, 마을과 정원이, 이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내 찻잔에서 솟아 나왔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민음사, 김희영 옮김, p.86~91 일부
프루스트가 홍차와 마들렌으로 추억과 미각의 상관관계를 과학보다 일찍 밝혀버렸지만*, 다행히도 그의 문장은 추억의 설계도가 아니라 설명서이기 때문에 추억은 지금도 미지, 신비의 영역에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프루스트가 이 만연체의 설명서를 통해 추억이란 학문에서 성취한 게 있다면, 추억의 신비가 나에게 있다는 것, 내 삶에 있다는 것,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의 문장은 내가 내 이름으로 된 박물관, 불 꺼진 그곳의 길 잃은 경비원임을 알리기 위해, 박물관 내부의 어느 빛나는 거울 앞으로 나를 데려가는 것 같이 느껴진다.
추억, 그 신비에 대한 체감은 사후적으로 온다. 그렇다면 그 신비를 온몸에 두르고 있는 시기는 어느 때일까.
어린 시절이다. 자기가 세상의 주인이며 세상의 온갖 것들이 자기에게 제공된 것처럼 생의 기쁨을 마음껏 섭취하는 어리석고 귀여운 독단자의 시절.
어린 시절 본 것, 만진 것, 들은 것, 맡은 것, 맛본 것, 그 오감으로 체험하고 익힌 세상의 다정스러운 난해함은 지금도 간간이 어두운 기억의 저편에서 솟아올라 삶의 들판 위에 아름다운 노을을 그려낸다.
그러나 하루 종일 덥다가도 해가 지면 추위를 느끼기 시작하듯이, 추억을 응시하다 보면 뭉클해지고 외로워지는 순간이 온다. 그래서 우리는 추위를 잠시나마 잊기 위해 입을 열고 추억을 말한다. 그 추억이 단지 나만의 꿈은 아니지 않느냐고. 당신도 그때를 기억하느냐고. 당신에게 그때는 어땠냐고.
엄마라는 추억 혹은 비밀
프루스트처럼 현재 느낀 맛과 향으로 그것과 공명하는 추억에 잠길 수도 있다. 그러나 문진영의 단편소설 <여름방학>**은 프루스트의 방식과는 반대로 과거의 냄새, 색감, 이미지를 가지고 지금과 공명하는 길을 스스로 찾아간다. 그러기 위해 어린 ‘나’를 추억 속의 독단자가 아니라 관찰자로 위치하게 한다. 바로 엄마라는 친숙한 미지, 배현남 씨의 인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아이에게 엄마 아빠는 언제나 사랑을 퍼부어야만 하는 존재다. 오로지 나만 보고 나만 걱정하고 나만 사랑해야 한다. 엄마 아빠 중 한 사람이어도 괜찮다. 누구든 사랑만 해주면 된다. ‘나’에게 아빠 최기용 씨는 ‘조용한 원칙주의자’ 같지만, 엄마 배현남 씨는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 머리 앤’, ‘말괄량이 삐삐 롱스타킹’처럼 ‘친구’ 같은 존재다.
그러나 ‘나’의 추억 속에서 깁스를 한 엄마는 내가 아니라 ‘다른 것’을 보고 있다. ‘열두 살’의 내가 ‘의자 위에 올라가 있’어 ‘위태로워’ 보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나만 바라봐야 하는 그런 순간에 엄마는 바닥의 그늘을 보고 있을 뿐이다. 그 그늘과, ‘성긴 잎 그림자 사이로 빛이 동그랗게, 동그랗게 반짝거리는 것을’. ‘나’는 엄마에게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생각하다가 결론을 내린다. 엄마가 사랑에 빠졌다고.
‘나의 가장 좋은 친구’인 엄마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 엄마의 애정이 변하기 시작한 게 교회에 나가고서부터라는 걸 깨달은 나는 엄마가 교회 안의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고 의심한다.
나의 불안과 의심에 아빠는 이런 충고를 한다.
아빠는 학교에 돈만 벌러 가는 게 아니란다. 거기 아빠 삶의 절반이 있지. 내가 출근할 때 너희들을 업고 가지 않고, 네 동생이 친구들이랑 놀 때 널 끼워 주지 않듯이 우리한텐 다 각자의 영역이 있는 거야. 엄마한테도 엄마만의 영역이 다시 생긴 거고. 그건 다른 누가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p.165)
나는 친구였던 엄마가 멀어진 게 조금 서운하지만, 아빠의 말대로 엄마를 존중하기로 한다. 비로소 놀이의 규칙을 깨달은 것처럼, 그 규칙을 지키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엄마가 가자고 했던 교회 체육대회에 가지 않았던 것이지만, 체육대회에 갔다 온 엄마의 ‘빠리지앵 바지’에 풀물이 든 걸 보고 만다. 엄마는 얼룩을 보고 놀라고 울상 짓지만 설명하지 않는다. 발견하면 놀라고 울상 짓기도 하지만 설명하지 않는 것, 비밀에 부치고 마음에 품는 것, 그것은 사랑이 아닌가. ‘나’한테는 보여주지 않았던 다른 사랑이 아닌가.
바지의 풀물은 세탁소에 갔다 온 뒤로 사라지지만 그것을 본 ‘나’에게 묻은 얼룩은 지워지지 않는다. 어떤 얼룩은 그 위에 묻어도 깊은 상처가 된다.
‘나’는 사랑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여름성경학교에 따라가지만 허탕만 친다. 그 대신 엄마가 나뿐만 아니라 아빠와도 멀어지고 있다는 불안이 싹튼다. 자신이 가진 사랑과 믿음을 애인에게 전하지 않는다면, 애인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닐까 하고.
결국 엄마가 집을 나갔기 때문에, 엄마가 다른 사랑을 하고 있다는 의심은 가정의 불안으로 확대된다. 엄마가 친정에 간 거라는 아빠의 설명을 나는 믿지 않는다. 아빠가 그것으로 딸을 지키려 한다고 생각한다. 그때 아빠는 느닷없이 빅뱅이론을 이야기한다.
아빠 말에 따르면 빅뱅이라는 건 거대한 에너지의 폭발이었다. 그 폭발로 인해 우주가 시작된 거고, 그 후로 우주는 지금까지도 계속 팽창하고 있다고 했다. 우주에는 중력이 없으므로 모든 것들이 첫 폭발의 힘으로 계속해서 서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조만간 지구가 태양과 멀어져 버리면 우리는 다 얼어 죽는 게 아니냐고 내가 대꾸하자 아빠는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태양계의 행성들은 실제로는 그다지 유의미하게 멀어지지 않고 있다고.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고 했다. 인력이라는 것이.
그건 빅뱅 이야기였지만 실은 일종의 기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며칠 뒤 엄마가 돌아왔다. (p.170)
‘나’가 엄마를 통해 목격하고 아빠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인간관계에 존재하는 인력과 척력이다. 영원할 것처럼 보이는 인간관계가 실은 인력과 척력의 그 끊임없는 긴장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 동시에, 마냥 영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비밀, 누군가의 전부이기도 한
엄마가 ‘다른 것’을 보기 시작한 시절부터 지금까지 기억을 흘려보내며 ‘나’가 이른 결론은 엄마는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흥미로운 건 현재의 화자가 엄마에게 그때 겪은 사랑의 정체를 묻지 않는다는 점이다. 엄마가 돌아온 게 다행이라고만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 엄마를 이해하고자 하나 엄마의 진실에는 닿지 않는 이 이야기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사람을 낱낱이 아는 것만이 이해는 아니다. 이해는 그 사람을 온전히 둔 채, 그에 대한 내 생각을 덮어쓰는 것이다. 오해로 밝혀져도 그 타격이 나에게만 오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해야만 나는 그 사람과도, 그 사람의 진실(비밀)과도 공생할 수 있다. 이해의 부등호는 언제나 타인에게 향해야 한다.
때로 비밀은 그 사람의 전부일 수가 있다. 그 사람이 지키고자 하는, 기억하고자 하는 전부. 그 시절 ‘나’의 엄마가 겪었을 사랑은 엄마의 생에 풀물처럼 묻어 지금까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 얼룩만이 엄마를 ‘배현남 씨’로 만들어 주는 것일 수도 있다. 얼룩의 정체가 밝혀지면 배현남 씨의 추억뿐더러 삶까지 소진될지도 모른다. 결국 이 소설은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서부터 지금까지 그 사람이 가진 비밀의 윤곽을 더듬는 이야기인 것이다. 한 사람에게 깃든 신비, 나의 이해를 덮어쓸 그 윤곽을 더듬는 이야기.
산타의 비밀처럼 어떤 비밀은 지켜져서 더 아름답지 않은가. 남몰래 한 짝사랑처럼 어떤 비밀은 지금까지도 나를 설레게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인간에겐 비밀이 필요하다. 존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공기도 풍선처럼 특정 형태에 담기는 순간 존재감을 갖게 되듯이, 평범한 어떤 일이라도 비밀로 담기는 순간부터 신비로운 존재감이 생긴다. 그 존재감은 그 인간의 존재감과도 같다. 비밀이 전부 밝혀진 삶은 길 위의 얕은 물웅덩이처럼 금세 증발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모두 죽는 것처럼 인간이 가진 비밀도 결국 소진되는 것이라면, 인간이 비밀보다 먼저 죽어 그의 비밀이 그 누구에게도 신비감을 자아낼 수 없게 될 것 같다면, 차라리 그 전에 비밀을 찻잔에 담아 향과 맛을 음미해 보는 건 어떨까.
‘나’가 앞으로 할 일이 있다면, 그건 추운 어느 날 엄마가 마들렌과 홍차를 꺼내듯이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비밀을 모른 체하고 덤덤하게 살아가는 일일 것이다. 엄마가 그때 이야기를 시작하면 자신도 그 추억을 스스럼없이 꺼내면 된다. 서로의 추억을 점검하는 그 모녀는 덜 외로울 것이다.
프루스트의 찻잔에서 솟아 나온 것들은 지금도 솟아 나오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프루스트 현상. 냄새를 통해 과거의 일을 기억해내는 현상으로, 프랑스 작가 M.프루스트의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la recherche du temps perdu》에서 유래하였는데, 2001년 필라델피아에 있는 미국 모넬화학감각센터의 헤르츠(Rachel Herz) 박사팀에 의해 입증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 문진영. (2023, 8). 여름방학. 문학들,(73), 160-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