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맹세 놀이, 밧줄 타기, 군인 놀이가 전부였던 소년 시절. 하지만 이 모든 놀이가 진짜 현실이 되고, 유년 시절 이야기를 다시 꺼내기 어렵게 된다면 어떨까? 캠프파이어 앞에서 나누던 이야기에도, 엄마에게 쓴 편지에도, 좋아하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기도문에도, 이 두 보이스카우트는 그저 알려주고 싶었다. 자신들이 얼마나 괜찮은 사내가 되었는지, 엄마에게 얼마나 크고 강한 사람이 되었는지. 마치 보이스카우트 선서처럼. 다시 시작된 전쟁의 시대에 고하는 그때 그 소년들의 이야기. 또다시 전쟁의 포화로 가득한 어지러운 현 국제정세 속에서 청년들의 불안하고 혼란한 마음을 대변하는 작품. 베트남전쟁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년들의 성장과 현실 이야기는 시공간을 넘어 현재를 관통하는 공감을 자아낸다. 우리에게 강요되는 이데올로기와 모랄리티는 과연 실제 기능하고 있는가? 혹은 존재하기는 하는가? 클로이와 나타샤가 보여주는 이 무대는 우리에게 저릿저릿한 여운과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남긴다.
- [소년에게서 온 편지: 수취인 불명] 소개
내게는 보이스카웃, 걸스카웃보다 아람단이 더 익숙하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는 스카우트 단체 대신 아람단이 있었는데, 단복을 맞춰 입고 운동장에 도열한 아이들을 보며 하교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특별한 감흥은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저 아이들은 집에도 안가고 되게 신기한걸 하는구나 정도.
극의 주인공, 에이스와 호퍼처럼 스카우트 단체, 단복, 대통령에 대한 선망은 없었지만 친구들과 편을 나누어 전쟁놀이를 하는 것은 꽤나 재밌었던 것 같다. 나는 동네 아이들과 놀이터에 모여 서로에게 장난감 BB탄 총을 쏘며 즐거운 오후 시간을 보내곤 했다. 총구를 친구에게 겨누고, 총알이 떨어지면 다시 채우고, 심지어 고통을 지우기 위해 맞은 곳을 문지르는 친구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장난감 총 앞에서 놀이터는 잔인한 전쟁터로 변모하고, 아이들의 폭력성이 자유롭게 표출된다. 동네의 문제도, 아이들의 문제도 아니다. 굳이 꼽자면 ‘전쟁’이라는 파괴의 극치를 놀이에 대입시킨 것이 그나마 찾을 수 있는 오점이라 할 수 있겠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정한 ‘전쟁의 룰’에 따라 놀이를 진행했을 뿐이다. 그 과정에 필연적으로 파괴 행위가 벌어지지만, 아이들은 이를 폭력으로 인지하지 않는다. 어른들이 그렇듯, 칭찬 받아 마땅한 훈장으로 여긴다.
나 역시 그렇게 자라왔다. 어릴 때는 친구에게 장난감 총을 쏘며 놀았고, 컴퓨터를 만지고 나서는 데이터로 만들어진 가상의 적을 해치우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FPS게임에 몰두하며 어떻게 하면 실력을 올리고, 점수를 올릴까 궁리하다가 대학을 1년 늦게 들어가는 일이 있었기에 스스로 문제라 규정지은 적은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총구를 겨누는 행위가 살상의 영역이라고 인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청소년 시기 내내 누군가에게 총을 쏘면서 여가를 보내던 나는 군대에 입대해 비로소 총을 만지게 되었다. 장난감 총도, 가상의 총도 아닌 검지손가락 길이의 금색 실탄을 발사하여 무수한 우주를 손 쉽게 앗아갈 수 있는, 쉽고 줄여 말하면 K-2였다. 실제 총의 조작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탄창을 끼우고, 총의 옆 몸치에 달린 콩나물 같은 것을 손바닥으로 툭 치면 장전이 끝난다. 가늠쇠랑 가늠좌를 일렬로 맞추어 조준하고 방아쇠를 누르면 끝. 굉음과 함께 200미터밖에 있는 표적이 쓰러진다. 그 개수를 최대한 늘려야 칭찬을 받을 수 있었고, 만발을 달성하면 간절히 원하던 휴가증도 얻어낼 수 있었다.
군인이 된 나의 사고회로는 장난감 총을 갖고 놀 때, FPS게임을 즐겨할 때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사격장에서 수 백발의 실탄을 쏟아내어도, 휴가증을 따내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다행이도 나는 다친 곳 하나 없이 군대를 떠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극 중 등장하는 소년의 아버지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 나와는 다르게, 전쟁에 참전하여 세상을 떠났다. 그와 나의 차이라면 전쟁을 미디어와 관습으로 예습한 나와 달리, 그는 생명의 소멸이 일상이고 목적인 전쟁에 휘말렸다는 한가지 사실 뿐이다.
학습된 PTSD
나와 연극의 등장인물들은 똑같이 ‘전쟁놀이’를 즐기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차이가 있다면, 나는 전쟁의 아주 얕은 일부만 학습했을 뿐이고 아이들은 아버지의 상실과 PTSD를 모두 배웠다는 사실이다.
천진난만하게 친구의 머리를 겨냥했을 뿐이던 나와 달리, 아이들은 대통령에게 잘 보이기 위해 경례하고 공훈을 세우려다 발목을 삐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전쟁놀이’라는 합성어는 나와 아이들에게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나의 전쟁놀이를 어른들이 그대로 행할 때, 그것은 여전히 전쟁놀이다.
그러나 연극 속의 전쟁놀이를 어른들이 연기했다면, 이 연극은 풍자극이 아닌 리얼리티극으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전쟁의 아픔을 슬퍼하고, 위로받기 위해 동료에게 기대는 아이들은 전쟁을 겪은 어른들과 무서울 정도로 비슷하다.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나를 절대 바라볼 일이 없는 대통령을 향해 기차가 멀어질 때까지 경례하는 아이들을 통해 작품은 전쟁의 허상을 명징하게 깨닫게 한다.
무기력, 두려움, 슬픔, 공포... 전쟁에서 파생되는 것들을 전부 배운 아이들은 이러한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대와 의지의 방식을 택한다. 이 역시 전쟁터에 버려진 어른들과 소름 돋게 흡사하여 불쾌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마음대로 전쟁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어른들처럼 아이들도 갑갑한 틀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불안을 겪으며 살아간다.
전쟁터에서 탈출하는 것은 주어진 운명에 저항하고 생명을 되찾는, 아주 당연한 행위다. 그러나 현실과 극, 모든 세상은 이를 천벌 받을 정도의 악랄한 행위로 규정한다. 나이를 속이고 성체를 받아먹은 아이가 자신이 한 거짓말이 신에게 들킬까 봐 벌벌 떠는 것처럼 전쟁 속 어른들도 참호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막심한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이처럼 [소년에게서 온 편지: 수취인 불명]은 천진한 아이들의 몸을 빌려 가장 처절한 어른들의 이야기를 하는 풍자극이다.
이 풍자의 대상과 시기가 무대 위에서 멈춰 있는지, 아니면 우리 주변에서도 벌어지고 있는지는 아주 심도 있게 고민할 문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