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에 위치한 시청역에서 내려 덕수궁 사이로 나 있는 좁은 골목에 들어서면 유명한 와플집이 자리하고 있다. 와플이 구워지는 고소하고 달달한 냄새를 뒤로하고 거리를 걷다보면 버스킹을 하는 무명의 아티스트를 만날 수 있고, 그 길로 쭉 걷다보면 점심을 해결하기 좋은 몇몇의 밥집들이 나온다. 김앤장 법률사무소와 언론진흥재단, 경향신문 등이 위치한 이 거리는 나름의 추억이 깃든 곳이다.
조선시대 호위무사 복장을 하고 덕수궁을 지키는 관병들과 그에 맞춰 한복을 입은 외국인 관광객을 지나쳐 샛길로 들어서면 한적하고 걷기 좋은 길이 나온다는 건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이다. 정동길에는 한국의 감성을 가득 담은 여유와 휴식의 분위기가 숨쉰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정갈한 느낌의 공연장이 하나 위치해있다. 국립정동극장이다.
한국의 아름다움을 물씬 담아낸듯한 정동극장은 매번 지나치면서도 찾을 기회를 내지 못했다가 이번 공연 '단심'을 계기로 찾았다. 여름의 초입답게 조금 후덥지근하고 밝았던 한낮에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공연장에 들어섰다.
북적거리는 내부를 뒤로하고 티켓을 교환해 자리에 앉았다.
연꽃이 그려진 바닥에 누워있는 심청 울려퍼지는 전통 음악에 맞게 몸을 움직인다. 가꾸어진 무용수의 몸선은 몸짓 하나하나를 우아하게 다음어낸다. 곧이어 검은 옷을 입은 또다른 심청이 무대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심청은 갈등하고 그새 심청의 주변엔 심봉사와 뺑덕어멈이 뒤섞여 어우러진다.
한국적인 미를 가득 담은 현대무용과 음악, 특유의 미장센이 무대를 장악한다. 무대 위 어느 장면 어느 순간을 포착해도 그 자체로 완성돼있는 미장센을 자랑한다. 무용을 이어가는 배우들의 동선과 몸짓, 구도와 자세 하나하나가 전부 균형감을 이룬 회화 작품처럼 관객들에게 쏟아져 들어온다.
뱃사람들에 의해 바다로 이동한 심청은 뱃머리에서 바다에 뛰어들고 그녀만한 효녀를 가만히 둘리 없는 하늘은 용왕을 시켜 그 어여쁨을 칭송한다. 이어지는 환상적인 바다의 색채, 전통적인 해석과 다르게 여왕인 용왕과 그녀의 주변을 가득 메운 아름다운 신하들이 심청을 환대한다.
연신 이어지는 환상적인 상상력, 궁으로 들어온 심청은 아버지인 심봉사를 찾기 위해 나라의 모든 장님들을 초대해 궁 안에서 잔치를 연다.
심청과 심봉사는 기쁨의 재회를 하고 온 나라의 봉사들은 그 기쁜 소식에 화답하듯 가리웠던 눈이 열린다. 말이나 설명이 아니라 한국적 미를 자랑하는 안무들이 그 모든 장면들을 자연스레 보여준다.
그 어느 장면도 버릴 것이 없다.
감탄하며 두 눈에 미장센들을 담다보면 한 장면 한 장면 그림같은 장면들이 흐르고 서사는 자연스레 이해된다. 고뇌하는 심청과 분홍빛의 색감으로 화사하게 피어난 용궁 여왕의 호의, 때론 익살스럽게 때론 화려하고 몽환적이게 때론 우아하게 작품은 이어진다.
영화관의 가로를 가득 채우는 스크린x관과 위아래를 메우는 아이맥스관을 동시에 합쳐놓은 듯 영상 배경이 가득한 무대는 그 깊이감과 함께 작품에 완벽히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배우 하나하나의 존재감은 엄청나고 어느 쪽으로 눈을 돌려도 풍부한 포만감이 드는 퍼포먼스가 이어진다.
75분으로 비교적 컴팩트하지만 그리 짧지 않은 시간동안 이 작품은 확실한 존재감과 아름다운 미장센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모든 배우들에게 충분한 시간이 할애며 연출진까지 함께 공연의 기쁨을 공유하는 커튼콜마저 보기에 좋았다.
심청이라는 흔하고 익숙한 이야기를 심청의 고뇌를 중심으로 풀어낸 이번 작품은 수많은 대사로 설명하지 않고도 몸짓만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전달해낸다.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면서도 현대적인 요소를 결합해낸 연출은 그야말로 한국적 미와 미장센의 정수였다.
한국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의 기로에서 방황하다 그 무엇도 챙기지 못하는 공연이 부지기수인데 '단심'은 그 모든 것을 두둑히 챙긴 작품이었다. 이런 것이 한국적인 것이라면 얼마든지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지난 8일 막을 올린 '단심'은 오는 6월 28일까지 국립정동극장에서 진행된다. 가격은 전석 6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