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살펴본 인간의 모습은, 알을 깨고 나왔지만 다시 새로운 알에 갇히는, 마치 영겁회귀 같은 순환이 반복되는 영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 세기마다 던지는 질문의 방식과 그 대상이 각기 달랐지만, 결코 극명하게 대립하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 만날 수 없는 대척점이 아니라 전환의 지점이 있었고, 그 지점에서 인간은 기존의 세상이라는 알을 깨고 나왔지만, 다시 새로운 알에 갇혀 다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각 세기마다 던지는 이 질문의 끝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궁극적으로 묻고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17세기, 18세기와 19세기를 프리드리히 니체의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적인 차원에 대한 개념으로 정의하고, 19세기의 인간에 대한 질문과 그 답이 예술 작품에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아폴론이 세상을 지배했던 시기, 17세기와 18세기
"우리는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아폴론적 세계와 ... 고통에 의해 개별자는 자신을 구원해 줄 가상을 만들지 않을 수 없으며, 바다 한가운데 흔들리는 조각배에 몸을 기댄 채 그렇게 가상에 침잠하여 조용히 앉아 있게 된다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중
17세기와 18세기는, 니체의 표현 방식을 빌리자면 '아폴론적'인 인간의 면에 주목했던 시기이다. 아폴론적이란, 프리드리히 니체의 저서, 《비극의 탄생》에서 발췌한 위의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아름다운 가상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면모 중 하나이다. 아폴론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질서정연함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이성의 힘인 우리 인성의 한 차원인 것이다.
“신성한 천체의 원운동과 별의 경로, 크기, 거리, 출몰, 그리고 하늘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의 원인을 밝혀서 ... 모든 학예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으며 자유로운 인간에게 가장 어울리는 이 학문에는 수학의 거의 모든 분야가 사용되고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저서인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인습되었던 종교적 시선이나 신이라는 거대한 체계에서 벗어나 수학과 과학, 즉 인간의 이성으로 세상의 원인을 관찰하기를 권유했다. 증대되었던 17세기의 이성에 대한 관심이 파도처럼 밀려, 18세기에도 '이성'이라는 밀물이 거세졌다.
사람들을 이성으로 일깨울 것이라는 신념 하에 혁명을 일으켰으며, 더 이상 자연재해나 인간이 맞이한 풍파를 신의 시험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리스본에 20,000 채 가량의 6~7층짜리 집들을 지은 것은 자연이 아니고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대도시의 주민들이 좀 더 균등하게 분산되어있고 좀 더 가볍게 거주했다면 피해는 훨씬 적거나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18세기의 루소의 편지를 읽어보면, 인간이 맞이한 혼란과 그 혼란 속에서 겪었던 내면의 혼재를 '극복'하고자 했다.
종교가 가지고 있었던 준엄한 세계에서 헤어나와 인간을 덧없는 존재로 인식했던 시기에서 벗어나 자연과 우주의 질서를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려 했다. 이처럼 17세기와 18세기는 세계를 이해하려고 했다.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불멸한 다양성을 지닌 이 세계를 질서와 규칙이라는 선으로 나눠보기도 하고, 이해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여 일치와 조화라는 특성을 찾기 위해 깊게 사유한 시기라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아폴론과 공존하는 디오니소스를 발견하다
"태고의 인간들이나 민족들이 모두 신으로 여겨 찬미하여 노래하던 술기운 때문인지 ... 아무튼 인간은 디오뉘소스적 격정에, 조금씩 고조되다가 마침내 개별적 내가 나를 망각하는 몰아의 도취에 눈을 뜬다."
-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중
그러나 인간은 아폴론적인 면모만 지닌 것이 아니다. 모두가 축복하고 환희했던 '이성'이라는 여명은 세상을 비추기도 했지만, 작은 목소리를 지닌 사람들의 입을 막고 그들의 희생과 고통을 그림자 지게 하기도 했다. 이성의 완벽성에 대한 의심은, 이성과 과학, 질서와 진보의 세계라는 알에 금이 가도록 했고, 마침내 인간의 또 다른 면모인 디오니소스적 차원을 발견했다.
디오니소스적이란, 디오니소스가 포도주와 황홀경의 신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술에 취한 인간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 의미를 파악하기에 쉽다. 취중진담이라는 말이 있듯이, 술에 취했을 때 진심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생각과 말처럼 생각과 이성으로 통제되고 제한되었던 내면의 심연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우리네 모두의 보편적 심연, 우리네 내면세계는 꿈을 체험하면서 오묘한 쾌락과 필연적 희열을 느낀다는 것이 분명하다." 꿈은 술과 같이 인간의 본연의 모습, 무의식을 만날 수 있도록 한다. 이성의 개입과 통제 없이 어두운 내면이라는 심연을 탐험하면서 우리는 아름답고도 우아하지만은 않은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처럼 니체는 아폴론적인 면을 내세우며 세계의 혼란과 그 속에서 인간이 겪는 혼돈에서 벗어나고자 한 이전 시대와 달리 니체는 대면한다. 인간의 추악하고도 좌절이 그득한 심연을.
"춤추는 별을 낳으려면 자신의 내면에 아직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그대들 내면에는 아직 혼돈이 있다. 슬프구나! 인간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경멸할 수 없는 더없이 경멸스러운 인간의 시대가 오다니"
-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니체는 '자기비판'을 강조했다. 인간의 미욱함을 회피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경멸하는 수준으로 깊게 들여다보려는 인간의 태도를 권한다. 그러나 깊게 들여다 봄으로써 만난 인간의 침울하고 무거운 내면을 뜯어 고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되려 혼돈을 그대로 가지기를 역설한다. 즉 인간 본연의 모습을 그 자체로 두기를, 더 이상 일치와 조화라는 아폴론적인 차원으로 고상하게 개조하지 말기를 바라며 인간의 디오니소스적인 면을 지켜내라고 한다. 이처럼 감정, 본능, 쾌락 등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찾은 니체의 발견은 19세기 상징주의 예술 작품에 표출되고 있었다.
Odilon Redon, On the Horizon, the Angel of Certitude, and in the Dark Sky A Questioning Glance, 1882
오딜롱 르동의 19세기 작품을 살펴보면, 기괴하고 꺼림칙하며 어둡고 침울하다. 이 작품을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검은 하늘은 인간의 심연, 즉 내면과 같으며 그 속에서 움츠린 인간은 공중에 떠있는 눈을 무서워하며 불안함에 떨고 있다. 이때 눈은 무언가를 꿰뚫어보는 듯한, 마치 천사의 눈과 같고 인간은 그 눈앞에 한없이 작은 존재로 묘사되었는데, 우리는 우리 인간이 모두 지니고 있는 모나고 한없이 약한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표현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Odilon Redon, The eye like a strange balloon goes to infinity, 1882
그러나 이 작품들에 대해 더 깊게 살펴보려면, 화가 오딜롱 르동의 생애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오딜롱 르동은 어린 시절 가족과 떨어져 살면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고독을 느끼며 살았었다. 그리고 예술로부터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했을 무렵 도망치듯 군대에 입대하기도 했다. 오딜롱 르동은 어린 시절의 슬픔, 예술로부터의 고뇌, 전쟁에서의 안도라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삶을 지냈고, 그 삶 속에서 체험한 내면과 감정을 그의 예술작품에 표출했다.
Odilon Redon, The Crying Spider, 1881
이러한 그의 이야기를 토대로 다른 작품을 보면 인간의 신체의 일부이지만 온전한 인간의 형태가 아니며, 기괴한 모습 속에서도 눈물을 통해 슬픔을 자극하도록 하는 알 수 없는 존재를 통해 묘한 감정을 들도록 한다. 그리고 채색되지 않은, 검은색은 인간의 내면을 대변한다. "어느 무엇도 남용하려 하지 않는다. 눈을 즐겁게 하거나 어떠한 감각도 자극하고자 하지 않는다. 검은색은 팔레트 혹은 프리 즘의 가장 아름다운 색보다도 더욱 우월한 정신의 대리인이다.
흐르는 강, 깨야하는 또 다른 알
"인간은 더럽혀진 강물이다. 더럽혀진 강물을 받아들이면서도 오염이 되지 않으려면 바다가 되어야 한다."
-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중
니체는 인간이 더럽혀진 강물이더라도,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더럽고도 어두운 면모를 받아들이면서도 오염이 되지 않도록 바다가 되라고 말한다. 이는 인간이 디오니소스적인 성질만을 혹은 아폴론적인 성질만을 가질 수 없으며, 여러 강이 만나는 지점인 바다와 같이 두 모습을 모두 지닌 인간 본연의 모습을 사랑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가 던진 질문이 인간에 대한 정답은 아니다. 우리는 알을 깨고 나오는 습성을 가진 존재로서, 그 질문에 대한 확신에 찬 답을 찾았더라도 또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인간은 한계를 극복하고, 극복한 지점에서 또 다른 한계와 무한성을 마주하며 또 다른 차원의 인간을 발견하며 또 다시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