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한국 음악이다. 이전 글에서는 송소희와 상자루의 음악을 소개했다. 여전히 한국 음악의 생활화를 꿈꾸며 오늘은 정재일이라는 음악가를 소개해 보려고 한다.
정재일은 [오징어게임], [기생충] 음악 감독으로 유명한 작곡가이다. 다양한 장르의 작곡가로 유명하지만, 정재일이 만들어내는 한국 음악은 독보적이고 창의적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작품에서는 한국 음악을 향한 애정이 느껴진다. 그가 얼마나 이 음악을 특별하게 생각하는지 알아보자.
내가 정재일의 한국 음악을 처음 알게 된 건 전통 타악 그룹 ‘푸리’를 통해서이다. ‘푸리’의 2집 수록곡 [자룡 활 쏘다]를 통해 정재일의 음악 세계의 모습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정통 판소리, 국악의 타악기와 서양의 피아노가 자연스럽게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낸다. 전통의 경계를 가볍게 뛰어넘는 음악이다.
정재일은 최근 [자룡, 활 쏘다]를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냈다. 이전엔 다양한 악기를 사용했다면, 이번엔 피아노 하나와 목소리만으로 음악의 다이내믹을 살려낸다. 피아노와 목소리의 대화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음악이다. 김준수의 목소리와 정재일의 피아노가 각각 독립적인 소리로 존재하지만, 그 둘이 호흡을 맞추기 시작할 때 느껴지는 티키타카는 그 어떤 음악도 대체할 수 없다.
정재일의 음악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비나리]이다. ‘비나리’는 제목에서도 보이듯 기도하고 빈다는 말에서 왔다. 고사를 지내며 앞길의 행복을 비는 경기민요인 ‘비나리’는 본래 사물놀이 형태로 진행되지만 정재일이 새롭게 만든 비나리는 사물놀이에 더불어 현악 사중주, 판소리가 함께 어우러진다. 음악을 들으며 이 글을 읽기를 추천한다.
처음에는 바람과 같은 대금 소리로 시작하고, 뒤이어 다양한 악기들이 합류한다. 위 영상 기준 1분 13초, ‘천개’를 시작으로 ‘비나리’의 선고사가 시작된다. 선고사는 ‘하늘이 열리다’라는 뜻의 천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주가 생성되고 조선이 세워지는 과정을 다룬다. 3분 35초 ‘몽중살 풀고 가자’ 이후 나오는 부분은 살풀이이다. 사람이나 물건 등을 해치는 독하고 모진 기운을 뜻하는 ‘살’을 풀어 사람들에게 불행과 병이 없기를 기원하는 부분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살’을 하나하나 풀며 그들의 삶에 어려움이 없기를 기원한다. 쭉 이어지는 살풀이가 끝나고 5분 18초부터 뒷념불이 시작된다. 살을 없앤 후 이어지는 뒷념불에선 고사덕담을 한다. 고사덕담은 '고사'와 '덕담'의 합성어로, 고사 즉, 제사를 지내면서 액운을 막고 복을 기원하는 덕담을 칭하는 말이고, 고사덕담은 주로 풍물놀이 또는 굿에서 자주 보인다. 나쁜 기운은 갔으니 덕담을 통해 좋은 기운이 가득하기를 기원해 준다. 음악이 진행되는 내내 동서양의 악기들은, 그것이 다른 장르의 악기임을 느끼지도 못한채 오로지 하나의 음악을 향해 어우러진다. 마지막 덕담이 8분 3초에 끝나고 그 이후로는 시나위가 시작된다. 시나위는 무속 음악의 한 종류로 여러 악기가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음악을 뜻한다. 여기선 모든 악기가 고조되면서 정점을 찍다가 한순간, 마치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음악이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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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일의 음악은 단순히 한국 음악의 새로운 형태에서 멈추지 않는다. 정재일은 그것을 기억으로 가져가길 바란다. 정재일의 음악 중에서 가장 마음에 남았던 것은 [내 정은 청산이요]이다.
이 음악은 5.18 민주화운동 40년을 기념하여 만든 음악이다. 영상을 보면, 그가 얼마나 이 시간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지 알 수 있다. 5.18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음악과 영상을 쭉 보며 그 시절을 눈에 담다 보면 노랫말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 부분이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내 정은 청산이요’는 남도민요 ‘육자배기’의 일부이며, ‘육자배기’의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먼저, ‘내 정은 청산이요’는 내 마음은 푸른 산과 같이 변치 않고 굳건함을 의미한다. 이후 ‘님의 정은 녹수로구나’는 님의 마음은 흐르는 물과 같이 변하기 쉽고 덧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녹수야 흐르건만 청산이야 변할소냐’는 흐르는 물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산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는 말이다. 마지막 ‘빙빙 감돌아갈 고나아헤에’는 녹수가 청산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한다는 내용이다.
이후 ‘임을 위한 행진곡’이 나온다. 이 곡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중 희생된 윤상원과 노동 운동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작곡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곡은 5.18의 상징적인 곡이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정재일은 “이 작업은 제게 기억하는 법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했고, 목소리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했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서도 느끼듯, 이 음악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합쳐질 때 가장 고조된다. 사람들이 합창하는 목소리는 마치 떠나간 영혼들이 마지막으로 외치듯 선명하고 명징하다. 합창이 끝난 후 마지막 떠오르는 가사들은 아마 이 곡이 가장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한 글자 글자 바라보며 담아보길 바란다.
우리가 한국 음악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의 가장 큰 목적은 ‘기억’에 가깝다. 우리가 아니면 들을 사람이 없기에, 기억할 사람이 없기에 기꺼이 눈과 귀에 담아야 하는 것이다. 그 기억은 음악과 음악에 담긴 정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게 만든다. 마치 송소희가 몽금포타령을 새롭게 부르듯, 상자루가 굿에서 발견한 공동체의 의미를 전하듯, 정재일이 5.18의 이야기를 들려주듯. 이 음악들은 우리조차 잊고 있던 우리의 기억과 향수를 다시 떠올리게 해준다. 이것은 이들의 음악이 소중하고,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형태로 이어져야 하는 이유이다.
정재일은 이후 장민승 작가와 시청각 프로젝트 ‘둥글고 둥글게’ 작업을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를 담은 작품을 만들었다. 5·18 민주화운동을 중심으로, 1979년 부마 민주항쟁부터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의 내용을 담았고, 이 작업을 위해 만든 음악을 재구성하여 [시편](psalms)이라는 앨범을 발매했다.
“기억하소서, 제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당신께서 모든 사람을 얼마나 헛되이 창조하셨는지를.”(시편 89편 47절)
정재일은 이 시편의 내용이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라기보단 나 자신에게 되뇌어 말해줘야 할 만트라(명상할 때 되뇌는 주문)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하고 주문하듯 되뇌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 작업에 대해 “끊임없이 돌고 도는 역사의 거대한 쳇바퀴 속에 무기력하게 얹힌 개인의 삶,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의 외침, 그러나 그 안에서 끝끝내 기억해 내고 찾아내야만 하는 진실의 순간들을 마음속에 되새기며 음악을 만들어 나갔습니다.”라고 말했다.
진실의 순간들. 사라진 이름들. 잊어버린 마음을 기억하며 이전의 목소리를 오늘로 잠시 초대하는 설렘과 숭고함이 당신에게도 깃들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몇곡 더 첨부하고 마치겠다. 시간이 난다면 이 음악들도 듣어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