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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스페인의 예술가 안헬리카 리델의 첫 내한 작품 <사랑의 죽음. 피비린내가 눈에서 떠나지 않아. 후안 벨몬테.>는 이해해서는 안 되는 연극이다. 연극의 극본과 연출, 무대와 의상 디자인까지 모두 도맡은 그녀의 연극은, 공연장 내부에서 무차별적으로 범람하는 언어와 사유를 자신의 앞에 내세운 채 실시간으로 압도당하며 의도된 체험 속으로 떠밀려가는 관객들이 점차 하나의 풍경이 되어가는 것을 바라본다. 어느 것 하나도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속 이반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사실을 왜곡하게 된다"고 말한 것처럼. 누군가가 깨달음은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깨달음이 이해를 앞지른다면 그것이 곧 연극의 전부가 된다.

 

 

(희생제의가 열리는 동안 인간들은 짐승을 도살한다. 짐승을 도축하고 자르는 것으로 그 짐승의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동시에, 공물을 조각내어 분배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적 사실을 조직한다). 적어도 언어를 듣는 동안, 언어는 자신의 물리적 소리의 집합을 확장하고 해체한다. 온전히 사회적인 영역에서 개개의 영혼을 뒤흔드는 내면적인 침묵의 소리 집합으로 변모하기 위함이다. (...) 화자가 말을 하는 동안 언어는 자기 자신을 매혹하여 혼자 말하고, 어찌되었든 거의 듣지 못한다. (...) 화법에서 독백이란 언어의 신기루 같은 것이다. 말하기란 밖으로 드러나 주워 담을 수 없는 혼란이다. 언어는 화자와 화자의 사유를 사유한다.

 

- 파스칼 키냐르, <음악 혐오>, p.122-123

 

 

물론 투우장을 넘어 하나의 희생제의가 되어버린 연극 속에서, 배우와 관객이 동시에 참여하는 영적 의식 속에서 리델은 황소의 힘을 얻기 위해 황소를 도살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도살되는 쪽은 그녀 자신이 되겠으나, 중요한 것은 그녀가 황소를 대하는 태도이다.


"하지만 황소 앞에 서게 되면 황소가 나를 관통하게 내버려둡니다. 무대에서 나는 황소의 음경, 황소의 힘, 그 짜릿한 황홀경에 바쳐지는 음문이 됩니다. 나는 황소에게 사로잡혀 황소의 음경에서 나오는 힘, 동물적 섹스의 어둡고 필사적인 에너지, 사랑의 에너지이자 성역의 에너지로 충만해지고 싶습니다."

 

 

Liebestod © Christophe Raynaud de Lage 1 .jpg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짐승을 도살하는 존재다. 특정 짐승을 우상화하거나 숭배하는 행위조차 지극히 인간적이어서 인간적 행위 이외의 결말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녀는 황소가 자신을 관통하게 내버려둠과 동시에 황소의 힘을 통해 충만해지기를 원한다. 이율배반적이다. 희생제의 속에서는 반드시 제물로 바쳐지는 존재와 그 제물을 바침으로써 권력을 신비화하고 사유화하는 존재가 있다. 그런데 본인을 제물로 바치고 본인이 힘을 얻고자 하는 존재는 무엇으로 규정되는가? 예술은 왜 그와 같은 두 존재의 관계성으로부터 멀어지기만 하는가? 오늘날의 예술은 오히려 관객을 제물로 삼는다.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선언한 '저자의 죽음'을 회상하기 이전에 저자가 정말 존재하는가 등의 문제로 예술적 문제의 층위가 옮겨갔다면 관객은 현대 예술의 상징적 의미를 필사적으로 해석하고 내면화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허망함을 깨닫는다.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관객은 리델의 언어를 깨닫고 이해를 포기한다. <사랑의 죽음. 피비린내가 눈에서 떠나지 않아. 후안 벨몬테.>에는 리델과 다른 인물 간의 대화가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독백이다. 독백이 언어의 신기루인 까닭은 언어가 도리어 발화자를 매혹하고 청자를 배제한다는 사실에 있다. 관객은 그녀의 독백을 모두 감상한 것인가? 그녀의 언어를 듣고 느낀 것인가? 화자의 사유조차 화자의 언어가 사유 가능한 대상이자 결과에 지나지 않을 때 관객은 도대체 무엇을 듣고 사유하는가?


 

청자는 귀 기울인다. 말하는 이가 몰락하지 않고서 완전한 청취란 없다. 화자는 자신의 내부에서 언어의 형태로 불쑥 솟아나와 이동하여, 결국 청자에게로 되돌아가는 말 앞에서 무너진다. 이러한 말의 회귀는, 한편으로는 그 소리의 원천이 공기 중에 소멸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화자 내부에서 모두 불타 버리는 말해진 것을 청자가 침묵으로써 움켜쥐려 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 파스칼 키냐르, <음악 혐오>, p.123

 

 

말은 청자에게로 회귀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후안 벨몬테의 투우 속에서 '사랑의 죽음'은 두 얼굴을 가진다. 연극이 진정 사랑에 빠진 불멸의 여인의 작품이라면, 예술과 연극의 기원에 대해 울부짖는 여인의 사랑이 한 개인의 정열적 투우의 과정 중에 소멸된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여인 내부에서 모두 불타 버린 사랑의 언어를 집단적 제의 중에 관객이 침묵으로써 움켜쥐려 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사랑은 회귀한다. 내가 그녀의 사랑을 갈구하지 않아도 그녀의 사랑이 미지의 음험한 논리에 의해 내게로 돌아올 것임을 안다. 나는 그녀의 언어를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의 결여이며 그녀의 다음 대사만을 기다리는 수동적 객체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 그녀와 함께 제의에 참여했으며 오히려 그녀와 황소 간에 놓여있는 야릇한 공기를 관장한 것은 나다.

 

여전히 그녀의 사랑을 돌려받지 못해 사랑의 죽음을 고백할 수 없는 관객은 그녀의 광기를 말한다. 나는 충격과 불편함으로 인해 중도에 퇴장하는 관객의 뒷모습을 본다. 광기?

 

 

세 가지 세계가 존재한다. 자연계, 정신계, 신계가 그것이다. 인류의 본질도 기능도 고정적이지 않은 자연계를 통과한다. 정신계의 경우 그 본질은 고정적이지만 기능은 가변적이다. 신계는 그 본질이나 기능에서 고정적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물질 숭배, 정신 숭배, 그리고 신의 숭배가 존재하며, 이 세 가지 형태의 숭배는 행위, 말, 기도, 다시 말해 사실, 이해, 사랑으로 표현된다. 본능은 사실을 원하고, 추상은 사고에 관여한다. 신비적 특수성은 종말을 본다. 신비적 특수성은 신을 예감하고 바라본다. 그리고 신을 열망한다.

 

- 오노레 드 발자크, <루이 랑베르>, p.165

 

 

리델은 극장이 신성한 공간이며 투우는 신에게 기쁨을 드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관객이 물질 숭배와 정신 숭배를 목격한 것은 분명하나, 그녀와 함께 신의 숭배를 체험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가능한 일이었을까? 관객은 연극 초반부에 이리저리 움직이고, 발을 구르고, 바닥에 엎드리고, 자신의 피를 확인하는 그녀의 행위(물질 숭배)를 확인한다. 이어서 중반부에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쉬지 않고 언어를 내뱉는 그녀의 분절적이면서도 통합적인 말(정신 숭배)을 확인한다. 특히 사람들이 창녀와 배우 중 창녀를 고른다고 말한 것은 배우가 쓴 가면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정신계에 이미 창녀라는 존재가 살아 숨쉬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행위는 사실과, 말은 이해와 연결된다고 보았을 때 여전히 우리는 깨달음이 이해를 앞질러야 한다는 전제와 더불어 리델이 무대 위에서 투우라는 제의를 통해 자신의 행위와 말을 궁극적인 기도와 영적 체험으로 확장함으로써 종국에는 사랑과 그것의 죽음을 보고자 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녀의 신비적 특수성은 신을 예감하고 바라보았으며 그 신은 사랑이 죽고 난 다음에야 온다.

 

 

Liebestod © Christophe Raynaud de Lage 2.jpg

 

 

그런데 이 지점에서 또 하나의 의문이 제기된다. 리델은 그녀 스스로 자신이 무대 위의 제물과 동격화되고, 나아가 신의 얼굴을 그려보려고 애쓴다며 아무리 강변하더라도 그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영적 체험으로 환원되는 행위, 말, 기도가 관객이라는 존재를 요구하는가? 왜 반드시 관객 앞에서 그와 같은 일련의 의식이 진행되어야 하는가? 사랑의 죽음은 인간의 영역인가, 신의 영역인가?

 

 

이제 비로소 신과 인간과의 관계가 이해된다. 신이 앞으로 있어야 할 모든 것이 아니므로, 인간은 그것을 설정할 수 있다. 그는 세계 속에서 자기 자리를 발견하고, 신과 대면하는 자신의 위치를 정한다. 그리하여 인간에 대한 신의 위치가 드러난다. 독일의 신비론자 앙겔루스 실레시우스의 다음과 같은 글이 이것을 잘 설명해 준다. "내가 신을 필요로 하듯이, 신은 나를 필요로 한다." (...) 우리의 외부에서와 마찬가지로, 내부에서도 우리가 만나는 것은 하느님 자신이 아니다. 땅에 그려진 표시는 그 어떤 천상의 표시도 아니다. 그것은 지상의 누군가가 그려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에 의해 자기를 해명할 수 없다. 오히려 신이 인간에 의해 해명된다. 신의 부름이 들리는 것은 사람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인간이 거기에 응답하는 것은 철저하게 인간적인 기획에 의해서이다.

 

- 시몬 드 보부아르, <모든 사람은 혼자다>, p.54-59

 

 

따라서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신의 길이다. 연극은 하나의 장치가 되어 관객들까지 동원한 무대 위 제의가 신비적 특수성을 향해 배태한 방향성은 리델이라는 제물을 매개로 하여 최종적으로 신에게 낙착한다. 그러나 리델이 연극의 기원과 경이로움, 깨달음 따위를 설명하고자 신과의 대면을 희구했을 때 신 역시 그녀를 필요로 한다. 황소를 마주한 것이 아니라 신을 마주한 것이다. 신은 황소나 그녀보다 먼저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몰랐던 것은 관객뿐일까. 그래서 관객에게는 또 하나의 길이 놓여 있다. 관객이 무대 위에서 확인했던 그녀의 행위, 말, 기도는 철저하게 인간적인 기획이라는 것. 그녀는 자신조차 외부에서도 내부에서도 만날 수 없는 신을 관객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녀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발언들로도 자신을 해명하는 데 실패하겠지만 동시에 신에 의해 자신을 해명할 수도 없다. 지상에서 불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은 불온하지만 매혹적인 일이다. 그러나 신이 인간에 의해 해명되는 순간은 천상의 것이며 사랑의 죽음 역시 그곳에 속한다. 만일 누군가가 그 순간을 목도했다면, 그는 샤머니즘 속의 악령과 조우했거나 혹은 한 명의 미친 여자를 보았던 것이다.

리델이 관객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의 경계와 본질도 이러한 인간적 기획의 태생적 한계와 다르지 않다. 그녀는 줄곧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그녀가 관객들에게 보여주고자 한 혼령과의 대화일까. 나는 그녀가 해명하고자 하는 신을 알지 못한다. 그래도 괜찮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그르니에는 <존재의 불행>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상급이 인간에게 도달할 수 없는 것이 되는 순간부터 비교급은 의미를 잃게 된다." 신에게, 연극의 기원에,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비극에, 후안 벨몬테의 영적 투우에 도달할 수 없는 자는 나 뿐만 아니라 그녀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적어도 그녀만의 무대 위에서 그녀는 후안 벨몬테와는 비교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는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도 다른 것들과 함께 죽는다. 말하는 이가 몰락한다. 나는 무엇도 듣지 못하는 완전한 청취를 상상한다. 나는 그 속에서 그녀의 유언을 듣는다.

 

 

화장火葬 전에도, 동안에도, 후에도, 음악 없이. 철망에 매달린 매미조차 없이. 만약 좌중에 누군가 눈물을 흘리거나 코를 풀었다면 모두가 그에게 불편함을 느낄 것이며, 음악으로 감출 수도 없을 것이기에 불편은 더욱 커질 것이다. 나는 나로 인한 당혹에도 자리를 지킬 이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음악보다도 그 불편이 더욱 마음에 든다. 그 어떤 끈질기게 괴롭히는 소리도 없이. 어떤 예식도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노랫소리가 드높아지는 일도 없다. 어떤 단어도 발음되지 않는다. 누구도 그 무엇을 전기를 이용해 재생할 수 없을 것이다. 포옹도, 멱을 딴 수탉도, 종교도, 윤리도 없이. 심지어 관습적 행동도 없이. 사람들은 침묵하는 것으로 나에게 작별을 고할 수 있을 것이다.

 

- 파스칼 키냐르, <음악 혐오>,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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