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여름을 좋아하게 됐다. 혹자는 후덥지근하고 끈적이는 심상이 떠오를 테고 나 역시 그로부터 자유롭진 않으나, 그 모든 불쾌를 씻어내리는 쾌청함이 내 여름 속엔 있다. 물. 맨몸 사이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물의 감촉을 상상할 때면 왜인지 맑은 호흡을 할 수 있다. 불안을 정화하는 투명한 손길이 결국 이 계절을 애원하게 한다.
<보이 인 더 풀>은 순전히 물에 대한 애정으로 선택한 영화다. 지긋한 추위는 가고 수영을 즐길 수 있는 계절을 목전에 두고 있으므로 여름을 닮은 이야기로 예열하고 싶었다. 기대는 훌륭히 충족됐고 동시에 훌륭히 배반됐다. 너무 염원한 나머지 외면하고 있던 진실을 목격해 버렸기 때문이다. 여름의 얼굴은 대개 장마처럼 우중충하다는 걸. 우리가 주고받은 어떤 얼룩은 거센 장맛비로도 결코 씻기지 않는다는 걸.
성장의 재료는 시간이 아니다
이 이야기를 설명하는 중요한 골자는 ‘성장’으로 보인다. 영화는 ‘석영’과 우주’의 초등학생 시절부터 고등학생 시절까지 모습을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으로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잔잔한 분위기를 표방하지만 그들은 가히 격변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뒤엉키며 자라난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과 타인의 낯선 욕망을 마주하고 서툴더라도 다루고 감내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보편적인 성장을 다루는 이 이야기가 뻔함보단 매력에 가까웠다고 생각하는데, 성장의 촉매를 시간이 아닌 ‘물갈퀴’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나는 성장의 주재료가 시간이 아니라고 믿는다. 시간은 그저 던져진 조건이며 어떤 경험을 어떻게 통과하느냐에 따라 수없이 비틀어진다. 제각기 다른 길이와 부피를 가진 시간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거다. 그건 당사자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이기에, 성장은 점진적으로 늘어나는 게 아니라 홀연히 어떤 좌표에 위치하게 되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이런 양상이 성장의 본질이라면 그것은 시간 그 자체가 아니라 시간을 변형시키는 무언가에 의해 이뤄지는 거다.
영화에서 강조하는 매개는 우주의 발에 붙어있는 물갈퀴다. 인간이라면 갖고 있지 말아야 한다고 여겨지는 잉여의 신체 부위를 우주는 갖고 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감춘다. 자신의 ‘결격’을 감추기 위해 그것이 유일하게 빛을 발할 수 있는 수영장에서도 수영을 하지 않고 어쩔 수 없을 땐 양말을 신는다. 누군가 비밀에 다가오기 전부터 이미 저 멀리 도망가 버리는 게 습관이 되어있는 거다. 그는 스스로를 세상의 변두리에 머물게 해야 한다는 걸(혹은 머물 수밖에 없다는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이때 우연히 우주의 비밀을 알게 된 석영의 태도가 눈에 띈다. 석영은 그의 물갈퀴를 두려워하거나 힐난하기보단 궁금해하고 다가가고 싶어 하는데, 아이의 순수함 따위의 말로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맹렬하게 비밀에 닿고 싶어 하는 그녀의 태도를 설명할 수 없다. 석영은 우주의 비밀을 알고 싶어한다기보단 필요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그녀 역시 숨겨야 할 비밀을 갖고 있어서다. 비밀이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곳은 또 다른 비밀의 옆이니까.
석영은 집안 사정으로 원치 않는 시골살이를 하게 됐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모부의 불안정한 관계도 결정적인 이유로 보인다. 초등생에게 화목하지 않은 가정이란 타인에게 들켜서는 안 될 비밀임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석영 역시 비밀이 비밀이 아닐 수 있는 곳 혹은 비밀이 비밀로 남아도 괜찮은 장소가 필요했던 사람이다.
우주와 석영은 자신들의 비밀을 재료 삼아 그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천진하게 유영한다. 그러면서 자신과 타인을 구성하는 특성, 환경을 인식하고 다루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됐을 거다. 상대에게 적절한 존중을 제시하려는 고민 속에서 성장이 움튼 거다.
물갈퀴가 없으면 정정당당한 걸까
우주를 아끼는 석영이지만 그를 마냥 좋아할 순 없었다. 석영은 오래도록 수영선수를 꿈꿔왔는데, 물갈퀴가 없는 자신의 노력이 물갈퀴를 가진 우주의 노력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오랜 꿈을 포기한 것, 그 후 깊은 체념의 태도를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단연 우주의 물갈퀴다. '물갈퀴 없이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자’는 석영의 말은 우주에 대한 애정과는 별개로 작동하는 박탈감, 질투, 선망 등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녀가 계속해서 우주를 애정하기 위해선 위와 같은 도발과 승부가 필요했을 것이다.
석영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나는 그 말이 우주에게 얼마나 폭력적으로 각인되었을지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선천적 원인이든 후천적 원인이든(그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물갈퀴는 우주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한 부분이다. 그런 ‘물갈퀴 없음’이 ‘정정당당’으로 귀결될 수 있다면, ‘우주의 존재 자체’가 ‘정당하지 않음’으로 귀결될 여지가 다분해진다. 그러니까 우주가 세상에 소속될 수 있는 건 오직 본인의 일부를 지워냈을 때라는 거다. 없애거나 하다못해 숨기지라도 않으면 그가 소속되지 못하는 건 건 순전히 그의 ‘선택’과 책임이라는 선언과 같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주는 단 한 번도 선택권을 가져본 적 없다. 물갈퀴는 우주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킨 자물쇠인 동시에 세상과 연결시킨 열쇠다. 물갈퀴로 인해 친구가 생겼고, 수영 선수가 됐고, 세상은 그를 열망했다. 동시에 물갈퀴로 인해 세상은 그를 야유했고, 수영 선수 자격을 박탈했고, 친구를 잃었다. 그 모든 상황을 결정한 건 우주가 아닌 우주의 외부였다. 우주는 언제나 똑같이, 그저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을 뿐이다. 자기가 가진 물갈퀴의 온당함이 항상 자기 외적인 것에 의해 결정됐던 우주에게 물갈퀴는 얼마나 자신의 일부일 수 있었을까. ‘물갈퀴 없이 정정당당하게’라는 말이 부당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런 맥락에서 트랜스 젠더 선수의 대회 출전 여부를 둘러싼 논의가 떠오른다. 트렌스 젠더(대부분 MTF) 선수의 신체적 특성이 ‘다른’ 신체와 비교했을 때 정정당당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우주를 향한 시선과 상당히 비슷하다. 신체적 타고남의 정도와 그것을 개인의 노력과 구별하는 경계의 모호함, 성적이 저조한 트랜스 젠더 선수의 경우 이러한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아이러니 등 다양한 얘기를 할 수 있을 테지만 이 지면에서 다루기엔 양적인 한계가 있다.
다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건, 논의의 중심에 선 당사자들은 정작 자신의 신체에서 누구보다 멀어진 객체로 전락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나 아닌 존재의 존폐를 결정할 권한이 우리에게 있는지, 무엇보다 동료 시민을 배제하면서까지 유지되어야 하는 오락의 가치와 타당성에 대한 의문은 항상 은폐된다는 사실이다.
시련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건 누구인가
아이러니하게 우주의 비밀을 폭로한 건 석영이다. 우주를 향해 복잡하게 뒤엉킨 마음의 조각이 날카롭게 튀어나온 거다. 그 조각은 석영이 예상하지 못한 깊이로 우주를 찔렀다. 우주는 스스로 물갈퀴를 잘라낸다. 자기의 일부를 결국 거세(당)한다. 그럼에도 물갈퀴가 ‘있었다’는 이유로 수영선수로 활동하지 못하게 된다.
영화는 곧장 몇 년 뒤로 시간을 옮긴다. 관객은 석영과 우주가 어떤 시간을 거쳐 어떻게 성장했는지 알 수 없다.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내 추측은 이렇다. 한순간 석영은 타인의 특성을 적절히 다루지 못했지만, 그를 통해 분명 성장했을 거다. 쓰디쓴 시련이 그녀를 더욱 무겁고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을 거다. 과거의 자신을 결코 용서하지 못할 수 있으나, 그 자체로 그녀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는 거다.
우주 역시 크고 작은 변화를 통과하며 살아냈을 거다. 어쩌면 단단히 박힌 굳은살 덕분에 고통을 참아낼 맷집이 늘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주의 영혼 어느 한 꼭지는 완전히 성장을 멈췄을 거다. 아무리 애써도 메꿀 수 없는 구멍이 생겼을 거다. 스스로의 손에 거세당한 물갈퀴는 선명한 상흔을 남겼을 테니까. 그건 석영을 용서하는 것, 그녀와의 관계를 재건하는 것과 별개의 영역이다. 그는 더 이상 어떤 안정에 머물 수 없을 거다. 아픈 진실이지만 시련은 공평하지 않다.
해서 <보이 인 더 풀>을 단순히 성장 서사로 갈무리하는 건 무책임하다고 느낀다. 적어도 ‘성장’이란 말을 온당히 사용할 수 있는 건, 이 영화가 무엇이 성장을 촉진시키는지를 증언하는 ‘성장 서사’인 동시에 무엇이 성장을 완전히 단절시키는지를 고발하는 ‘반反성장 서사’임을 동시에 인식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