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입학도 하기 전, 유치원에서는 그림일기가 숙제였다. 내 그림 일기장의 표지에는 만화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고, 내지의 위쪽 절반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무지로, 아래쪽 절반은 글을 쓸 수 있는 원고지(라기보다는 아직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이 쉽게 글자를 쓸 수 있게 돕는 큰 칸)로 채워져 있었다. 처음 그림일기를 썼을 때-아니 쓰고 그렸을 때-나는 그림 칸에는 그리고 싶은 그림을, 글 칸에는 쓰고 싶은 글을 각각 썼다. 가지고 싶은 물건들을 그리고, 그림일기를 쓰는 첫 소감을 썼던 것 같다. 이후 엄마가 그림일기는 그림과 글이 같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기에 다음 일기에는 유치원 실내 놀이터에서 거미를 보고 놀랐던 경험을 썼다. 그때는 그림도 글도 거미 이야기를 했다.
난 그때도 그림과 글 둘 다 좋아했던 터라 그 두 가지를 같이 만들어야 하는 일기가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리고 쓸 공간이 너무 적다며 엄마에게 불평한 기억도 있다. 지금도 여전히 그림과 글과 가까이 살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어쩐지 그 두 가지를 같이 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림일기와는 또 다른 개념이지만, 이 두 가지를 같이 하고 있는 것 중 하나로는 그림책이 있다. 최근 그림책에 관심을 두다가 이번에는 <그림책 만들기 7단계>를 읽어 보았다.
표지도 그렇지만 목차에도 동심이 묻어나는 게 보인다. 1단계는 그림책 ‘산책’, 2단계는 아이디어 ‘심기’, 3단계는 한 장면 ‘싹틔우기’, 이어서는 이야기 ‘가꾸기’, 스토리보드 ‘줄기 잡기’, 그림 ‘꽃피우기’, 마지막으로는 열매 ‘맺기’. 억지스러운 표현 없이도 자연스럽게 그림책 한 권을 완성하는 과정을 텃밭에서 구슬땀 흘려 소박하지만 알찬 과일을 얻는 과정으로 나타낸다.
일곱 단계 중 가장 의외였던 것은 마지막의 ‘열매 맺기’ 단계. 그림과 글을 완성하면 끝인 줄 알았는데 ‘책’이라는 것을 펴내는 것은 그 이상의 과정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텍스트 중심의 책은 시각적인 것에 관해서는 출판사와 디자이너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그림책은 다르다. 열매 맺기 단계에서는 표지의 구성과 구도는 어떻게 할 건지, 작가 노트는 어떻게 쓰는지를 이야기한다. 구체적인 내용을 위해서는 다른 서적을 읽어볼 것을 추천하기는 하지만 인쇄와 제작에 관한 내용까지 간략하게나마 포함한 것도 특이하되 지극히 현실적이다.
현실성, 아니 실현 가능성은 이 책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다. <그림책 만들기 7단계>는 이 7단계를 그냥 보여주기보다는 직접 실천하게끔 돕는 것이 목표다. 기본과 심화 과정으로 나눠진 이론과 사례에 더해, 머리를 환기할 수 있는 ‘생각해 보기, 수업 팁’, 그리고 직접 만들기의 첫 단추가 될 ‘실전 과제, 활용 팁’ 코너가 들어 있다. 외에는 이 책을 쓴 두 그림책 작가, 윤나라 작가와 이서연 작가의 그림책에 관한 생각을 대화 형식으로 수록한 ‘작가들의 대화’ 코너가 재밌었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구분되어 있긴 하지만 둘 다 그림책 작가인지라 인터뷰 속에서 자연스럽게 대화하며 인터뷰이가 질문하고 인터뷰어가 답변하는 때도 있었는데, 두 작가의 비슷하고 때로는 상이한 의견을 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림책과 관련해 다양한 경험을 쌓은 두 사람이 만나 의기투합한 만큼, 기존 그림책 만들기 수업에서 아쉬웠던 점을 적극 개선한 것이 이 책이다.
일반적으로 8~12주 사이로 진행하는 공공기관의 그림책 만들기 수업은 이야기를 먼저 글로 구상하고, 그 글에 맞는 장면을 그리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하지만 더 좋은 그림책 만들기 수업을 위한 제안과 지향점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엄밀히 말해 그림책이라는 장르의 문법을 보다 잘 구현하는 그림책이란, 그림이 곧 이야기 전개 주체가 되는 그림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림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림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시도가 더 많이 이뤄져야 합니다.
(그림책 만들기 7단계, p.9)
그림책 만들기 수업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나도 막연히 이야기를 글로 먼저 짓고 그에 맞는 그림을 한 장씩 갖다 붙이는 형식을 상상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책은 그림책이 아니라 그저 삽화가 많은 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그림이 중심이 되는 그림책을 만드는 법을 알려준다. 이렇게만 말하면 ‘그러면 그림을 먼저 완성하고 글을 붙이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그림과 글, 그리고 책의 물성을 포함해 세 매체가 서로 작용하며 만들어지는 것이 그림책이기 때문에 만들기 과정 또한 ‘글 단계’나 ‘그림 단계’ 따위로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독자가 글과 그림을 오가며 그림책을 즐기듯 작가도 두 가지를 오가며 그림책을 짓는다. 심지어는 이 책에서 제시하는 7단계조차 선형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게 움직이기를 권장한다.
‘글, 그림, 책’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관여하는 매체라는 점에서, 그림책을 만드는 과정은 선형적이지 않습니다. 다음의 예시 이미지처럼 특정한 단계를 뛰어넘거나 거꾸로 진행되기도 하며, 단계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식으로 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아이디어나 콘셉트가 명확한 경우 어떤 단계는 생략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가장 잘할 수 있고 가장 관심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 영역에 집중해서 발전시키는 게 좋습니다.
(그림책 만들기 7단계, p.12)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은 ‘오목볼록별 이야기’이다. 정말 어렸을 때 읽은 책인데 가끔 이 책이 생각나는 순간들이 있다. 손이 ‘오목’하게 생긴 오목나라 사람들과 손이 ‘볼록’하게 생긴 볼록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들은 손이 다르다는 점 하나 때문에 서로 싫어하며 살다가 손이 다르다는 점 때문에 서로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사이가 좋아진다.
‘오목’과 ‘볼록’으로만 표현하면 이해가 잘 가지 않겠지만 ‘오목’ 손은 레고 손처럼 오목하게 생겼고, ‘볼록’ 손은 도라에몽 손처럼 볼록하게 생겼다. 이걸 또 말로 표현하면 재미가 없는데, 그림으로 보면 직관적으로 전해지고 이 그림책의 가장 중요한 장면도 정말 짜릿하게 느껴진다. 아마 글 먼저 쓰는 방식으로 책을 만들었다면 이런 재밌는 상상력이 가득한 책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 그림책의 작가가 이 <그림책 만들기 7단계>를 보고 책을 만들었을 리는 없지만, 여기서 말하듯 선형적이지 않은 작업 과정을 거쳤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꼭 내가 그림책을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라도, 내가 그동안 읽은 그림책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상상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는 흥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