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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사라진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것을 선명하게 드러나게 만든다. 함께할 때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존재들이 사라진 후에야 우리 안에 남긴 자국을 드러낸다. 작품 속 인물들은 누군가 사라지면서 자신 안에 남은 감정과 기억을 마주하게 되고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깨닫는다. 뮤지컬 《배니싱》은 이처럼 ‘사라짐’을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를 드러내는 과정으로 그려낸다.

 

'Vanishing'이라는 제목은 단지 육체적 죽음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살아 있으면서도 존재를 부정당하고 외면당하는 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대 위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기억에서조차 지워지는 것을 의미하며 작품은 그 과정을 세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깊게 파고든다.

 

이 세 인물의 이야기는 영원한 생명을 지닌 뱀파이어, 케이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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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니싱》이 그려낸 사라짐의 방식


 

케이는 죽지 않는 존재, 뱀파이어로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은 존재였지만 그 삶은 끝없는 고독의 연속이었다. 작품 속에서 케이는 한 인간 의학도에 의해 실험의 대상으로 붙잡히고 병원과 권력의 논리에 의해 연구 대상으로 전락한다. 두려움과 탐욕, 호기심 속에 타인의 대상이 되어버린 케이는 점점 더 세상에서 투명한 존재가 되어간다.

 

명렬은 사라짐을 누구보다도 두려워하는 인물이다. 그는 경성의 병원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자신의 권력과 위치를 지키려 애쓴다. 케이가 가진 특별한 능력을 이용해 더 큰 힘을 얻으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점점 인간다운 모습을 잃어간다. 명렬은 기억되고 남고 싶어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선택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스스로를 더 빠르게 지워나가게 만든어 권력만을 좇은 인간의 허무함을 보여준다.

 

의신은 젊은 의학도로 과학적 호기심에 대한 욕망으로 케이를 실험 대상으로 삼는다. 처음에는 케이를 비인간적인 존재로만 여기지만 시간이 지나며 케이의 고통과 외로움에 조금씩 공감하게 된다. 그러나 의신의 깨달음은 너무 늦게 찾아온다. 케이가 사라진 이후에야 그는 자신의 선택이 무엇을 잃게 했는지 절실히 깨닫는다.

 

 

 

사라짐 이후 남겨진 것들


 

《배니싱》은 사라짐을 단순한 상실로 그리지 않고 존재를 다시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로 확장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쉽게 관계를 외면하고 존재를 잊으며 살아가는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사라진 이들의 흔적은 남겨진 이들의 책임으로 남아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방식으로 마음에 새겨진다. 작품은 누군가 사라진 이후 남겨진 이들의 기억과 감정, 그리고 책임까지 함께 나타내어 사라짐이 단순히 한 존재의 부재가 아니라 그 존재를 둘러싼 관계의 흔적까지 지워가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사라짐을 품은 공간


 

《배니싱》이 일제강점기 경성을 배경으로 삼았다는 점은 처음엔 다소 생소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공연을 보고 나니 이러한 설정은 단지 시대적 장치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배니싱》의 공간적 배경은 단순한 역사적 배경이 아니라 기억에서 사라진 존재들, 실종된 정체성에 대한 은유적 메시지를 전달하여 '사라짐'이라는 테마에 무게를 더해주는 장치로 작용하였다. 경성이라는 공간은 겉으로는 근대의 모습을 갖췄지만 속은 식민 권력과 억압으로 얼룩진 시대였다. 이름도 없이 사라진 이들, 기억조차 남지 못한 존재들이 가장 많았던 그때 뱀파이어로 상징되는 ‘사라진 자들’의 서사가 그 시공간 속에서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특히 권력을 쥔 ‘명렬’의 선택은 당시 억압적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사람들의 현실을 떠올리게 하며 그 속에서 인간다움이 얼마나 쉽게 지워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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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란 단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남겨진 기억과 관계 속에서 비로소 증명된다. 살아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진심과 곁에 있었기에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소중함이 사라진 자리를 통해 조용히 드러난다.

 

사라졌기 때문에 비로소 인식되는 가치, 잊히는 과정 속에서 다시 질문하게 되는 존재의 의미.

 

《배니싱》은 이 조용한 과정을 통해 우리가 바라보는 것과 잊히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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