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눈썹에 헝클어진 머리, 까만 눈동자와 까만 옷. 머리부터 발끝까지 느낌표를 찍은 듯한 그녀, 그 이름도 강력한 그녀는 ‘견고딕걸’이다. 단단한 글씨체만큼이나 또렷한 눈빛은 세상을 향한 반항으로 번뜩인다.
그녀는 외친다.
“내 인상, 내 인성, 내 인생에 신경 끄라고!”
하지만 이 외침 아래에는 기구한 사연이 숨겨져 있다.
연극 <견고딕걸>은 2022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선정된 작품으로, 극단 작은방과 두산아트센터가 공동 기획했다. 다섯 명의 배우와 세 명의 라이브 세션이 긴장감 있는 서사를 만들어 간다. 더불어 노래와 자막, 조명 등의 감각적인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강렬한 비유와 트렌디한 언어, 생생한 감정의 결들이 무대 위를 채웠다.
가해자의 가족이 된다는 것
견고딕걸의 이름은 수민. 그녀는 일란성 쌍둥이 자매인 수빈과 함께 태어났다. 그러나 어느 날, 수빈이 친구를 지하철 선로로 밀어버리는 사건이 벌어지고, 직후 그녀 또한 목숨을 끊는다. 가해자는 사라지고, 남겨진 가족들은 돌이킬 수 없는 구덩이 속으로 빠져든다. 극은 이 사건 이후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가해의 여파는 가해자 가족의 삶에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특히 가해자가 사라져 버린 상황은 비극을 더 강화한다. 그들은 수많은 오명과 사회적 낙인, 죄책감을 견디며 각자의 방식으로 고통을 감내한다. 어머니는 분석에 집착하고, 아버지는 무력하게 침묵하며, 수민은 까만 후드와 무표정으로 자신을 감춘다.
하지만 이 가족은 결코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다. 극 중 수민의 부모인 진희와 우철은 지극히 평범하고, 때론 너무 평범해서 문제의 핵심을 피해 가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이 지점에서 묻게 된다.
“정말 이 모든 일이 가족의 탓일까?”
나는 이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의 심연으로 깊이 들어간다. <견고딕걸>은 가해자의 행동 원인보다는 그 가족들이 겪게 되었던 차갑고도 참담한 비극 안에서 상치되는 다양한 감정들을 마주할 수 있는 극이었다.
#1 검정색 뒤에 숨겨진 순수함, 수민
검정 볼펜처럼, 견고딕체처럼 단단하고 무거운 수민. 하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녀는 내면이 여린 소녀다. 검은 모자 속 조심스러운 눈망울, 후드티 속 숨겨진 아이 같은 마음. 나는 수민을 보며 자주 잊곤 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누군가의 강한 말투, 무뚝뚝한 행동, 무표정 속에는 언제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는 걸.
ⓒ김솔
수민은 수빈의 ‘쌍둥이’라는 이유로 학교를 떠나야 했고, 가정 안에서도 감정의 빈틈을 메우는 역할을 해왔다.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이 되어야 했기에, 자기 자신을 돌볼 겨를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수민의 까만 옷과 헝클어진 머리는 무너진 삶 속에서 겨우겨우 자신을 지켜낸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2 책임감으로 죄책감을 버티는 사람, 진희
이 연극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인물은 진희였다. 진희는 두 쌍둥이의 엄마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커리어우먼이다. 그녀는 엄마로서의 책임감과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며, 자식이 치르지 못한 죗값을 자신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런 메시지도 남기지 않은 수빈의 행동을 거꾸로 쫓아가며 분석한다. 감정을 애써 외면하고, 모든 것을 구조화하려 했다. 그게 참 진희 같기도 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슬픔을 드러내기보다, 슬픔을 견딜 방법을 먼저 찾아 헤매니까.
ⓒ김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나는 무엇을 놓친 걸까?’
마침내 그녀가 찾은 답은 아스퍼거 증후군. 그러나 그녀는 사실 원인을 해명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답이 없는 지난한 여정 속에서, 깊은 굴을 헤매던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마음과 마주한다.
‘나, 수빈이 보고 싶어 해도 될까?’
이 한 문장이 그렇게 아팠다. 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두고 살아온 시간,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슬픔을 유예했던 날들. 그리고 감정을 허락한 순간 나온 한마디에는 진한 그리움이 묻어나 있었다. 정작 그녀가 원한 건 이해가 아닌, 용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죄를 대신 짊어지려 했고, 자신을 희생하며 모범적인 유가족이 되려 했지만, 결국 그녀도 단지 자식을 잃은 엄마였다. 그 감정을 인정하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3 삶이 연결된 타인들, 미나와 현지
미나와 현지는 혼자였던 수민의 삶에 혜성처럼 등장한 재기발랄한 친구들이다. 이들은 생판 남이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피해자가 세상을 떠난 그날, 살아남은 존재들이었다. 미나는 피해자에게서 눈을 받았고, 현지는 심장을 받았다. 그들의 몸에는 죽은 자의 일부가 살아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피해자의 부모를 향해 떠나는 여정을 걷게 된다.
ⓒ김솔
삼총사는 여정 속에서 각자의 사정을 터놓으며 서로의 부족한 점을 메우고, 또 채워준다. 하지만 이 여정의 끝, 피해자의 부모를 만나러 가는 것은 수민이었다. 현지는 버스를 타기 직전 동행을 포기하고, 미나는 먼 발치에서 수민을 응원한다. 결국 수민이 홀로 남아 피해자의 부모 앞으로 나아간다. 그녀는 혼자 피해자의 부모를 찾아가고, 자신이 지닌 삶의 무게를 견디며 용서를 구하려 한다.
검정이 만든 여백 — 비극에도 흰 점을 찍을 수 있다면
연극 <견고딕걸>은 가해자를 이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대신, 가해자의 ‘남겨진 자들’에 대해 질문한다. 가해자의 가족들이 마주한 현실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며, 사회가 찍는 낙인, ‘함께 죄를 진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각자만의 사정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김솔
가해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지만, 그 잔흔 속에도 사람은 살아간다. 그리고 그 삶은 끝까지 검정색일 수 없다. 언젠가는, 그 안에도 작고 환한 여백이 생겨난다.
가해자의 가족은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떤 말로 살아가야 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할 자격이 있을까?
이 질문들은 불편하고, 때론 불공평하지만, 아주 현실적이다. <견고딕걸>은 누구를 위한 해명이 아니다. 또 누구의 용서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 연극은 끝까지 살아내는 사람들,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이름을 안고도 계속 걸어가는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