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발레단이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2025년 4월 18일부터 27일까지 발레 <지젤>을 올린다. 이성 대신 감성을, 초자연적인 것을 중시하는 낭만주의 사조의 영향을 받은 발레 <지젤>(Giselle)은 테오필 고티에가 독일의 유명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독일, 겨울 이야기」 속 춤을 사랑하는 소녀가 죽고 귀신이 된다는 독일의 전설 ‘윌리’라는 존재를 차용해서 베르누이 드 생 조르주와 함께 대본을 구상한 작품으로, <해적>의 작곡가 아돌프 아당의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장 코랄뤼와 쥘 페로의 안무로 1841년 프랑스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지젤>의 배경이 되는 라인 강이 프랑스와 독일의 경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과 그 당시 발레의 중심이 프랑스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독일 배경에 프랑스 색채가 합쳐져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윌리와 맞닿아 있는 죽음의 모티프를 고려한다면 프랑스어에서 ‘죽음’은 여성 명사(La mort)이지만 독일어에서 죽음은 남성 명사(Der Tod)다.
또한 프랑스가 혁명 시기를 거치며 러시아로 발레의 중심이 옮겨간 이후 발레 <지젤>은 러시아 발레단에서 주로 공연되었는데, 원작 안무가 소실되어 마리우스 프티파가 안무한 키로프 발레단(현 마린스키 발레단)의 버전이 한국 유니버설발레단에 수입되어 현재 5대 예술 감독 올렉 비노그라도프와 현 예술감독 유병헌의 연출로 공연되고 있다. 유니버설발레단이 1985년 3월 <지젤> 초연을 서울 리틀엔젤스예술회관(현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올린 이후, 발레 <지젤>은 <호두까기인형>, <백조의 호수>와 함께 유니버설발레단의 핵심 레퍼토리로 자리잡았다.
마을의 정경 속에서 펼쳐지는 사랑과 비극적 결말, 1막
발레 <지젤>의 배경은 중세 라인 강가의 한 농촌 마을에서 시작한다. 서곡이 끝난 후 시골 마을의 정경 속에서 지젤을 짝사랑하는 힐라리온, 그리고 시종 윌프레드의 만류 속에서도 귀족 옷을 벗고 평민의 외양을 한 알브레히트의 앙트레(entrée)로 극이 시작한다. 그 이후 집에서 나온 지젤의 앙트레는 지젤의 순진하고 명랑한 성격을 음악과 안무로 형상화한 것 같다. 지젤과 알브레히트는 발레의 고전으로 꼽히는 작품들이 다 그렇듯 순식간에 사랑에 빠지고, 그 둘이 데이지 꽃잎을 따며 치는 꽃점 역시 둘의 순수한 사랑을 보여준다. 하지만 결국 ‘사랑하지 않는다’가 나온 꽃점의 결과와 지젤의 심장이 약하니 춤을 추지 말라고 하는 지젤 어머니의 마임은 평화로워 보이는 분위기 속에 묘한 불안과 긴장감을 암시한다.
이때 사냥을 하러 나온 귀족들과 알브레히트의 약혼자, 바틸드의 등장은 이러한 불안의 기폭제다. 바틸드와 지젤이 알브레히트라는 ‘매개변수’ 속에서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귀족 아가씨와 평민 소녀로 대면해 다소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는 호기심을 보여주는 지젤을 향해 바틸드는 자신의 계급 의식 속에서 기인하는 선의와 시혜적 호의의 일환으로 자신의 목걸이를 지젤에게 선물한다. 이때 이 작품은 고전이 다 그러하듯 서사의 전개가 멈춰지고, 바틸드를 비롯한 귀족들의 퇴장 속에서 포도 농사의 풍작을 기념하는 축제 속 농민들의 평화롭고 활기찬 춤을 묘사하는 것에 집중한다. 축제에서 포도 아가씨/여왕로 선발된 지젤의 모습과, 유니버설발레단이 개정한 패전드(peasant) 파 드 시스(6인무) 역시 관객들이 집중해야 할 포인트 중 하나다.
1막에서 발레 <지젤>을 감싼 불안이 하나의 사건으로 터져나오는 장면은 검을 사용하는 알브레히트의 습관을 눈치채고 그가 귀족이라는 사실을 추론한 힐라리온이 피리를 불어 귀족들과 사람들을 불러모르고, 모두의 앞에서 알브레히트의 정체를 폭로하며 발생한다. 지젤은 바틸드의 손에 키스를 하는 알브레히트의 모습을 보고, 알브레히트가 바틸드의 약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 <지젤> 1막의 하이라이트인 매드 씬(Mad Scene)이 시작된다.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도 나타났듯, 고전적인 성격이 강한 발레에서 발레리나가 머리를 풀고 머리카락을 드러내는 것은 캐릭터가 광기에 휩싸였다는 것, 혹은 광기와 비견될 만한 슬픔에 휩싸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알브레히트의 방관 속에서, 지젤은 알브레히트의 칼을 자신에게 겨누려고 하거나, 바틸드를 보고 미친듯이 웃거나, 꽃잎을 따던 과거의 자신의 행위를 반복한다.
‘매드 씬’에서 지젤 역을 맡은 발레리나는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 순진한 시골 소녀에서 광기에 휩싸여 죽어가는 여자로의 연기 변신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지젤’은 테크닉적인 측면이나 연기적인 측면이나 많은 무용수로서의 역량을 필요로 한다. 알브레히트의 방관과 귀족들의 외면, 힐라리온의 당황 속에서 어머니에게 안긴 지젤은 마지막으로 알브레히트를 마주한 채 그의 품 안에서 죽는다. 지젤이 심장이 멈추고 죽어가는 1막의 후반부는 <라 바야데르>에서 독사에 물린 니키아의 죽음과 함께 끝나는는 2막이 생각나는 장면이지만, <지젤> 1막은 지젤이 죽은 후에도 슬퍼하는 어머니가 알브레히트를 원망하는 장면과 서로를 탓하는 알브레히트와 힐라리온의 싸움까지 빠르게 지나가며 막을 내린다.
윌리가 된 지젤과 윌리들의 발레 블랑, 2막
2막의 막이 오르자 농민들이 살던 시골 마을의 정취는 사라지고 지젤이 묻힌 공동묘지가 무대 위에 자리하며 분위기가 급격히 전환된다. 죽은 지젤을 애도하기 위해 찾아온 힐라리온과 알브레히트, 그리고 곧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암시를 위한 무덤가를 뒤덮는 불빛은 지젤의 묘지를 찾아온 힐라리온과 알브레히트에게 닥칠 운명을 암시한다. 어둡고 적막한 무대 위, ‘윌리’(willis)의 여왕 미르타가 마치 영혼처럼 등장하며 로즈마리를 통해 다른 윌리들을 깨운다. 남자에게 버림받아 죽은 처녀 귀신인 윌리는 새벽녘에 무덤가를 거니는 남자들에게 춤을 추게 해서 죽도록 만드는 신비로운 존재이며, 또 다른 낭만 발레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라 실피드> 속 공기의 요정이라는 초자연적인 정령과 귀신이라는 존재성과 하얀 로맨틱 튀튀라는 외양을 공유하지만 정확한 결말은 다르다. <라 실피드> 전막 속에서 남자 주인공 제임스가 마녀에 꾀임에 빠지는 바람에 공기의 요정이 죽음을 맞게 되는 결말이 지젤 1막의 내용과 유사하다면, 지젤 2막에서는 배신당해 죽은 지젤에게 ‘윌리’가 될 기회를 부여한다. 미르타가 불러들인 윌리들 사이에서 무덤 십자가가 회전하는 유니버설발레단만의 연출을 통해 새롭게 등장한 지젤이 앙트레(entrée)에서 빠르게 턴을 도는 모습을 보면, 1막의 춤을 추면 심장에 무리가 가는 지젤이 자신의 육체성을 탈피하고 그러한 구속을 받지 않는 윌리로 거듭났음을 알 수 있다.
2막의 하이라이트는 미르타와 윌리들의 춤과 지젤의 등장, 상당히 빠른 템포로 진행되는 윌리들에 의한 힐라리온의 죽음, 그리고 미르타에게 춤을 추길 강요받는 알브레히트와 그를 지키려는 지젤의 그랑 파드되다. 윌리와 무덤가라는 공간은 1막에서 지젤을 구속했던 젠더와 신분이라는 모든 규범과 질서들이 급격하게 반전되는 곳이다. 심장이 약해서 춤을 추면 심장이 멈추는 상황 속에서 힐라리온에 의해 알브레히트가 신분을 속였음을 알게 되고 미쳐 춤을 추다 죽은 지젤의 상황은 윌리의 여왕 미르타에 의해 춤을 추라는 명령을 받는 힐라리온과 알브레히트에게 그대로 부착된다. 낮과 밤, 일상과 무덤가라는 시공간의 경계 속에서 급격한 질서의 변환은 발레 <지젤>이라는 텍스트를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이러한 2막의 설정 속에서 나타나는 안무는 높은 난이도와 연기력을 수반하며, 미르타의 카리스마와 알브레히트의 속죄, 지젤의 숭고함, 힐라리온의 절박함, 그리고 이 모든 정경을 구성하는 윌리들의 음산함과 공존하는 신비로움이 모두 합이 맞았을 때 <지젤> 2막의 진가를 느낄 수 있다. 춤을 추던 (이때 알브레히트 역할의 발레리노는 공중에서 발을 교차하는 ‘앙트르샤 시스’를 계속 반복해야 한다) 알브레히트가 쓰러지며 죽을 위기 속에서 아침을 알리는 종이 치고 사라지는 윌리들과 함께 지젤 역시 무덤으로 사라지려 한다. 이때 부레부레로 퇴장하는 지젤을 붙잡으며 마지막 작별을 하고 자신이 가져온, 그리고 지젤이 미르타에게 자비를 청할 때 쏟았던 백합 꽃 다발을 품에 안고 후회하는 알브레히트를 끝으로 발레 <지젤>은 막을 내린다.
유니버설 발레단 <지젤>의 첫 무대 속 과거와 현재, 미래
유니버설발레단 <지젤> 서울 공연의 개막 당일, 2006년 로잔 콩쿨 3위를 한 경력이 있는 수석무용수 홍향기가 지젤로, 객원 무용수이자 마린스키 발레단 솔리스트로 입단 예정인 전민철이 알브레히트 역으로 분한다. 두 사람의 조합은 베테랑과 신예의 조합이라는 홍보 문구를 그대로 반영하듯, 안정적인 테크닉을 기반으로 성숙한 연기력을 뽐내는 홍향기 발레리나와 <라 바야데르> 이후 전막 발레 주역을 맡아 순수하고 어린 느낌을 주는 전민철 발레리노의 조화를 보여주었다. 작년 <라 바야데르> 마지막 공연에서 솔로르와 감자티로 호흡을 맞춘 적 있던 경험 때문인지, 리프트를 포함한 전반적인 파트너링과 페어 합의 성장을 느낄 수 있었다. 힐라리온 역할의 알렉산드르 셰이트칼리예프 (알렉스) 역시 (맥밀란의) <로미오와 줄리엣> 파리스 백작, <백조의 호수> 로드바르트 등 중요한 강한 캐릭터성을 가진 중요한 조연 역할의 경험이 지젤을 짝사랑하는 힐라리온의 애정과 2막에서 윌리에게 죽음을 맞이하는 처절한 연기로 나타났다.
또한 이번 작품은 미르타 역할의 이가영 발레리나가 유니버설발레단을 퇴단하기 전 마지막 무대이기도 하다. 그는 큰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미르타’를 포함하여 다양한 솔로와 독무를 맡아왔고, 작년 <잠자는 숲속의 미녀> 지방 공연에서 한국에서는 발레리나 최초로 카라보스 역할을 맡기도 했다. 윌리들의 우두머리인 미르타의 강한 지도력과 압박하는 카리스마가 주는 희열은 국립발레단의 윤혜진, 정은영 발레리나에 이어 유니버설발레단의 이가영 발레리나에게서 나타났던 장점이다. 이처럼 이번 <지젤> 공연은 무용수가 퇴단하기 전 마지막 무대라는 점에서 시간이 가는 것이 아깝고, 그렇기에 더욱 값진 ‘미르타’의 출연 장면이다.
주요 캐스팅 외에도 패전트 파 드 시스 속 2인무를 맡은 임선우, 전여진과 6인무에 속하는 김동우, 주형준 발레리노와 사공다정, 오타 아리카 발레리나의 춤 역시 눈길을 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반가운 얼굴은 지난 2017년 <오네긴>으로 은퇴한 후 유니버설발레단의 지도위원(발레 마스터)으로 활동하던 엄재용 발레리노가 오랜만에 바틸드의 아버지인 콘라드 백작 역으로 출연했다는 것이다. 무용수로서 은퇴하기 전까지 알브레히트 역할을 맡아 오던 그가 무용수들의 부상으로 인한 전반적인 캐스팅 변경이라는 상황 속에서 오랜만에 <지젤> 무대에 섰다는 것은 오랫동안 유니버설발레단을 지켜본 사람의 입장에서 유니버설 발레단의 역사를 다시금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처럼, 2025년 유니버설발레단 <지젤>의 (서울에서의) 첫 공연은 과거와 미래, 무용수로서의 시작(도약)과 끝이 공존하고 유니버설발레단의 역사가 그대로 응축된 무대였다고 요약할 수 있다. 주역부터 군무까지, 연출부터 안무까지, 첫 공연이 주는 감동과 즐거움은 감격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첫 공연의 기대 속에서 지젤 역의 강미선과 알브레히트 역의 이현준, 그리고 동일한 조연들로 구성된 베테랑들의 조합인 유니버설발레단 <지젤>의 마지막 공연 역시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