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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견고딕걸>의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뿐인 동생 수빈이 죽었다는 연락이 온다. 정확히는 달려오는 열차에 사람을 밀고, 자신도 같이 자살했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일 여유도 없이 엄마와 함께 문제 될만한 동생의 유품을 모두 없앤다. 그렇게 수빈의 쌍둥이 언니, 수민은 하루아침에 끔찍한 살인사건의 가해자 가족이 된다.

 

연극 <견고딕걸>의 이야기는 수민의 인생이 뒤바뀌어버린 날, 그 이후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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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등장인물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와 가해자는 모두 연극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기에, 수빈이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물어 볼 수도 없다.

 

그나마 수빈의 마음을 파헤칠 수 있는 단서도 이미 모두 없앴다. 사건의 진상에 대해서는 남은 가족들도, 관객들도 끝까지 알 수 없다. 연극에서 중요한 부분은, 진실이 아닌 절대로 답할 수 없는 질문에 갇혀버린 남은 가해자 가족의 이야기이다.


가족의, 그것도 어린 동생의 죽음은 남은 가족들에게 큰 상처이며 오랫동안 이어질 고통이다. 그럼에도 가족은 그 상처를 보살필 수 없다. 수빈이 사람을 죽인 살인자이기 때문이다.

 

수빈의 죽음에 대해, 가족은 수빈을 절대 보고 싶어 해서는 안된다고, 극락왕생도 절대 빌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엄마는 그 이후로 집안에 완전히 틀어박혀 어떻게든 수빈의 행동을 밝혀내려 하고, 아스퍼거 증후군이라고 자신의 맘대로 사건의 답을 내리기도 한다.

 

반면 남극기지에서 일하던 아빠는 그날 이후로 사건을 외면하며 살아간다. 아예 새로운 곳에 자리를 잡고 살며, 어떻게든 사건을 잊으려 한다. 그리고 그 가족들의 모습이 수민에게는 마치 거대한 구멍처럼 보인다. 그리고 자신도 그곳에 빠진 것만 같다.


가족 바깥의 세상도 수민을 그 구덩이에 밀어 넣고 있는 것 같다. 끔찍한 사건의 가해자 가족이자, 가해자와 똑 닮은 얼굴을 가진 수민에게 대중은 무차별적인 비난을 쏟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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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의 폭력에 대해 가족들도 책임이 있을까? 피해자의 가족이 가슴에 대못이 박힌 것 같은 고통을 겪는 사이에, 가해자의 가족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연극에서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은 답하기 쉽지 않다. 수민의 가족이 하루아침에 어떻게 뒤바뀌어버렸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한 관객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비판할 수도, 그렇다고 무조건 안타까워하기에도 어딘가 마음에 걸린다.

 

우리가 가해자의 가족을 비판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관객 스스로도 질문에 빠질 무렵 보이는 대중들의 반응은 비판의 수준을 넘어 무분별한 비난과도 같이 보인다. 인터넷에 퍼져버린 수민의 신상과 그에 대한 욕은 마치 또 다른 폭력의 현장 같기도 하다.


그런 현실에서 수민은 검은 고딕룩으로 자신을 감싼다. 온통 검은 옷들을 입고, 스모키한 화장, 거기에 항상 에어팟으로 노래를 듣고 있는 수민의 모습은 마치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있는 것 같다. 그 세상에 쉽게 다가가기도, 말을 걸기도 어딘가 무서운 모습이다.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는 수민의 복잡한 심리는 수민이 직접 드러내기보다는, 다른 배우들의 묘사들로 설명된다. 리듬감 있으면서도 자세히 심리를 묘사해 주는 지문들은 관객들을 빠르게 이야기의 세계로 이끈다. 그런 동시에, 거꾸로 생각해 보면 수민 본인은 자신의 속마음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모습처럼도 보인다. 처음의 수민은 자신의 속마음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1000px견고딕-걸_1ⓒ김솔.jpg

 

 

삶의 갈피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수민에게 어느 날 미나가 찾아온다. 피해자 지은의 각막을 이식받은 미나는 같이 지은의 부모님을 만나러 가자며, 심장을 이식받은 현지까지 여정에 끌어들인다. 때로는 유쾌하게, 그러면서도 진지한 세 사람의 여정이 이어진다. 수민은 그 여정에서 오랜만에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웃기도 하고, 예전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무엇을 원했는지를 다시 떠올린다. 혼자였던 수민의 여정은, 수민이 다시 자신의 속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여정의 끝에서 결국 수민만이 지은의 부모님을 만나러 간다. 현지와 미나는 끝까지 함께해주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여정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지은에게서 각각 심장과 각막을 받은 두 사람도 다시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지가 심장이 쿵쾅거릴 정도로 뛰는 장면이 인상 깊게 남는다. 쿵쾅거리는 심장박동 소리는 남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관객에게도 전해지는 것 같다.

 

많은 사건들 이후 앞으로 이어질 하루하루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수민을 결국 지은의 부모님을 향해, 사과하기 위해 달려간다. 마지막에 수민은 객석과 완전히 구분되어 있던 무대에서 벗어나 객석으로 달려 나간다. 마치 꽁꽁 싸매고 있던 자신의 속마음을, 그리고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1000px견고딕-걸_김수민,윤미나_ⓒ김솔.JPG

 

 

리듬감 있고, 때로는 코믹하게 전개되는 이야기지만 그 안의 주제가 단순하지는 않다. 오히려 그 누구도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해와 피해의 이야기는 명확한 답지가 없는 문제이며, 마지막 피해자의 부모에게 달려간 수민을 용서할 수 있을지, 수민의 가족이 과연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는 조금 더 서로의, 그리고 자신의 속마음에 귀 기울이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누군가를 굳이 용서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폭력을 막는 길이 되지 않을까.

 

변화는 누군가의 속마음을 궁금해하고, 귀를 기울일 때 시작된다.

 

미나와 현지가 수민을 만났을 때처럼. 수민이 드디어 자신의 속마음을 마주했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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