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흩뿌려진 감정의 결, 그리고 지브리의 꿈


     

[포스터 최종] 0413 더벨과 함께하는 지브리 페스티벌.jpg

 

 

드뷔시의 ‘꿈’으로 문을 여는 이 콘서트는, 마치 잔잔한 호수 위로 아침 햇살이 부서지는 장면을 떠오르게 했다. 지브리의 세계가 지닌 따뜻하고 흐릿한 경계들 — 그 불분명한 선들이 드뷔시의 몽환적 피아노와 만나는 순간, 나는 ‘현실 너머의 감정’을 건드리는 그리움에 잠겼다. 그 감정은, 분명히 어딘가에 있었던 기억 같은 것.

 

‘바람이 지나가는 길’은 마치 그 꿈 속의 세계를 스쳐 지나가는 작은 기척처럼 들렸다. 리스트 스타일의 편곡은 화려한 감정보다는, 서서히 번지는 물감처럼 정적인 움직임 속에서 감정을 확장시켰고, 나는 그 속에서 '살아 있는 정적'을 느꼈다.


비발디의 '가을'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언제나 몇 번이라도'가 이어질 때, 고전적인 질서와 지브리 특유의 감정적 여백이 충돌하는 순간이 인상 깊었다. '가을'이 선명한 선을 그리고 있다면, '언제나 몇 번이라도'는 그 선을 물들인 낙엽처럼 느껴졌다.

 

키키가 여행을 떠나는 장면에 쇼팽의 에튀드가 겹쳐졌을 땐, '연습곡'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감정이 예민하게 깃들어 있었다. 하프처럼 물결치는 이 피아노 음들은, 아직 성숙하지 않은 감정의 떨림 — 설렘, 두려움, 희망 같은 — 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와 ‘그날의 강’이 함께 흐를 때, 나는 마음 한구석이 젖는 걸 느꼈다. 이 인상주의 음악들은 분명히 어딘가를 향하지만, 결코 명확하게 도달하지 않는다. 파스텔톤의 흐릿한 감정들, 그래서 더 슬프고 아름다웠다. 라벨은 절제된 명료함 속에 감정을 녹여냈고, 센의 강은 그 위를 떠다니는 기억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드뷔시의 ‘눈 위의 발자국’과 ‘원령공주’의 만남. 나아가고 싶지만 나아갈 수 없는 감정. 발자국은 이어지지만, 그것이 무엇을 향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불완전한 길을 따르며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지브리’가 건네는 감정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음악을 좋아하는 이유


 

2부의 무대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어느새 영화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특히나 『천공의 성 라퓨타』의 ‘너를 태우고’가 흐르던 순간은, 그야말로 ‘초대’였다. 누군가가 나를 부드럽게, 그러나 분명한 손길로 이끌어 영화의 장면들로 데려가는 듯한 감각. 그것은 이야기의 리듬과 내 생활의 리듬이 어느 순간 일치하면서, 무언가가 ‘맞아떨어졌다’는 느낌이었고, 그 경험은 몹시도 조용하고 따뜻했다.

 

나는 종종 그런 순간들 속에서 나의 삶과 예술이 어떻게 겹쳐지는지를 생각하곤 한다. '너를 태우고'는 단지 애틋한 선율 이상의 것이었다. 그건 마치 내가 애써 간직하고자 했던 어떤 기억, 혹은 아주 오래된 희망의 잔향 같은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예전부터 내가 아껴왔던 영화음악 — 엔니오 모리꼬네의 ‘The Crisis’ — 이 떠올랐다. 그 곡은 의도적으로 불규칙한 음계를 사용해 인간의 불안정성과 불완전함을 꺼내어 보여주는 음악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불안정함 속에서 나는 커다란 위로를 받은 적이 있었다. 완벽하게 정돈되지 않은 음악이 오히려 나의 어지러운 마음과 맞닿아 있었기에,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공명이었다.

 

이 콘서트를 통해 나는 다시금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나는 왜 영화음악을 좋아하는 걸까? 단지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마도, 영화가 '꿈'이라면, 음악은 그 꿈으로 나를 조심스럽게 이끌어주는 다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말보다 먼저 내 마음을 이해하고, 머뭇거리는 걸음보다 앞서서 나를 데려가는 어떤 힘.

 

‘너를 태우고’를 들으며 나는 바로 그 힘을 느꼈다. 공연장을 가득 채운 음악은 단순한 연주가 아니라, 모두에게 건네진 작은 배 한 척이었다. 우리가 잊고 지내던 감정들을 싣고, 어디론가 천천히 흘러가게 하는 마법 같은 시간.

 

그것이 바로 이번 지브리 콘서트가 내게 준 가장 선명한 선물이었다.

 

 

0226_23지브리 페스티벌 01.jpg

 

 

이경헌이 에디터의 다른 글 보기
흐름에 편승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부드럽게 우리를 지지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