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1892–1940)은 독일계 유대인 철학자이자 문화 비평가로, 문학, 미학, 역사 철학, 미디어 이론 등 여러 분야에 걸쳐 깊은 통찰을 남긴 사상가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등의 글에서 그는 기술과 예술, 역사 경험의 관계를 치밀하게 탐구했고, ‘아우라’, ‘플라뇌르’ 등의 개념은 오늘날까지 문화 이론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내가 처음 벤야민을 만난 건 대학교 2학년, 영상매체 미학을 다루는 수업에서였다. 그 수업에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읽으며 ‘아우라’ 개념을 처음 접했고, 이해하려 애쓰며 곱씹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여러 개념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플라뇌르’다. 목적 없는 도시 산책자를 뜻하는 이 개념은 일상 속에서 삶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 중 하나로 느껴진다.
그런 그의 예술적 감수성과 철학이 담긴 문학작품이 있다니, 읽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고독의 이야기들』은 벤야민의 문학 습작을 한데 모은 책으로, 그가 사랑한 화가 파울 클레의 그림과 함께 구성되어 있다. 꿈과 몽상, 여행, 놀이와 교육론을 주제로 한 짧은 글들이 담겨 있어, 부담 없이 한 편씩 음미하며 읽을 수 있다.
이 중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은 단편소설 「아버지의 죽음」이다.
위독한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온 주인공 오토는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며 혼란과 상실을 경험한다. 그는 일상적인 연구와 예술 화보 읽기를 이어가려 노력하지만,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는 더 이상 익숙한 삶의 흐름이 유지되지 않는다. 장례식에서 일시적으로 평정을 되찾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가 그의 흔적을 되새기며 다음날 조용히 집을 떠난다.
이 작품이 특별하게 다가온 이유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동시에 그 이면에 ‘삶’의 충동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오토는 아버지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며 깊은 슬픔과 혼란을 겪는 와중에도, 이야기 중간 중간 하녀에 대한 성적인 욕망을 드러낸다.
나는 이 대비 속에서 삶과 죽음이라는 두 충동이 맞부딪치는 순간을 보았다. 아버지와 하녀는 각각 죽음과 삶의 상징처럼 다가왔고, 오토는 그 사이에서 방황한다. 이러한 감정의 충돌은 프로이트가 말한 ‘죽음 충동’과 ‘삶의 충동’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이 이야기는 우리가 종종 마주하는 내면의 이중성, 모순된 감정, 불완전한 인간성에 대해 정직하게 말하고 있다. 삶과 죽음, 욕망과 상실, 평정과 혼란 사이에서 끝내 확신에 이르지 못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내 안의 감춰진 불안과도 겹쳐 보였다. 그래서 이 짧은 이야기 하나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고독의 이야기들』은 철학자이자 예술 애호가였던 벤야민이 남긴 문학적 자취를 따라가며, 인간 벤야민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철학적 사유와 문학적 감수성의 경계에 선 이 책은, 일상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예술과 삶을 되새기고 싶은 이들에게 따뜻한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