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1000px견고딕-걸_김수민,윤미나2_ⓒ김솔.jpg

 

 

머리부터 발끝까지 올블랙 패션에 얼굴을 뒤덮은 스모키 메이크업. 관심은 사절이고 말투는 차갑게, 표정은 딱딱하게. 지난 13일 두산아트센터 SPACE 111에서 막을 내린 연극 〈견고딕걸〉의 주인공 수민의 모습은 모서리에 닿으면 금방이라도 베일 듯이 뾰족하게 각이 진 견고딕체 그 자체다.

 

수민의 인생에 무섭도록 거대한 싱크홀이 생긴 것은 그의 쌍둥이 동생 수빈 때문이다. 어느 날 수빈은 전철역에서 한 승객을 철로로 밀고 그 자리에서 자살했다. 수민은 영문도 모른 채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자살 유가족이 되었지만, 그 슬픔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도 전에 누군가의 소중한 딸을 죽인 살인자의 가족이 되고 말았다.

 

수민의 신상이 털린 지는 이미 오래고, 인터넷에는 수빈과 똑 닮은 그의 얼굴 사진이 마구 돌아다닌다. 유명 자기계발서의 저자였던 엄마는 수빈의 행동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좁은 방안에 틀어박혔고, 아빠는 사건 이후 직장을 그만두고 입을 다물었다. 수빈의 사건으로 인해 일상이 파괴된 수민은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삶을 꿈꾼다.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새까만 고딕룩 뒤에 숨어버린 채 개명과 성형수술을 계획한다.

 

그러던 중 수민은 익명의 누군가에게 온라인 메시지를 받는다. 수빈 때문에 세상을 떠난 피해자 지은의 각막을 이식받았다는 화이트해커 미나는 수민에게 함께 지은의 가족을 찾아가 보자고 제안한다. 확신이 없는 상태로 미나와의 약속 장소에 나간 수민은 결국 용기 내어 미나의 손을 잡게 된다.

 

 

1000px견고딕-걸_1ⓒ김솔.jpg

 

 

수민이 수빈의 쌍둥이 언니로서 지은의 가족을 찾아가는 지난한 여정은 의외로 어둡고 무겁게만 그려지지 않는다.

 

그전까지 항상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던 수민은 지은의 각막을 지닌 미나와 지은의 심장을 지닌 현지와 동행하며 오랜만에 환하게 웃는다. 또 운 좋게 얻어 탄 관광버스에서 수민은 모든 걸 잊고 어르신들 앞에서 신명 나게 노래를 부른다.

 

그동안 도망칠 궁리만 했던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하면서 수민은 파괴되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에서 지워지길 바랐던 자기 자신의 본모습을 재발견한다. 이러한 변화는 그가 지은의 가족에게 용서를 받게 되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직면하기 두려웠던 피해자들의 얼굴을, 그들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려는 그의 성숙한 용기 때문이다.

 

 

small견고딕-걸_풀샷5ⓒ김솔.JPG


 

도망은 진정한 해방이 아니다. 수민이 아무리 이름을 바꾼다고 해도 그가 수빈의 쌍둥이 언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수민이 아무리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게 얼굴을 성형한다고 해도 자신의 동생 때문에 가슴에 대못이 박힌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수민이 피해자 가족을 향해 느끼는 미안함과 죄책감 역시 개명이나 성형 따위로는 말끔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잃어버렸던 웃음과 잊고 있던 꿈. 소박한 일상의 감각을 서서히 되찾는 수민의 모습을 통해 〈견고딕걸〉은 관객에게 올바른 삶의 방식으로 ‘도망치기’가 아닌 ‘마주하기’를 제시한다. 이해할 수 없는 동생의 잔인한 행동을 마주하기, 한순간에 사랑하는 딸을 잃은 피해자 가족의 찢어진 마음을 마주하기, 그리고 이 모든 상황에서 도망치느라 수많은 내일을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마주하기. 그 끝에서 수민을 기다리는 것은 가해자 수빈의 쌍둥이 언니로서가 아닌, ‘인간 김수민’으로서의 인생이다.

 

살다 보면 무언가로부터 끝없이 도망치고 싶을 때가 한 번씩 찾아온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원망할 사람도 없는 이상한 상황이 펼쳐지기도 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로 인해 삶이 망가지기도 한다. 빛 한 줄기조차 없는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게 만든다. 하지만 수민이의 이야기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마주하는 용기가, 나아가는 마음이 구덩이에 빠진 나를 구해줄 테니까.

 

 

 

컬쳐리스트 태그.jpg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