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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발단
나는 왜 연극을 좋아할까? 언젠가부터 매달 한 번씩은 연극을 보러 다니지만, 매번 그 애정을 새삼스레 실감하진 않는다.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5월 11일까지 공연 예정인 연극 <랑데부>를 보며 오랜만에 그것을 깊이 느꼈다.
<랑데부>는 2인극으로, '태섭'과 '지희'라는 두 사람의 이야기다.
로켓 연구소 과학자인 태섭은 흔히 말하는 이과형 인간이다. 수요일 저녁 6시 반마다 짜장면을 먹는 등 계획에 대한 집착과 강박증도 심하다. 지희는 태섭의 단골 중식집인 영춘관의 현 사장으로, 전 사장의 딸이기도 하다.
몇 달 전부터 짜장면 맛이 바뀌었다는 태섭의 항의를 참다못해 지희가 직접 연구소에 찾아온 상황으로 극은 시작된다. 초반부는 평범한 로맨틱 코미디물의 도입부를 보듯, 밝고 떠들썩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소소한 유머와 연기 포인트들이 계속해서 웃음을 주었다.
전개
그러던 중 점차 인연의 윤곽이 짙어진다. 마치 종이 밑에 동전을 놓고 연필로 살살 칠할수록 형태가 드러나듯이.
태섭은 왜 수요일 저녁마다 영춘짜장만 먹는지. 왜 병적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는지. 왜 영춘관 전 사장의 죽음에 그렇게 슬퍼했는지. 반면 지희는 왜 영춘관을 그토록 싫어하는지. 아빠가 떠나고 가게를 맡기는 했지만, 왜 여전히 아빠를 증오하는지. 둘은 서로 과거를 열어 보이고, 새로운 슬픔을 알게 된다.
그리고 지희는 태섭에게 춤을 가르쳐주기로 한다. 정확히는 무용 혹은 몸짓에 가까운 아주 느린 춤이다. 그 중요한 지점에 놓인 것이 춤이라서 좋았다. 우리 삶에는 분명 비언어의 영역에서만 표현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타인과의 접촉을 싫어하는 태섭을 위해, 몸은 닿지 않는 채로 선만 맞춰가며. 한동안 극장 안에서는 피아노 소리와 두 배우의 느릿한 구두 소리만 슥, 스윽 들렸다. 그 순간이 영원 같았다.
위기
평범한 로맨틱 코미디였다면 그쯤에서 멈췄을 것이다. 서로를 구원하고 아픔을 안아주며. 지희는 태섭의 감정을 살려내고, 태섭은 지희에게 안정을 가져다주며.
하지만 <랑데부>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런 완벽한 구원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제자리걸음이라는 것. 시간이 지나고 기억이 멀어져도 감정과 상처는 그대로일 수 있다는 것.
춤을 추던 둘의 손이 처음으로 살짝 닿는 순간, 두 사람은 그대로 멀어진다. 바닥처럼 보였던 무대에는 트레드밀이 깔려있었다. 트레드밀이 움직이며 둘을 무대 양 끝으로 떨어뜨린다. 서로에게 다가가 보려 하지만, 제자리다.
절정
'내가 이해한다고 해서 그녀의 상처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태섭의 대사가 마음에 들어왔다. 태섭은 어쩌면 이건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희는 절망감에 답한다. '난 춤을 추면서 내가 너에게 뭐라도 해주고 있는 줄 알았어.'
서로의 아픔을 안는 일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오히려 아주 답답하고 지겨운 일이다. 이해는 절대적인 회복도, 구원도 될 수 없을뿐더러, 심지어는 애초에 이해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타인의 고통을 다 알 수 없다. 둘도 여전히 서로에게 못다 말한 기억과 상처가 많다.
결말
그 끝에 또다시 놓이는 것은 춤이다. 둘은 다시 한번 춤을 추기로 한다. 다만 이번엔 태섭이 이끈다. 얼어있던 몸이 한결 부드러워진 걸 보니, 지희는 '뭐라도' 해주었던 게 맞는 듯하다.
세상에는 분명 완전한 치유도, 완전한 이해도 없다. 그럼에도 우린 살아야 하고 함께 춤을 추어야 한다고, 온몸으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서로 선을 맞추고, 몸을 맞대고. 너에게 기댔다가, 나에게 기댔다가 해야 한다고.
김정한 디렉터는 작품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서로 도달하였을 때, 과연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일까.
그러면 끝나는 것일까. 모두에게 명쾌한 해답을 내가 줄 수 있을까.
대본을 수정하고 돌아보니 전부 다 아닌 것 같더라.
이 작품은 그래서 미완성이며, 그렇게 완성되었다."
결말의 로켓 발사음에 대한 해석은 열린 결말로 존재한다. 태섭은 어려서부터 우주 로켓처럼 지구를 벗어나고 싶었다고 했다. 홀로 남은 지옥에서 도망치기를 원했다. 하지만 마지막 그 소리는 태섭이 다른 무엇도 아닌, 자기 안의 지옥을 날려 보낸 소리였기를 바랐다. 혹은 그게 상상이라도 좋으니까. 환청이라도 좋으니까. 잘 안되더라도 그렇게 해보려고 한 것이기를.
삶은 딱 한 뼘만큼의 결심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 제자리걸음을 걷다가 힘을 내어 딛는 그 딱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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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연출, 연기 어느 측면에서 보아도 의미 있는 연극이었다.
만남의 무게에 관한 역설은 다른 대중매체에서는 쉬이 전하기 어려운 주제다. 영화나 드라마에 온전히 2명만 등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타인과의 무분별한 접촉이 판치는 이 세상에서, 사실 손 하나 닿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만남이라는 건 얼마나 무겁고 깊은 일인지를 이야기한다.
연출적으로 봤을 땐, 우선 런웨이처럼 생긴 독특한 무대가 인상적이었다. 무대를 중심으로 관객이 양쪽에 나누어 앉아, 기본적으로 배우의 정면보다 측면을 더 많이 보게 된다. 같은 장면도 좌석 위치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다. 이를테면 인물이 충격을 받는 장면에서 어떤 관객은 표정을 직접 보고, 어떤 관객은 뒷모습에서 간접적으로 느낀다. 다양한 자리에서 관람해 보는 재미가 있을 듯하다.
또, 트레드밀, 조명, 포그만을 활용해 각종 참신한 연출을 선보였다. 트레드밀을 가동하고 조명을 빠르게 껐다 켜기를 반복해, 서로에게 달려가는 움직임이 마치 필름처럼 보이던 장면이 대표적이었다. 우주 소재인 만큼 밤하늘과 별빛을 표현하기도 했다.
연기를 보았을 때도 2인극다운 대사의 양과, 소품 하나 없는 텅 빈 무대, 퇴장을 하지 않는 빼곡한 구성까지, 연극 중에서도 고난도를 소화해 낸 배우들의 노력이 돋보였다. 무엇보다도 이런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어서 좋았다. 쏟아지듯 내리는 핀 조명 아래 춤을 보여주어서. 무대 위에서 울고 웃고 땀 흘리며, '나 살아있는 것 같다' 하는 대사가 그토록 와닿게 해주어서. 완전한 행복 같은 건 없더라도, 그럼에도 많은 순간 행복하기를. 그게 안 될 땐 또 그 시간을 견딜 만큼 강한 사람이기를 빌어보았다.
랑데부 (rendez-vous)
: 만남을 뜻하는 프랑스어. 특히 인공위성이나 우주선이 우주 공간에서 만나, 같은 궤도로 나란히 비행하는 것.
어쩌면 사랑은 같은 비행기에 타는 게 아니라, 그저 나란히 비행하며 서로를 바라보는 일.
나는 이 연극과의 만남을 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