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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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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력 있으면서도 어느 정도의 자신만만함이 느껴지는 리베카 솔닛의 글을 좋아한다. 내가 말하는 것에 확신 있다는 태도가 대중으로 하여금 납득과 기대를 하게 만들지만, 글을 읽다 보면 이 사람, 본인이 쓴 글을 참 많이 들여다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강하게 이야기하다 갑자기 따사로워지고 자신의 자아를 냉철하게 관찰하면서도 어떤 부분에는 연민을 느끼는 모습이 재밌기도 하고 음흉스럽기도 하다. 그리고 그 면을 읽어내리면서 그가 더 가까워진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고 자라날까. 슬픔에서도 기쁨을 길어내고 기쁨 속에서도 어떤 암담함이 발에 채는 마음을 리베카 솔닛은 자전적인 이야기로 풀어낸다. 글을 읽고 쓰는 것, 투병 생활, 엄마와 딸, 극지방의 에스키모까지. 멀고도 가까운에서 말하는 이 이야기들은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리베카 솔닛이 재구성하고 발화하면서 한 사람의 이야기로 묶인다. 분명 세계 저 너머의, 나와 연령대와 문화권 전부 다른 이의 삶의 궤적이지만 그의 한풀이 같은 이야기들이 자꾸 마음속에 들어왔다.


멀고도 가까운 속 리베카 솔닛은 소원했던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은 후 그를 돌보는 경험을 공유한다. 자신도 병을 진단받았고 치료받는 과정에서 멍든 살구처럼 난도질당했다고 표현하고 결국 그 경험에 비추어 어머니를 돌보게 된다. 더 이상 가족의 돌봄이 어려워진 순간 그가 완전히 기억 속에서 길을 잃고, 다시 회복할 수 없음을 지난하게 실감하면서 자신의 방식으로 관계를 해석하고 떠나보낸다.

 

책의 시작에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낱낱이 흩어져 있다가 그를 요양원에 모신 뒤 다시 시작된다. 텅 빈 집을 정리하다 남은 살구나무 열매를 가득 따고, 살구와 이야기를 씻고 으깨고 절인다. 토해내듯이  기억을 굳이 갈라내어 아파한다. 수많은 작가, 특히 여성 작가들이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에 대해 지리멸렬하게 말한다. 혈연관계, 동일한 성을 가진 존재, 돌봄의 주체와 대상이었던, 사람과 사람처럼 오묘하고 복잡한 경험을 통해 두 사람은 관계가 좋든 아니든 말할 거리가 차고 넘친다. 엄마를 미워하고 사랑하면서 스스로 분열되면서 리베카 솔닛은 줄곧 진지하다. 역사가인 만큼 자신의 기억과 역사 속 인물의 일화를 겹쳐내며 웃음기 없이 서술과, 예시, 비유를 끝없이 빚어낸다. 결국 책을 읽다 그의 이야기에서 나의 이야기를 찾아내고 그의 마음을 쫓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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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닛의 글을 읽다 보면 겹치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신기할 만큼 품은 이야기가 많다. 한 책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명확하다. 수많은 글자를 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의 이야기로 수렴한다. 그의 말은 스스로에게 새겨넣는 말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그것이 자신의 비극일지라도, 그 이야기 때문에 본인이 불행할지라도 계속 이야기한다. 혹은 그 이야기를 멈추는 방법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편안함보다는 일관성을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어느 부분은 죽어야 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것보다 죽음이 먼저 오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의 죽음을 스스로 익숙한 자기 모습의 죽음이기 때문에."]

 

정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버려내는 글은 매혹적이다. 모든 이야기와 그 안에 있던 영혼을 긁어내어 버린다.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편집하면서 영혼의 수술을 이어 나가는 것이다. 리베카 솔닛의 말처럼 그는 감정을 슬픔과 기쁨보다 깊음과 얕음으로 감지한다. 그를 살아가게 하는 힘은 기쁨보다 슬픔에 있다. 제목처럼 멀고도 가까운, 깊고도 얕은 이 모순적인 단어가 엄마와 딸 그리고 우리 생을 축약하는 듯하다.

 

부모는 내 안에서 계속 달라진다. 그들이 정말 세월이 흘러 변하기도 하지만 어린 기억 속에 어린 엄마의 나이가 내 나이가 될 때, 우리가 자꾸 마주칠 때, 그 순간들이 자주 애틋해진다. 엄마의 감정을 내가 알게 되고 절대 이해하지 않으리라 다짐한 말들을 곱씹게 될 때마다 엄마는 이름 석자를 가진 사람이 된다. 늘 똑같은 관계는 없다.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할수록 또다시 어머니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밉고 말이 안 통하는 여인과 기억나지 않는 시절 나를 씻기고 입힌 그 어린 여자로 느껴지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아직 이르지만 언젠가 있을 엄마와의 이별을 생각해 본다. 나의 터전이 더 이상 세상에 없을 때, 정말로 돌아갈 곳이 없음을 상상한다. 어린 시절에는 그들이 가는 곳에 나도 있어야 하고 허락을 받아야 했다. 가정통신문에 싸인을 베끼고 거짓말을 하고 성을 내도 그는 늘 가짜 마음을 꿰뚫어 봤다. 어른이 된 지금은 내가 가는 곳에 그들이 올 수 없다. 내게 엄마가 더 이상 유일한 장소가 아니고 내가 있는 곳이 나의 대지가 되는 지금, 그 변화가 가끔 놀랍고 자주 슬프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고독은 계속된다. 처음에는 어머니로 시작한 솔닛의 기억과 파편은 나중에는 그냥 우리의 것이 되어 박힌 가시처럼 난데없이 아프다. 하지만 외로움과 고독, 동시에 그의 쓰기도 끝나지 않는다. 왜 그게 이렇게나 힘이 되는 걸까. 그의 말대로 우리는 죽음이 두려워서, 내 안의 너무 익숙한 이야기의 재현에 익숙해지고 담담해져서, 다음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다음을 상상하고 정말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낡은 이야기를 토해내고 새로운 이야기를 몸속에 심어내야 한다. 생존하기를 욕망하고 끝까지 써내기를 고집하는 마음은 멍이 들지언정 부서지지는 않는다는 걸 리베카 솔닛의 글로 자꾸만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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