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첫 음이 시작되자 ‘아, 음악 공연이 참 오랜만이구나’하고 깨달았다.
더군다나 이런 제대로 된 재즈 공연은 거의 처음이었다. 소위 ‘거장’들의 재즈 음악만 알음알음 찾아 듣다가, 무한한 상상력을 가진 젊은 재즈 음악을 벅찬 환희로 만나고 온 후기를 남긴다.
지난 4월 11일 금요일, 성수아트홀에서 ‘마티스 피카드 트리오 첫 내한공연’이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공연을 펼친 세 아티스트는 각기 다른 출신적 배경을 가졌지만, 모두 어린 나이부터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아 온 천재들이다.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마티스 피카드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마다가스카르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미국, 영국 등 다양한 나라에서 다국적인 문화를 접해온 그는 17세의 나이에 줄리어드 음대 재즈과에 입학했다.
현장에서 본 마티스는 사람들을 단숨에 집중시키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느낌보다는 음표들을 발판 삼아 자유롭게 뛰노는 것 같았다. 그의 음악에서 유독 강점을 보이는 그루브함과 리드미컬함은 이러한 자유로움, 그러나 절대로 갈 길을 잃지 않는 능숙함에 있었다.
베이시스트 파커 맥앨리스터는 뉴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베이스를 연주했고, 보스턴의 뉴잉글랜드 컨서바토리에서 베이스를 전공했다. 그의 베이스 연주는 내가 여태껏 들어온 어느 베이스보다도 강렬했다. 든든히 팀의 사운드를 채워주는 동시에, 선명한 베이스 라인이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귀에 꽂혔다.
중심을 잡고 달려가는 일렉 베이스가 세 악기의 조화를 완벽하게 잡아냈다.
마지막으로 드러머는 포르투갈 출신에 영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에 파스칼이다. 2001년생의 젊은 나이로 영국에서 ‘최연소’, ‘주목해야 할’, ‘라이징 스타’, ‘수석 졸업’ 등과 같은 수식어를 달며 화려한 이력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의 연주를 보며 나는 드럼이 정말 섬세한 악기라는 걸 새삼스레 인지했다. 드럼 세트 위를 스틱이 가볍게 스쳐 가면서도 필요한 곳에 적절한 소리를 밀어넣는 재치가 돋보였다. 누군가 무슨 일을 할 때 그 일이 쉬워 보이면, 그 사람이 그 일을 엄청나게 잘하는 거라고. 조에의 연주가 꼭 그러했다.
귀는 피아노를 따라, 심장은 베이스를 따라, 몸은 드럼을 따라 음악을 섭취했다.
세 악기의 향연은 하나가 되었다가 셋이 되었다가 둘이 되기도 했다. 분명히 귀를 타고 들어오는 것은 하나의 줄기인데 무엇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다른 음악이 되었다. 모든 것을 다 곱씹을 수 없어 아쉬울 정도로 연주는 스스럼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Hello’라는 곡으로 인사하며 시작한 공연은 관객을 다양한 공간으로 데려다 놓았다. 작은 숨결이 공명을 이루는 미지의 공간부터 백옥의 펜트하우스와 마다가스카르의 열대우림까지. 곡이 바뀔 때마다 나의 최애 곡이 갱신되었지만, 특히 그가 어머니를 위해 작곡했다고 소개한 곡이 마다가스카르의 공간감을 너무나 훌륭히 재현하여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그동안 재즈 음악에서 흔히 찾을 수 없었던 유려한 다이나믹함을 느낄 수 있었다.
‘Careless Thoughts’라는 곡은 아주 긴 호흡으로 이어졌는데, 불필요한 걱정과 생각들이 머릿속을 침투하고 헤집어놓는 형상을 상상토록 하였다. 뚜렷한 주제를 의도와 가깝게 표현해내는 동시에, 청자가 자신의 감흥을 투영할 수 있는 여지 또한 충분히 내어준다는 점이 놀라웠다.
관객들과 음악으로 소통하며 공연은 정점을 향해 달려갔다. 앙코르 전 마지막 곡에서 마티스는 눈을 감고 내면의 어린 나를 떠올려보기를 권유했다. 그의 말에 따라 눈을 감고 음악이 여기저기 숨겨진 기억을 두드리도록 두었다. 그 옛날의 나, 기뻤던 나와 슬펐던 나, 부끄러웠던 나와 무서웠던 나, 기억나지 않는 사진 속의 나, 그때는 몰랐지만 마음에 아로새겨져 자꾸만 떠오르는 나.
가끔은 내가 나라는 게 이토록 낯설다.
앙코르곡에서 마지막 화려한 폭죽을 터뜨리며 극은 막을 내렸다.
그들의 재즈는 은하수 같았다. 음 하나하나가 캄캄한 어둠을 수놓는 별들처럼 무수히 깜빡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때로 굉음을 내며 폭발하기도 하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더없이 조화로운 빛의 강줄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살다가 마티스 피카드 트리오의 이름이 들려온다면, 한 번쯤 그들의 재즈가 영그는 우주 속을 반갑게 유영해 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