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본가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좋은 연극이나 뮤지컬을 칭찬할 땐 늘 연출가가 먼저 거론되니까.
물론 알고 있다. 희곡이나 대본은 공연을 전제로 쓰이고, 연출가는 공연 전반의 과정을 책임진다. 그래도 가끔은 서운했다.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질문만큼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라는 질문도 중요한데. 그 질문으로 매초, 매시간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소한 서운함은 포스터에서 "각"이라는 글자를 먼저 찾는 행위로 이어졌다.
연극 <견고딕걸>은 이 행동 패턴을 보기 좋게 깨뜨렸다. 연극을 보고 난 후, 포스터에 적힌 "작"만큼 "연출" 옆에 적힌 이름을 오래 바라봤다. 이들의 이야기는 연출 덕분에 더욱 완전해졌으니까.
암전되기 전,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헛기침을 하거나 어깨를 주무르며 저마다의 준비를 마친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한 배우가 무대 중앙에 서더니 조용히 입을 뗀다. 공연 중 가장 밝은 빛, 가장 어두운 상태, 가장 큰 소리를 보여(들려)드리겠다고.
연극이 끝난 후에도 이 장면이 잊히지 않았다. 연극에서만 가능한 '극적인' 순간이었으니까. 영상 매체가 어떻게 하면 관객에게 더 강렬한 감각적 충격을 줄 수 있을지를 고민할 때, 연극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감각적 자극으로 인한 충격은 예방하되 그만큼 서사적 충격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무대에서도 이어졌다. 연극 <견고딕걸>에서 실시간 자막 화면은 보조적인 역할을 넘어 연출의 핵심 요소로 기능한다. 자막의 리듬감은 라이브 연주의 맛을 살리고, 볼드체 같은 글씨 효과는 "나 견고딕체로 말한다. 볼드까지 넣는다. 내 면상에 신경 꺼! 내 인상 내 인성 내 인생에 신경 끄라고!"라는 핵심 문장을 유쾌하게 전달한다. 화면에선 배우들이 무대에서 발화하지 못한 대사들이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배우들과 관객들이 모두 화면을 바라보는 순간, 악기와 말소리는 모두 멈추고 무음의 대사만이 극장을 채운다.
이상한 일이다. 연극에서 배우가 직접 발화하지 않는 대사라니?
이 낯선 방식은 작품의 주제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연극 <견고딕걸>은 살인을 저지르고 스스로 삶을 마감한 "김수빈"의 가족 이야기를 다룬다. 가해자의 가족? 사고 회로가 멈춘다. 뇌가 경계 신호를 보낸다.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반사적인 경계다. 우리는 가해자에게 이입할 여지를 주는 이야기나 기사들을 너무 많이 봐왔으니까. 가해자의 범죄 이유나 평소 모습 따위에 집착하느라 정작 피해자와 피해자 주변인의 삶이 이야기되지 않는 상황을 너무 많이 겪었으니까.
<견고딕걸>은 죽음에 서사를 부여하지 않는다. 피해자 "한지은"을 죽인 김수빈이 평소에 어떤 아이였는지,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를 설명하는 데에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작품은 남겨진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집중한다. 김수빈의 장례식장에서 아빠 "김우철"이 장례식장이 너무 고요하다며 극락왕생을 비는 음악을 틀자 엄마 "최진희"는 곧장 그 음악을 꺼버린다. 우리가 무슨 염치로 극락왕생을 비느냐고 소리치면서. 최진희는 무릎을 꿇고선 하늘에 묻는다. 데려갈 거면 혼자 가게 하시지, 왜 애꿎은 애까지 데리고 가게 하느냐고.
김수빈의 쌍둥이 언니 "김수민"은 스모키 화장과 올블랙 패션으로 애써 뾰족한 척하지만, 사건 이후 신상이 인터넷에 퍼지자 개명과 성형수술을 고민하는 평범한 아이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던 수민에게 메시지 하나가 도착한다. 피해자 한지은의 각막을 기증받은 화이트해커, 미나의 메시지다. 미나는 함께 한지은의 부모를 만나러 가자고 설득한다. 수민은 자신을 "툭툭 건드리는 말"들을 쳐다본다. '이 상태론 살아갈 수 없겠구나, 사실 버틸 수 없었구나'라고 깨닫게 만드는 말들을.
수민은 지은의 부모를 만나기로 결심한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 혹은 그러고 싶어서. 여기에 한지은의 심장을 기증받은 현지도 합류한다. 틈만 나면 걸걸한 욕을 내뱉는 현지, 엉뚱한 말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미나와 함께 있을 때 수민은 웃는다. 그러더니 생각한다.
어? 웃는다. 내가 웃어도 되나?
죄책감은 수민만의 것이 아니었다. 미나와 현지도 비슷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미나는 고백한다. 지은이 각막까지 받았는데, 눈이 점점 흐려지고 있다고. 현지는 말한다. 지은이 몫까지 잘 사는 모습 보여드려야 하는데, 지금의 나는 조금 그렇지 않느냐고. 결국 둘은 지은의 부모를 만나러 가지 않는다. 대신 현지는 수민에게 영상 하나를 보내준다. 지은의 심장 덕분에 다시 뛰게 된 자신의 시야를 찍은 영상을.
수빈의 가족이 느끼는 죄책감이 직접적이라면 미나와 현지의 죄책감은 다소 간접적이다. 그런데도 둘의 죄책감이 더 깊이 와닿는 건,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법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이유로 느끼는 죄책감, 누군가에겐 주어지지 않은 오늘을 잘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 초라한 자신이 부끄러울지언정 그가 내게 남겨준 것을 소중히 품고 살아가야 한다고 결심한 순간의 용기. 현지의 영상이 화면을 가득 채운 순간, 그 용기가 너무 눈부셔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고백하자면, 오랜만에 좋은 연극을 봤다고 생각하면서도 작품의 주제가 주는 윤리적 딜레마 때문에 계속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감히 이 이야기가 좋다고 말할 수 있나. 피해자나 피해자 가족의 목소리가 등장하지 않는 이 이야기가 좋았다고 말할 수 있나. 이 작품은 어떻게 그 한계를 돌파하고자 했나. 관객인 나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정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가해자의 가족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의 필연적인 한계는 오직 관객들이 메울 수 있다. 우리는 가해자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자연스레 피해자 가족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부채감 때문이든, 상상력 때문이든. 관객의 상상과 고민 안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생겨난다. 이 연극은 그때 완성될 수 있다.
연극이 "가장 밝은 빛, 가장 어두운 상태, 가장 큰 소리"를 미리 알려주며 감각적인 충격을 덜어줬으니, 나는 남겨둔 그 감각으로 연극에 담기지 않은 이야기를 상상해 보려 한다. 내가 아끼는 이야기가 완성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