틔움
1. 막혀 있던 것을 치우고 통하게 하다
2. 마음이나 가슴이 답답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다
3. 생각이나 지적 능력이 낮은 수준이나 정도에서 상당한 수준이나 정도에 이르게 하다
‘틔움’의 세 가지 사전적 정의들이다. 이건 창작의 세 단계일지도 모르겠다. 뭔가 흐릿하던 것을 써내고 그려가면 형태가 생긴다. 그러면 가슴 한구석에 얹혀 있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다. 이를 반복하며 해상도를 올린다.
그리고 그 마지막 단계는 이름이 있는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 세상으로 훌훌 보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형체가 없었던 감정들과 감각들을 그림이라는 예술로 틔워낸 아트인사이트 작가님들. 다섯 분의 틔움을 볼 수 있는 전시회 <틔움>에 다녀왔다.
<틔움> 전시의 소개는 이렇다.
"조밀하게 배열된 세상의 순서를 쫓다 보면 숨 돌릴 틈도, 미묘한 찰나를 곱씹으며 질문을 던질 겨를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외면한 의문들은 억지로 삼킨 알약처럼 명치께에 한참을 머무른다.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그 석연찮은 감각이 쉽게 가시지 않을 때는 그 이유를 차근히 살필 수밖에 없다."
이 그림들의 공통점은 누를 새도 없이 스며드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그려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복잡미묘함이 틔워낸 것은 어떤 강렬한 해결책이 아니다. 외로움과 희망을 동시에 품은 시선으로 감정을 보듬는 내가 생겼을 뿐이다. 내가 그 감정과 어떻게 지냈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나른, <다정함>
내밀한 마음을 보는 것 같은 나른 작가님의 그림. 그림 속 연인에게는 '포스필드' 같은 것이 둘러싸인 느낌이다. 오직 그들만에게 존재하는 공기와 공간을 엿보는 느낌이었다. 연인은 너무나 사랑해서, 헤어지지 않기 위해 미리 헤어지는 상상을 해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없는 행복과 슬픔이 공존하는 느낌이었다.
Mia <나는, 이제>
북아티스트 'Mia' 작가님은 관객이 직접 페이지를 넘기며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작품을 내놓았다. 전시에 발걸음한 관객이 직접 작품을 만들어가면서, 책 속에는 수많은 사람이 왔다 간다. 책 속 사물의 입장에서 보는 인간들은,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은유, <선인장>
'은유' 작가님의 그림은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를 연상케 했다. 초현실주의 세계에 내가 뚝 떨어진다면 어떨까. 정상인 것을 찾아 헤매지 않을까. '비정상'인 곳에서 '정상인' 세계를 여기서 만들어나가려고 애쓰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건 내가 비정상인걸까?
유사사, <선잠>
'유사사'님의 그림은 마치 펜화 같았다. 아주 로맨틱한 겨울 꿈속 한 장면을 촘촘하게 그리신 것 같았다. 그 꿈을 지나와 봄을 만난 느낌이다.
대성, <존재의 근원>
그리고 가장 오래 나의 눈길을 끌었던 '대성'님의 작품. 가장 밝고 통통 튀는 그림들이다. 명랑한 그림 밑 제목들은 다소 의미심장하다. 토끼의 여정을 따라가게 되는데, 한 편의 동화책을 읽은 것 같은 것 같기도 하다.
주인공 토끼는 정말 귀엽기도 하지만, 지켜주고 싶은 느낌이 가장 먼저 들었다. 계속 보고 싶은 토끼여서 엽서를 구매했다. 이 때 너무 운이 좋게도 대성 작가님을 전시장에서 만나 사인도 받을 수 있었다. 작가님과 그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아, 그런데 떠오르는 질문들은 다소 유치한 질문들 뿐이었다.
다시 기회를 얻는다면, 틔움 전시를 보기 전부터 계속 내 눈에 들어왔던 대성 작가님의 ‘존재의 근원’에 대해서 묻고 싶다. 토끼가 너무 힘든 일을 많이 겪은 나머지 존재의 근원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어 눈물을 흘리는 걸까, 아니면 존재의 근원은 누구나 다 연약하고 눈물을 흘린다는 의미였을까?
대성, <사랑의 회초리>
'존재의 근원'과 함께 또 인상 깊었던 그림은 ‘사랑의 회초리’였다. 사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으면 똑같은 사람이 되기 쉽다. 그런데 토끼는 자신의 행동에 일부러 제약을 걸어놓고 겁을 준다. 상처를 상처로 되갚지 않는다. 대성님의 따스한 작품이 그려진 엽서 한 장은 나에게, 또 다른 한 장은 친구에게 주었다.
다섯 작가님들의 작품은 모두 감정을 더없이 존중한다. 아주 사소한 감정도 놓치지 않고 고민한 흔적이 있었다. 작가님들께서 그림을 그리며 스스로 치유의 과정을 겪으신 듯했고, 관람하는 이 역시 그 과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문화는 소통이다’가 슬로건인 아트인사이트의 전시답게, 찾아온 사람들과 소통하는 공간이 전시의 비중만큼이나 컸고, 그게 <틔움>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라고 느꼈다. 관객은 스스로 ‘나를 위한 그림’을 고르고, 입찰 방식으로 구매에 참여할 수 있다.
봄이 새싹을 틔우기 시작하는 때에 본 전시회. 나의 첫 아트인사이트 문화초대였던 책 <감상의 심리학>을 떠올리며 그림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그리고 어느새 한 달이 지난 아트인사이트 활동에 대해서도 한 번 더 돌이켜본다. 개인적으로는 요즘 쓰고 기획하는 것에 있어 한계를 느끼고 있기도 했는데, 중요한 것은 틔우는 것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존재하게 두는 것. 창작은 나의 사사로운 감정 하나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전시회였다. 목적은 ‘완성’이 아니라 틔움 그 자체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틔움> 전시는 오는 4월 14일까지 성수역 인근에서 무료로 열리고 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그림으로 피어난 소중한 감정들을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