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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 돌아도 결국 그다.

  

독일 출신 유대계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동시대 매체 미학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문학비평가이자 작가다. 그는 비극적인 생애와 더불어 자본주의에 대한 특유의 사유로 분야를 막론하고 전 세계 석학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존재다.

 

벤야민은 생전 수많은 사상과 독창적인 주장을 펼치며 사회와 반응하는 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는데, 그중에서도 그를 대표하는 개념은 저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1936)에서 언급하는 ‘아우라(Aura)의 붕괴’다.


그에 따르면, 아우라는 유일무이한 원작으로서 예술이 갖는 신비함 같은 특성으로 설명되는 것으로, 영상 기술의 발달로 그 존재감이 소멸해 결국 몰락하게 되는 것이다. 아우라가 붕괴되는 현상을 벤야민은 결과적으론 예술을 발전시키는 순기능을 갖는다고 보았다.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진행되던 산업기술의 발달(복제)에 영향을 받는 예술이 상업성, 더 나아가 민주주의로 치환되는 대중성을 갖게 되어서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벤야민다운 책은 단연 『아케이드 프로젝트(Arcades Project)』(1940)다.

 

1927년부터 1940년까지 급하게 망명을 떠나며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에게 맡길 때까지 13년 동안 집필한 그의 미완된 역작이다. 그가 얼마나 많은 이론을 연구하고 당대 사회를 상징하는 무수한 텍스트와 이미지를 해독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회를 마주했는지 그 면면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지금 소개한 이 두 권의 도서를 포함해 벤야민의 다른 저서들과 관련 논문들을 읽고 분석하면서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삶을 살았는지를, 그것은 시대를 읽는 고투에 가까웠던 시도이자 실험이었음을 가늠하게 되던 때가 있었다. 벤야민의 문체는 막힘도 거침도 없다. 심지어 그 어떤 가감도 없다. 그의 문장은 벤야민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며 활자 너머로 생동하는 듯하다.

 

그런 그의 픽션들이 국내 초역 출간됐다. 바로 『고독의 이야기들(The Storyteller: Tales out of Loneliness)』(2016)이다.

 

벤야민의 소설, 꿈, 기록, 설화 등을 그러모아 한데 엮은 문학작품집이다. 이성과 환상의 영역의 경계를 허물며 그 사이의 문턱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마흔두 편의 섬광과 같은 이야기를 담았다. 각 단편이 시작되는 페이지마다 벤야민이 사랑한 것으로 알려진 스위스 태생 독일인 모더니즘 시각예술가 파울 클레(Paul Klee)의 그림을 수록해 감상의 밀도를 높였다.

 

“내가 그리워한 대상은 왜 그렇게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일그러져 있었던 것일까? 답: 꿈에서 내가 그 대상에 너무 가까이 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그때 처음으로 경험한 그리움, 아예 그리움의 대상 안으로 들어가 있던 나를 엄습했던 그 그리움은, 대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데서 비롯되어 대상을 그리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그리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복된 그리움이었다. 상상하는 것과 소유하는 것 사이의 문턱을 이미 넘어서 있는 그리움. 그런 그리움은 이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 뿐이다. 그리운 사람은 이름 속에서 생명을 얻고 몸을 바꾸고 노인이 되고 청년이 된다. 이름 속에 형상 없이 깃든 그는 모든 형상의 피난처다.”

 

“약하게 흔들리는 밤의 빛이 손과 나를 안정시켜주고 나면, 하나의 집요한 질문 말고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곤 했다. 어쩌면 그 질문은 내 방문 앞에 소음 차단용으로 달려 있던 커튼의 주름에 걸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질문은 수없이 지나간 밤들의 찌꺼기일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마저 아니라면, 그 질문은 달이 내 내면에 침투시킨 의아함의 이면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질문이었다. 세상에는 왜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세상은 왜 있는 것일까?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니, 나는 그것이 늘 놀라웠다. 그때 내게 세상이 없다니 정말일까 하는 의심이 생겼다고 해도 세상이 있다니 정말일까 하는 의심보다 정도가 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의 있음이 아무것도 없음을 향해 윙크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달은 세상의 그 있음을 상대로 가벼운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시간 창고 안에 들어가보면 사용되지 않은 하루하루가 쌓여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수천 년 전 지구가 얼려둔 나날이. 사람은 스물네 시간마다 하루를 소모하지만, 지구는 하루를 이렇게 반년에 한 번씩 소모할 뿐이다. 이곳이 아직 무사한 것은 그 덕분이다. 시간은 바람 없는 고요한 정원의 키 작은 나무에 가 닿지 못했고, 선원들은 잔잔한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배에 당도하지 못했다.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그것들 위에서 두 미광이 만나 구름을 나누어 가지듯 그것들을 나누어 가지고는 당신을 빈손으로 집으로 돌려보낸다.”

 

벤야민의 시적인 문장들이 지금 밤의 시공을 가르며 당신에게 닿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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