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는 볼 수 없었던 세상을,
그들의 시선과 역사를 빌려 완성합니다.
그렇게 그들의 마스터피스를 이해합니다.
SF를 사랑하고 마블을 분석하다, 홍지운 저자
-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웹 소설 창작 전공 교수 홍지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Augustine Park
-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고 있는 동녘 출판사의 [스토리텔링 비법 시리즈] 중 세 번째 시리즈인 [창작자를 위한 마블 스토리텔링]이 출간 되었습니다. 저자님께 축하의 말씀을 드리며, 처음 이 책을 구상할 때 어떤 책을 만들고 싶었는지에 대하여 먼저 말씀을 들어보고 싶어요.
저는 처음 책을 구상할 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상업적인 작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들을 조금 정돈해 주고 싶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상업적인 작품에 대하여 생각할 때 '금전적이 이익을 위해 만든 것이다'라고 단순하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사실 그런 작품들에도 정말 많은 디테일한 레이어들이 깔려 있어요. 어떻게 해야 보편적인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주제 의식을 명확하면서도 직관적이고, 어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전달할 수 있을지, 그리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존재들을 어떻게 하면 설득력 있게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들이 녹아들어 있죠. 이 부분들은 모두 굉장히 기술적인 영역이 많이 요구되는 동시에, 그 대상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에요.
그런데 이런 요소들이 ‘상업적인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저 '유치하다', '허무맹랑하다'라고 치부되는 걸 보면 저는 아쉽더라고요. 사실, 오히려 그런 작품일수록 다양한 층위의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동하고, 그게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치밀한 논리와 계산이 필요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더 큰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더 넓은 감수성에 어필할 수 있는 것이죠.
저는 이번 도서를 통해 ‘보편적인 감수성’에 대한 가치와 그 의미들을 조금 더 잘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스토리텔러를 위한 필독서, [창작자를 위한 마블 스토리텔링]
- 이전 시리즈인 [지브리 스토리텔링]은 스토리텔링 작법서임에도 지브리를 사랑하는 모두를 위한 책이었다고 이전 저자님께서 소개해 주셨어요. 이번 [마블 스토리텔링]도 비슷한 맥락을 공유하는지 아니면 작법서의 역할을 보다 강하게 갖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마블 같은 콘텐츠를 좋아하는 데에는 일종의 ‘관성’이 작용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저는 마블 콘텐츠를 좋아하는 분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그 관성적으로 좋아하게 되는 층 아래, 그 이상으로 더 깊이 좋아할 수 있는 요소들을 더욱 전달해 드리고 싶었어요. ‘이 작품 재미있네’ 하고 좋아해 주신 분들이, 그 안에 담긴 더 세밀한 부분들을 알게 된 후 ‘아, 이런 것까지 신경 썼구나’ 하고 한층 더 좋아하게 될 수 있는, 그런 경험을 하셨으면 했죠. 반대로, 혹시 아쉬웠던 지점이 있다면 그것 역시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구성된 것이고, 또 좋았던 부분이 있다면, 사실 그건 많은 고민과 전략이 담긴 결과라는 걸 알게 되면 더 깊은 애정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블을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 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 그렇다면 작가님께서는 '어떤 독자를 위한 책이다'라고 작가님만의 특정한 독자층을 염두에 두고 계시기도 하셨을까요?
사실 저는 상업적인 작업을 해보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 작품을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물론 깊은 주제의식이나 예술적인 성취가 중심이 되는 작품들도 저 역시 굉장히 좋아해요. 그런데 비평이나 연구의 영역에서는 그런 예술 작품들이 주로 다뤄지다 보니까, 상업적인 작품들도 사실 그에 못지않은 고민과 전략이 필요하다는 점이 종종 간과되는 것 같더라고요. 사람들이 흔히 ‘이건 그냥 돈 벌려고 만든 거잖아, 재미만 있으면 되지’라고 말하면서 그 안에 담긴 치밀한 논리나 계획은 잘 보지 않거나, 아예 무시해버리는 경우도 많고, 심지어는 만드는 사람들조차도 ‘이건 어차피 돈 벌려고 만드는 건데 우리가 뭐 그렇게까지 해야 해?’ 하는 식으로 자기 안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해버리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상업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위해 달려가는 건 너무나 중요한 일이에요. 하지만 그게 결코 다른 형태의 노력이나 고민과 괴리된 게 아니라는 점, 오히려 함께 가야 더 큰 성취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콘텐츠를 만드는 많은 분들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 프롤로그에서, 작가님께서 생각하시는 ‘유치함’이라는 개념이 마냥 유치하지는 않은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사실 저는 ‘유치함’이란 ‘진부함’과도 닿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기승전결의 익숙한 구조를 따르는 흐름 속에서도 작가님이 말씀하신 ‘깊이 있음’은 어떻게 나타난다고 보시는지, 간단하게라도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프롤로그에도 적었지만, ‘유치하다’는 말은 흔히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단순한 것으로 여겨지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게 오히려 인류 보편적인 감수성을 자극할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유치하다는 건 곧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거든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이 한 번만 살짝 비틀어지면, 더 많은 사람들, 더 많은 세대가 함께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서사가 될 수 있어요. 저는 그런 이야기들이 오히려 생명력이 강하다고 봐요.
그래서 유치함이라는 게 때로는 비아냥의 표현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은 그 안에 담긴 긍정적인 가치들이 훨씬 많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마블 영화가 뻔하다거나 진부하다는 비판도 누군가는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사실 그 안에는 굉장히 다양한 변주가 존재하여 다채로움을 이뤄내고 있고, 동시에 그 모든 변주들조차 결국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는 걸 목표로 하고 있어요. ‘진부함’과 ‘유치함’을 먼저 확실히 달성한 다음에, 각 작품마다 다른 색깔을 입혀서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 바로 마블 영화의 힘이죠.
결국 저는 그런 방식이 세상에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다고 믿어요. 단순하고 익숙한 이야기 구조 속에서도 얼마나 정교하게 감정과 메시지를 설계하느냐에 따라, 세상을 바꾸고 세상의 호소력을 갖는 데는 더 큰 에너지를 가지며 작품의 깊이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작가님께서는 이번 책을 집필하실 때 어떤 부분에 가장 신경을 쓰고 주의를 기울이셨나요? 사실 작법서라는 건 어느 정도의 전문 지식을 요구하는 장르이기도 한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접근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번 책을 쓰면서 가장 고민했던 건, ‘다른 작법서들과 어떻게 차별화를 이룰 수 있을까’였어요. 요즘은 한 달에 두세 권씩 새로운 작법서가 나올 정도로 정말 많잖아요. 저만해도 지금까지 읽은 작법서가 백 권이 넘고요. 그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기존의 이야기 구조나 작법 개념들을 ‘마블’이라는 키워드와 결합해서 어떻게 더 직관적이고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것 같아요. 작법서를 읽다 보면 정말 중요한 이야기인데도 너무 추상적으로만 다뤄져서, 결과적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런 식의 내용을 피하려고 노력했어요. 중요하지만 막연하지 않고, 실제로 도움이 되는 이야기.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가 가장 큰 과제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결국 핵심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정말 와닿을 수 있을까', ‘현장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이야기일까’를 중심에 두는 것이었던 것 같아요.
- 말씀을 듣다 보니 흥미로운 지점이 있어요. 너무 중요한 이야기는 당연히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하신 부분이 인상 깊었거든요.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작품의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말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잖아요. 어떤 작법서들은 이걸 하나의 챕터로 길게 다루기도 하죠. 물론 그게 전혀 의미 없다는 뜻은 아니에요. 주제의 중요성을 처음 고민하기 시작하는 분들에겐 분명히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이미 그런 형태의 작법서는 굉장히 많고, 또 잘 쓰인 책들도 많아요.
그래서 저는 ‘그렇다면 나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다르게, 더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요. 그리고 완성한 것이 단순히 주제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 마블이라는 키워드를 들어서 캐릭터든, 플롯이든, 주제든 상업 콘텐츠 안에서 이 요소들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으면 했죠. 다시 말해서, 이미 익숙한 개념일지라도 ‘이게 왜 중요한가’보다 ‘이게 상업적인 전략 안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보여주는 데 더 집중했어요. 주제라는 요소도, 상업 콘텐츠 안에서는 어떻게 설계되어야 더 효과적으로 작용하는지,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직관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데에 노력을 많이 들였습니다.
즉 기존 작법서와 완전히 결을 달리한다기보다는, 너무 원론적인 설명에 머무르지 않고 실전적인 관점에서 풀어보려 한 거예요. 그리고 이 실전적인 관점이 상업성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걸 독자들에게 설득하는 것, 그게 이번 작업에서 제가 가장 집중한 지점이었던 것 같아요.
- 저자의 입장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목차가 있다면 어느 부분일까요?
‘플롯’과 관련된 목차를 추천드리고 싶어요.
제가 작법 관련 강의를 하면서 가장 곤란했던 순간은 “재밌으면 됐지, 뭘 그렇게 하나하나 따져요?”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예요. 저 역시 재미를 아주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고, 창작에서 가장 우선해야 할 기준 중 하나라고 믿어요. 하지만 재미라는 것은 감각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감각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마블 같은 대형 프랜차이즈는 감독 한 명이 수십 편의 영화를 모두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여러 창작자들이 협업할 수밖에 없고, 그럴 때는 플롯이나 전략이 안정적으로 세팅되어 있어야 상업성이나 지속성이 유지될 수 있다고 보고 있어요. 그래서 재미를 감각적으로 추구하는 것도 물론 좋지만, 전략적으로 추구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 두 가지는 결코 대립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더 예민하게 해주는 관계예요. 전략을 고민하다 보면 감각이 더 섬세해지고, 감각이 예민해질수록 전략도 더 첨예하게 세울 수 있게 되거든요.
또 감각이라는 건 사실 교육으로는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감각은 체험으로 다듬어지는 거고, 다양한 인생의 경험과 멋진 작품,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거죠. 너무 뻔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해요. 반면 전략은 이론화가 가능하고, 분석도 가능해요. 그래서 저는 감각을 무시하자는 게 아니라, 전략이라는 기준 위에서 감각을 세워보자는 쪽에 가까워요. 그렇게 하면 감각은 더 예민해지고, 전략은 더 정교해질 수 있거든요.
재미를 우선해야 한다는 말을, 재미는 감각적으로 찾을 수 있다는 말을 부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해당 목차를 통해 다만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감각적인 접근을 배제하는 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상호 호응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어요.
홍지운 저자의 시선으로 마블을 깊게 살펴봅니다
- 작가님께서는 MCU에 대해 정말 깊이 있게 들여다보셨잖아요. 어떻게 보면 이번 책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다른 프랜차이즈와는 구별되는 마블 혹은 MCU만의 스토리텔링 특징이 있다면 어떤 점이라고 생각하시는지 한 번 더 짚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제가 가장 주목했던 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놀라운 ‘지속 가능성’이었어요. 지금까지 수십 편의 영화가 나왔는데, 그중 어느 것도 흥행에 완전히 실패한 적이 없다는 건 정말 전례 없는 일이거든요. 영화라는 매체는 물론이고, 모든 종류의 스토리 콘텐츠를 통틀어서도 이런 지속적인 성공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이 점만 봐도 마블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연구 대상’이자, ‘브랜드’로서 확실한 차별화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어요. 지금은 누구나 마블을 언급할 수 있고, 하나의 공통된 문화적 기억이 되었으니까요. 어떤 이야기를 하든 마블이라는 레퍼런스를 통해 소통이 가능하다는 사실만으로도, 마블은 충분히 주목받아야 할 장르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왜 마블이 이렇게 꾸준히 성공할 수 있었을까’에 대해 이야기를 해본다면 저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봐요.
첫째는, 정말 철저하게 흥행 공식을 구축하고 그 공식을 작품마다 일관되게 적용해 왔다는 점이에요.
둘째는, 마블이 자신의 세계관에 대하여 갖고 있는 진심 어린 애정이에요. 마블을 만드는 사람들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창조하는 이야기와 캐릭터에 대한 존중과 경외심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런 애정을 바탕으로 팬들의 반응과 의견도 계속해서 수용하고, 그것을 또 다른 이야기로 재생산해 나가고 있어요. 이 두 가지, 즉 ‘전략’과 ‘애정’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마블은 앞서 이야기했던 스토리텔링의 지속성과 흥행성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 개인적으로 좀 궁금한데요. 작가님께서 ‘마블의 성공 비결 중 하나가 흥행 공식을 반복해온 점’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사실 반복이라는 건 자칫하면 진부하거나 지루해질 수 있는 부분이고, 또 공식이 그렇게 확실하다면 왜 다른 콘텐츠들은 그걸 따라 해도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할까 하는 의문도 들거든요. 마블만의 차별점은 어떤 데에 있다고 보세요?
마블은 그 ‘공식’을 단순히 기계적으로 반복하지 않고 앞서 이야기한 ‘애정’을 바탕으로 활용했다는 것이 핵심이에요. 흥행 공식을 반복한다고 하더라도 원작에 대한, 혹은 팬덤에 대한 존중 없이 만드는 형태의 흥행 공식은 결국 한계점에 다다를 수밖에 없어요. 예를 들어 ‘이런 요소는 인기가 있어야 하니까 스토리적으로 무리해서라도 꼭 넣어야 해’, ‘여자 캐릭터는 이런 옷을 입고 이런 행동을 하며 이런 성격을 띠고 있어야만 해’라는 수박 겉 핥기 식의 마음으로 공식을 따르려고 한다면, 그것은 트렌드에 대한 분석도 게으른 동시에 원작에 대한 존중도 부족한 거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은 결국 그 이야기에 대하여 질려서 떠나버릴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 흥행 공식이 작동하는 원리에 대하여 보다 깊이 이해하고, 그 공식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을 넘어서서 새롭게 공식을 설립한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죠. 결국 공식에 대한 이해도와, 이 공식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이 마블의 차별점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렇다면 마블의 작품에는 그 이해도와 애정이 작품에 잘 드러나고 있겠네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해요. 흥행한 작품일수록 그 이해도와 애정의 깊이가 더 잘 드러난다고 느껴지고요.
예를 들어, 저는 개인적으로 [블랙 팬서]를 정말 인상 깊게 봤고, 마블 작품들 중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있어요. 블랙 팬서라는 캐릭터는 흑인 인권운동의 역사와 맞닿아 있는 인물이고, 마블은 그런 역사적인 배경과 맥락을 영화 안에서 너무나도 성실하고 진지하게 고찰했죠. [블랙 팬서]는 흑인 인권운동이 오늘날의 미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점에 대해 어떤 방향으로 문제의식을 담을 것인지에 대하여 무척이나 세심하고 정교하게 연결시킨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이야기 구조만 보면 이 작품도 전형적인 슈퍼 히어로 서사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어요. 하지만 그 틀 안에 담긴 캐릭터들의 본질, 즉 정체성이나 역사적인 의미는 정말 깊이 있게 설계되어 있어요. 그것들이 플롯 안에서 자연스럽게 작동한다는 점에서 [블랙 팬서]는 '캐릭터에 대한 애정', '트렌드에 대한 통찰', 그리고 '흥행 공식에 대한 이해' 이 세 가지가 정말 훌륭하게 맞물린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이 될 정도예요.
결국 [블랙 팬서]는 미국 사회가 충돌하고 있는 지점들을 작품 안에 굉장히 예술적으로 잘 녹여냈다고 생각해요.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면서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고, 그걸 슈퍼히어로라는 장르 공식 안에 자연스럽게 담아냈죠. 이런 점들은 단순히 흥행 공식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현대 미국 사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이 있었기 때문이며, 또 프랜차이즈에 대한 애정도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 세 가지가 유기적으로 잘 맞물린 작품이라고 봐요.
- 그렇다면 작가님께서 말씀하신 그 ‘트렌드’와 ‘프랜차이즈의 공식’과 더불어 ‘역사적 맥락’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마블이 세계관을 설계하는 방식과도 긴밀하게 연결된다고 볼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블랙 팬서처럼 역사적 맥락을 공유하며 세계관을 확장시킨 캐릭터에 대하여 또 다른 떠오르는 예시가 있을까요?
저는 [캡틴 아메리카]가 그런 측면에서 굉장히 영리하게 구성된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캡틴 아메리카는 ‘위대한 세대’라고 분류되는 2차 세계대전 전후, 미국이 스스로 가장 위대하다고 자부하던 시절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인물이잖아요. 그런데 마블은 그 ‘이상적인 미국’을 대표하는 인물을 ‘위대한 세대’ 이후의 혼란과 격동과 분쟁이 있었던 시기 동안 ‘냉동’ 상태로 설정해요. 그러니까 혼란스러웠던 그 시기를 완전히 회피해버린 존재로 설정한 거죠. 그리고 다시 현대에 깨어난, ‘위대한 세대’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캡틴 아메리카의 존재를 통해, ‘과연 그 시절의 가치가 지금 시대에도 유효한가? 그 시대의 정신이 지금 시대에 도움이 되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요.
그렇기 때문에 [퍼스트 어벤저스] 이후에 나온 [윈터 솔저]에서는 그런 메시지가 더 뚜렷해져요. 냉전의 어두운 그림자를 상징하는 ‘윈터 솔저’라는 캐릭터와, 과거의 이상을 대표하는 캡틴 아메리카가 충돌하잖아요. 그건 단순한 액션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가 스스로의 과거를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지에 대한 굉장히 본질적인 질문들이었다고 느꼈어요.
마블 영화를 보시는 분들 중에서는 “마블이 왜 요즘 이렇게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의아해하시는 반응을 종종 보이는데, 사실 그분들을 포함한 많은 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들은 오히려 바로 이런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질문을 던지는 [캡틴 아메리카]였던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 점에서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는 마블이 역사적 맥락을 어떻게 세계관 속에 녹여내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시인 동시에, 그러한 점을 보다 관대하고 관심 있게 바라보면 더욱 깊게 즐길 수 있는 시리즈라고 생각합니다.
- 마블이 초반부터 그런 정치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메시지를 염두 했는지 몰랐어요. 그러면, 가장 대표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 토니 스타크 역시 마찬가지로 해당 맥락을 공유하고 있을까요?
토니 스타크 역시 마찬가지예요. 이 캐릭터는 대놓고 실제 인물인 하워드 휴즈를 모델로 했고, 스타크의 아버지인 하워드 스타크 역시 미국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어떻게 보면 미국을 상징하는 그 자체인 억만장자 두 명, 하워드 휴즈와 월트 디즈니 두 인물을 모델로 하여 합쳐놓은 캐릭터거든요. 그래서 하워드 스타크가 스타크 엑스포를 열고, 스타크 엑스포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촬영 장면은 과거 월트 디즈니가 다큐멘터리에서 미래 도시를 설명하던 장면을 거의 그대로 재현했어요. 화면 구성, 제스처, 말투까지 거의 똑같죠.
이건 단순한 오마주를 넘어서, 미국이라는 나라의 성장과 자부심, 할리우드 산업, 그리고 프랜차이즈 콘텐츠의 흐름에 대한 일종의 경외심과 자기 성찰이 담겨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마블은 그런 역사적인 의미를 가볍게 지나치지 않고, 하나하나 다층적으로 쌓아올렸고, 그 또한 팬들이 오랜 시간 이 세계관을 사랑하게 되는 이유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마블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단지 겉으로 보이는 흥행 공식이나 유행만 따라가기보다는, 그 안에 담겨 있는 역사적 맥락, 시대에 대한 질문, 그리고 프랜차이즈에 대한 애정 같은 것들까지도 깊이 있게 고민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런 깊이 있는 고민이 일반적인 흥행 공식과 잘 어우러질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세심하게 설계해야 하고요.
- 프롤로그에서도 작가님께서 MCU가 상업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굉장히 탁월하게 균형을 잡은 사례라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동시에 작가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SF 장르 안에는 철학적이거나 매니악한 요소들도 분명히 존재하잖아요. 작가님은 이런 ‘SF 적 실험성’과 ‘상업성’, ‘대중성’ 사이에서 맞물리는 지점은 무엇인지, 그 세 개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SF 적 실험성, 상업성, 대중성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각각을 구분해서 바라보는 게 중요하다고 보고요.
SF라는 장르 특성상 현실이 아닌 세계를 다루기 때문에, 종종 “그건 실제가 아니잖아, 허무맹랑한 이야기야”라며 가볍게 여겨지기도 해요. 하지만 저는 오히려 SF이기 때문에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고, 더 전복적인 사고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현실을 직접 다루지 않기에 가능한 방식으로, 더욱 보편적이고 누구나 공감 가능한 방식으로 주제에 있어 직설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저는 종종 수업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상업성과 대중성, 그리고 장르적 실험성은 각각 지향점이 다를 뿐 우열이 있는 개념은 아니며, 이 세 가지 중 하나가 결여되어 있거나 하나에만 치중한다고 해서 더 우월하거나 열등한 게 아니라고요. SF라고 하면 흔히 “그거 상업적인 장르 아니야?”라고들 하지만, 사실 그렇지만도 않다고 생각해요. SF 중에는 너무 실험적이거나 철학적인 고민에 집중한 나머지, 오히려 상업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작품들도 많고요. 반대로 상업적으로는 크게 흥행했지만, 자극적인 요소만을 강조한 탓에 대중적으로는 오히려 외면받거나 충분히 소비되지 못한 경우도 있죠.
따라서 이 세 요소는 서로 충돌하는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선순환 관계 속에 있다고 봐요. 예를 들어볼게요. 예전에는 좀비물이나 슈퍼히어로물이 정말 소수의 ‘너드’들만 즐기던 장르였지만, 지금은 누구나 아는 보편적인 코드가 되었어요. 정치 비평에서도 이제는 ‘좀비’라는 키워드를 은유적으로 사용할 정도로 ‘좀비’는 대중적인 요소가 되었죠.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콘텐츠가 등장하면 그로 인해 더 실험적이거나 철학적인 작품들이 시장에 나올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반대로 매니악한 작품이 입소문을 타면서 주류 시장의 흐름을 바꾸기도 하는 거예요. 그렇게 실험과 흥행, 대중적 공감 사이의 균형이 계속 조율되면서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주는, 굉장히 건강한 생태계가 형성되는 거죠.
매니악한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대중적인 것이 되고, 그렇게 대중화된 것들이 결국에는 상업적인 성과로 이어지고, 그 상업적 성공이 다시 더 실험적이고 더 매니악한 요소들이 나올 수 있는 기반이 되죠. 이런 흐름이 계속해서 순환하면서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주는 구조라고 생각해요.
- 방금 말씀을 듣다 보니 정말 흥미로웠어요. 흔히 사람들은 말씀하신 것처럼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대해 “그런 게 현실에 어딨어”, “동화 같네” 하면서 ‘유치하다’라는 표현 아래에 두곤 하잖아요. 그런데 작가님께서는 유치함이 보편적인 감각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씀하셨고, 또 그와 동시에 정반대로 허무맹랑함이 매니악함으로도 연결된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이 상반된 듯 공통적으로 연결되는 두 감각 사이의 모순되는 거리감은 어디서 비롯된다고 보세요?
저는 유치함과 매니악함은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닮아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둘 다 ‘허무맹랑하다’는 표현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유치하다고 하면 흔히 단순하거나 현실감이 없다고 여겨지고, 매니악하다고 하면 일반적인 정서나 취향에서 좀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얼핏 보면 전혀 다른 결을 갖고 있는 것 같죠. 그런데 저는 이 둘 모두 ‘욕망의 순도’가 굉장히 높은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아주 본질적인 욕망, 원초적인 충동에서 비롯된 것들인 것이죠. 그리고 그만큼 현실을 무시하거나 초월해버릴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현실 감각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 보이고, 동시에 그래서 더 강한 욕망이랑 또다시 연결이 된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제가 정말 인상 깊게 느꼈던 것이 쥘 베른의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를 읽고 당시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 로버트 고다드 같은 과학자들이 “어떻게 하면 인간이 달에 갈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연구했다는 것이었어요. 사실 [지구에서 달까지]는 누가 봐도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잖아요. 유치하고, 매니악하고, 비현실적인 상상력이죠. 그런데 그 안에 정말 강렬한, 순도 높은 욕망이 있었던 거예요. ‘여기가 아닌 더 먼 곳으로 가고 싶다’는 아주 본질적인 충동이요.
그리고 그런 충동은 단지 책이나 영화 속에서 머무르지 않았고, 결국엔 ‘현실화의 욕망’으로 이어졌어요. 그래서 저는 유치함과 매니악함은 사실 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해요. 유치한 것은 이미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공유된 욕망이라면, 매니악한 것은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았거나 미개척 상태의 욕망이라고 볼 수 있죠. 결국 둘 다 같은 욕망의 스펙트럼 안에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해요.
- 작가님 말씀을 듣다 보니, 마블이 단순히 어린이들을 위한 슈퍼히어로 영화가 아니라 어른들의 욕망까지 사로잡은 데에는 ‘허무맹랑함’ 속의 어떤 보편적인 열망을 잘 건드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예를 들어 아이언맨 수트를 입고 싶다는 욕망도 그렇고요.
100% 동의해요. 마블이 어른들에게도 강하게 어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유치하고도 보편적인 욕망, 즉 "나도 저런 수트를 입어보고 싶다", "순간이동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같은 상상을 정면에서 다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닥터 스트레인지]에서 닥터 스트레인지가 마법으로 워프를 하여 공간을 이동잖아요. 그건 출퇴근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상상이죠. 저도 오랜 출퇴근 시간에 ‘순간 이동이 가능하다면 이런 수고는 안 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으니까요. 하하. 그러니까 마블은 단지 화려한 상상이 아니라, 실제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이나 욕망을 아주 직관적으로 건드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들이 결국엔 우리의 '꿈같은 상상'을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우리는 꿈을 더 정교하게, 더 현실에 가까운 방식으로 꿀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아이언맨 슈트도 마찬가지예요. 영화에서 보면 물론 너무도 멋있지만, 저는 이것이 단지 멋있고 강해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와야 할 미래’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거동이 불편한 노약자들이나 장애가 있으신 분들, 고된 노동을 하는 분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외골격 장비의 형태로 말이에요. 특히 노년기에는 거동이 어려워지는 순간 그 사실이 정신적인 면으로도 급속하게 영향을 미치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움직임을 도와주는 외골격 장치 같은 건 정말 필요한 기술이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지금도 쿠팡 상하차나 물류 현장에서 외골격 보조 장비들이 도입되기 시작하고 있고요. 저는 이것이 점점 더 보편화될 거라고 봐요.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아이언맨 수트라는 허구의 상상이, 누군가에게는 정말 필요한 현실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상상들이 계속 선순환되면서, 새로운 기술과 발명이 나오고, 또 다른 욕망이 촉발될 것이라고 보고 있어요.
물론 마블이 처음부터 “이걸 만들면 노약자에게 도움이 될 거야”라는 의도로 시작한 건 아니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이러한 기술의 발전이 그런 허무맹랑함을 진심으로 탐구한 창작자들이 만든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된 ‘의도치 않은 부산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상상력의 부산물들이 현실의 기술, 사회적 상상력으로 이어질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기도 하고요.
- 작가님께서 말씀하신 것 중에 또 다른 인상 깊었던 게 ‘마블은 실패를 재활용한다’는 표현이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사례들이 있었나요?
예를 들어 [시빌 워] 같은 경우가 있어요. 이건 원작 코믹스에서도 아주 대형 이벤트였고, 당시에도 팬덤 내부에서 의견이 굉장히 분분했어요. “이 내용을 영화화하는 건 너무 이르다"라는 우려도 있었고, 그 스토리라인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도 있었고요. 물론 반대로 좋아하는 팬들도 무척이나 많았죠. 그러니까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의 개념이 아닌, 팬덤 안에 ‘호불호’가 아주 명확하게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저는 영화 [시빌 워]를 보면서, 그 논란이 되었던 원작의 지점을 굉장히 전략적으로 잘 갈무리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팬덤 안에서의 피드백을 수용해서, 영화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했고, 그 결과 완성도 높은 내러티브가 나왔다고 생각해요. 그게 단순히 원작을 그대로 옮기는 게 아니라, 팬들의 반응까지 고려해 가며 새로운 형태로 풀어낸 ‘성장형 재활용’이었던 거죠.
[샹치] 같은 경우에도 이 작품에서는 아이언맨 3에서 다소 코믹하고 소모적으로 쓰였던 ‘만다린’ 캐릭터와 ‘텐 링즈’ 조직을 다시 끌고 와서 훨씬 더 풍부하고 진정성 있는 방식으로 풀어냈어요. 저 개인적으로는 그 당시 버전도 나름의 톤에 잘 맞는 선택이었다고 보지만, 팬덤 내에서는 아이언맨 3에서 해당 캐릭터가 너무 가볍게 소비됐다 아쉬움의 목소리가 있었고, 마블이 그 피드백을 실제로 반영해 [샹치]에서 훨씬 풍부하고 깊이 있는 서사로 되살려낸 거죠.
그래서 저는 간단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실패의 재활용’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이것을 단순히 ‘실패’라고 말하고 싶진 않아요. 오히려 ‘아쉬움’이나 ‘팬들의 서운함’을 진지하게 반영해서 더 큰 이야기로 확장해낸, 굉장히 성공적인 성장 사례라고 보고 있어요. 팬들의 목소리를 귀담아듣고, 거기서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이건 마블이 가진 굉장히 건강한 창작 구조라고 생각해요.
- 사실 마블은 거대한 프랜차이즈임에도 불구하고, 창작자와 팬, 작품 사이의 소통이 굉장히 실시간으로 이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창작자와 독자의 피드백 교환은 무척이나 어려운 부분임에도, 대형 프랜차이즈인 마블에서는 그게 가능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세요?
그게 가능한 이유도, 결국은 ‘애정’이라고 생각해요. 마블의 세계를 처음 만들었던 사람들, 특히 존 파브로 같은 창작자들이 마블에 대해 갖고 있었던 깊은 애정이 있었고, 그 감정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즉각적인 피드백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아이언맨 1]을 정말 많이 보았어요. 존 파브로도 정말 좋아하는 창작자고요. 그런데 어느 날 미국 드라마 [프렌즈]를 다시 보다가, 우연히 존 파브로가 모니카의 남자친구로 등장하는 걸 봤어요. 극 중에서 그는 기술에 민감한 재벌로 나오고, 격투기를 배우겠다고 나섰다가 오히려 두들겨 맞고 모니카와 헤어지는 인물이죠.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 토니 스타크를 떠올리게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토니 스타크라는 캐릭터의 원형이 사실 이미 프렌즈 속 존 파브로의 캐릭터 안에 담겨 있었다고 느꼈어요. 그때부터 이미, 아이언맨에서 구현된 토니 스타크의 모습에 대한 구상이 그 안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거죠.
물론 영화 속 토니 스타크는 코믹스 속 이미지와는 많이 달라요. 그건 존 파브로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함께 새롭게 발전시키며 재해석한 캐릭터이기 때문이고요. 그런데 저는 마블이 지금처럼 이 ‘토니 스타크’라는 캐릭터를 완성도 있게 구축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존 파브로가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이런 ‘테크니션에 민감한 재벌 캐릭터’에 대한 낭만과 열망이 아이언맨이라는 기회를 만나 폭발적으로 실현됐고, 여기에 팬덤의 호응이 더해져 함께 성장해온 결과였다고 생각해요.
그는 단지 콘텐츠를 만든 게 아니라, 자신이 오랫동안 꿈꿔왔던 어떤 이상적인 인물을 현실 속 이야기로 구현해낸 거죠.
- 이번 책을 준비하시면서 마블을 다시 깊이 들여다보셨을 것 같아요. 그렇게 새롭게 다시 보고 연구하는 과정 속에서,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흥미로운 발견이 있었을까요?
네, 정말 많았어요. 코멘터리도 찾아보고, 감독과 배우들의 인터뷰도 보고, 영화들도 다시 보면서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들이 꽤 있었죠.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이 장면은 그냥 지나쳤었는데, 이게 사실 대놓고 복선이었구나” 하는 순간들이었어요. 처음 봤을 땐 몰랐던 게, 다시 보다 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걸 발견할 때마다 굉장히 즐거웠고요.
-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이 있다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작품에 충실하고 캐릭터에 집중하며 이야기 자체에 애정을 가지고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다 보면, 원치 않아도 자연스럽게 하나의 일관성이나 흐름이 생겨나는 것 같아요. 예전에 던져졌던 어떤 장면이나 대사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의미를 갖고 돌아오고, 그런 것들이 마치 곡선을 그리듯 이야기 속에서 확장되고 깊어지는 것들을 보게 되었어요.
예를 들어, 이미 많은 분들이 이야기하신 부분이기도 합니다만, 어벤저스 1편에서 토니 스타크와 스티브 로저스가 말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있어요. 캡틴 아메리카가 “너는 슈트를 벗으면 뭐가 남느냐"라고 비난하고, 아이언맨은 “넌 약물 주입으로 만들어진 실험실 쥐일 뿐”이라고 받아치는 장면이죠. 그때는 단순한 캐릭터 충돌처럼 보였는데, 이 대사가 [엔드 게임]에 가면 완전히 다른 의미로 표현되어요.
결국 토니 스타크는 슈트가 아니라 ‘핑거 스냅’으로 모두를 구해내는, 가장 자기희생적인 영웅이 되어요. 어벤저스 1편에서 캡틴 아메리카는 토니에게 “동료를 위해 철조망 위에 몸을 던질 수 있느냐"라고 비난하죠. 그때 토니는 “아니, 그냥 철조망을 자르면 되지”라고 답하는데요. 그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처럼 들려요. 하지만 엔드게임에서는 바로 그 토니가, 모두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거는 가장 숭고한 선택을 합니다.
캡틴 아메리카 또한 ‘고결함’이 있어야만 들 수 있는 토르의 묠니르를 직접 들어 올리며, 자신의 힘이 단지 약물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적인 고결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증명해냅니다. 두 인물이 서로의 가장 큰 약점이라 여겼던 지점을 스스로 극복해 내며, 각각의 성장의 정점에 도달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거예요.
저는 이게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었는지는 솔직히 모르겠어요. 어벤저스 1편을 만들 때 “앞으로 20편쯤 더 만들고, 마지막엔 이 장면을 반전시켜야지”라고 생각했을 것 같진 않거든요. 하하. 거기다 사실 이런 건 계획을 해도 문제, 안 해도 문제라고 생각해요. 너무 계산적으로 만들면 억지스럽고, 아무 생각 없이 만들면 흐트러지거든요. 그런데 마블은 그런 복선과 회수의 리듬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감동적으로 이뤄지며 이걸 절묘하게 성공시켰어요.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고,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이야기의 순환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캐릭터에 대한 애정, 그리고 작품에 대한 집중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생각해요. 창작자가 캐릭터를 정말 깊이 이해하고, 그들이 진짜 어떤 선택을 할 사람들인지 고민하다 보면,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런 일관성과 귀결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죠. 저는 그 점에 굉장히 감탄했던 것 같아요. 그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작품을 만들면서도, 이런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분명 배울 점이 있고, 존중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홍지운 저자가 [창작자를 위한 마블 스토리텔링]을 작성하던 그 순간
- 작가님께서 프롤로그에서 “해당 도서는 마블을 처음 봤을 때의 전율을 탐구하는 과정이었다"라고 말씀해 주셨던 게 인상 깊었어요. 그런데 에필로그에서는 그 긴 여정을 이렇게 정리하셨음에도, 여전히 “아직도 탐구 중”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게 저는 너무 놀라웠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답을 찾지 못했거나, 더 탐구하고 싶은 영역이 있으신 걸까요?
그건 아마도 마블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만약 마블이 어느 지점에서 완결을 맺었다면, 저도 그 안에서의 공부를 정리하고 마무리할 수 있었겠죠. 그런데 지금도 마블은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내놓고 있고, 그만큼 저 역시 계속해서 공부할 거리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인피니티 사가]에서 제시했던 전략은 굉장히 성공적이었고, 저도 거기에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후에 이어진 [멀티버스 사가]에서는 마블 내부적으로도 살짝 흔들리는 부분들이 있었고, 동시에 뚝심 있게 밀고 나가는 지점들도 있었죠. 그래서 저는 이 [멀티버스 사가]가 완결되면, 그 안에서도 다시 한번 공부하고 정리할 지점들이 생길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요.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멀티버스 사가]에서 멈추지 않고 더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습니다.
- 이렇게 깊이 있는 분석을 하시며 "아, 이건 진짜 술술 써진다", "너무 즐겁다"라고 느낀 특정 챕터가 혹시 있으셨을까요?
사실 모든 부분이 그랬던 것 같아요. 정말 다요. 책에 담긴 내용들이 전부, 제가 사람들에게 꼭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들이라서요. 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고, 그래서 오히려 집필하는 데 걸린 시간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정말 오래 걸렸던 건 그 이전 과정이었어요. 영화를 반복해서 보고, 다시 정리하고, 고민하고, 제 안에 쌓아놓는 시간이요. 그 과정이 정말 즐거웠고, 그렇게 쌓아왔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꺼내서 담아낸 작업이었던 것 같아요.
- 그렇다면 반대로 집필하시면서 유독 까다롭거나 어렵게 느껴졌던 지점도 있으셨을까요?
‘마블의 실패나 아쉬운 지점’을 어떻게 분석하고 정리할 것인가에 대하여 까다로웠던 것 같아요.
사실 마블이 성공한 부분은 비교적 정리가 쉬워요. 명확한 흥행 성과도 있고, 반복되는 공식도 잘 보이니까요. 하지만 반대로 아쉬운 부분이나 전략의 오류로 보일 수 있는 지점들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는 꽤 고민이 많았던 부분이에요. 사실 프랜차이즈가 워낙 방대해졌다 보니 당연히 앞뒤가 안 맞는 장면들도 있고, 개봉 순서나 설정 변경 등으로 생긴 서사 상의 트러블도 존재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이걸 단순히 “이건 실패다”라고 규정해버리는 건 너무 쉬운 접근이잖아요. 저는 그보다는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그것이 구조적인 한계였는지 혹은 전략적인 판단 미스였는지를 구분해서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또 하나 어려웠던 건, 팬덤이 민감하게 여길 수 있는 부분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 거였어요. 마블 팬들은 각자 사랑하는 캐릭터나 서사에 대한 애정이 깊기 때문에, 그분들과는 다른 관점의 비판적인 시선이 자칫하면 공격처럼 다가갈 수도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런 분들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애정과 진심을 존중하면서 제 의견을 어떻게 균형 있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했어요. 그게 글을 쓰면서 가장 많이 신경 썼던 지점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 그럼 어떻게 보면, 이번 책은 작가님이 마블에 대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한껏 털어놓는 일종의 '한풀이 책' 같은 느낌도 있었겠네요.
네, 거의 그랬던 것 같아요. 정말 이만큼 이야기했으니까, 이제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해도 되겠다 싶은 그런 시간이었어요. 하나의 정리를 마쳤다는 느낌도 있고요. 약간은 긴 학습의 시간이기도 했고요.
- 그럼 작가님, 이 책을 쓰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은 많이 풀어내신 것 같아요. 하지만 반대로, 책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분량이 정해져 있다 보니, 다 담지 못해서 아쉬웠던 부분도 있으셨을 것 같아요.
플롯 공식을 좀 더 구체화해서, 실전에 쓸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해 보고 싶다는 욕심은 여전히 있어요. 이번 책은 아무래도 개괄적인 흐름을 다루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아주 기본적인 요소들만 담았거든요.
장기적인 목표는 정말로 모든 장면들을 다 분석해서, “이렇게 하면 슈퍼히어로 트릴로지까지도 설계할 수 있다"라는 식의 구체적인 플롯 템플릿을 만드는 거예요. 예전 작법서나 이번 책에서도 1편, 그러니까 ‘히어로의 기원담’에 해당하는 구조는 하나의 보기 쉬운 템플릿으로 정리해둔 바 있는데요, 앞으로는 2편, 3편의 구조나, 팀업 무비를 위한 서사 구조 같은 것도 좀 더 이론화해서 정리해 보고 싶어요.
물론 그것이 꼭 ‘정답’을 찾겠다는 건 아니에요. 다만 “이 정도쯤 하면 안정적으로 이야기 구조를 짤 수 있다"라는 하나의 기준, 하나의 레퍼런스는 만들어보고 싶어요. 그게 저의 다음 탐구 목표인 것 같아요.
마무리 지으며
- 이 책을 읽고 “나도 마블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사람에게 작가님께서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저는 무엇보다도 피상적인 부분에만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겉핥기로 따라가려 하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깊이와 애정을 충분히 들여다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콘텐츠에 대한 애정이 있으면, 그 감정은 결국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힘이 되거든요. 만드는 사람이 즐겁고 행복하면, 보는 사람도 그 에너지에 자연스럽게 끌리게 되니까요. 저는 그게 창작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마블 같은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면, 단순히 '무언가 비슷하게 따라 해보겠다'보다는, 내가 진짜 애정을 갖고 설득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그 안에 담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접근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 태도 하나하나가 결과물 안에 고스란히 녹아들게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인터뷰에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해당 인터뷰의 마무리를 지어주신다면.
디즈니와 픽사, 지브리, 그리고 MCU까지. 정말이지 지금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재미난 볼거리들이 쏟아지는 시대고 예전의 명작들을 찾아보기도 쉬워진 시대입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창작자로서 이렇게나 풍성한 시대는 없었습니다. 누구나 재미난 작품을 많이 보고 삶을 풍성하게 채울 수 있는 시대입니다.
저는 나아가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직접 만드는 시대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단계는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영화평을 쓰는 것이며, 세 번째 단계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이 말은 프랑수아 트뤼포의 인터뷰가 한국에 와전된 것이기는 합니다만, 많은 분들이 이에 공감하고 직접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뛰어든 것도 사실입니다.
저의 이 책도 그런 용기를 갖고 더 큰 사랑을 실천하려는 분들에게 약간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크나큰 영광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