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의 거짓' 오케스트라 공연 [
보스전 음악 중심, 장르 정체성 구현한 소리
공연의 대부분은 보스전 음악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자칫하면 각 곡들이 비슷하게 들릴 수 있는 구성이었다. 불안하게 떨리는 현악기의 활 놀림이 긴장감을 유발했고, 무대를 울리는 타악기의 구성이 후반부로 갈수록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선곡은 소울라이크 장르가 음악을 활용하는 방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소울라이크 게임에서는 음악이 단순히 분위기를 더하는 ‘배경’이 아니다. 플레이어는 반복된 죽음을 통해 보스의 패턴을 익히는데, 그 모든 순간에 음악은 게임의 템포를 만들어주고 감정을 더하는 역할을 한다. ‘P의 거짓’의 음악이 대부분 장중하고 극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번 공연이 보스전 음악 중심으로 구성된 건, 이 게임이 소울라이크 장르의 본질을 얼마나 잘 구현하고 있는지를 음악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비극을 품은 음색, 반도네온 — 크라트의 쓸쓸함, 피노키오의 비극
반도네오니스트 고상지가 연주를 시작한 순간, 게임 속 도시 크라트가 현실 공연장으로 스며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Charity Market’, ‘Rosa Isabelle Street’, ‘Proposal, Flower, Wolf’ 등에서 반도네온은 음악적 중심을 이루며 공연장의 분위기를 끌어갔다. 특히 ‘Proposal, Flower, Wolf’에서는 연약하면서도 단단한 피노키오의 감정이 반도네온 선율 속에 스며들며, 캐릭터의 내면을 더 입체적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비록 ‘Feel’에서는 반도네온 대신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중심에 섰지만, 재즈바의 분위기 속에서도 크라트의 감정선은 끊기지 않았다. 각 악기가 조심스레 만들어낸 잔향은 크라트라는 세계가 단지 어두운 것만은 아님을, 그 안에 숨겨진 따뜻함과 감수성 또한 품고 있음을 조용히 말해주고 있었다.
반도네온 특유의 쓸쓸하고 애절한 음색은 ‘P의 거짓’이 가진 비극적인 서사와 깊이 맞닿아 있다. 이 공연에서 반도네온은 단지 하나의 솔로 악기가 아니라, 관객이 크라트의 공기와 정서를 직접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감정의 매개체였다.
아쉬웠던 몰입, 영상과 콘셉트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았다. 가장 아쉬웠던 건 영상 연출의 부재였다. 대부분의 곡에 삽입된 영상은 단순한 일러스트 이미지였고, 게임 장면이나 동적인 연출 없이 정적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음악이 아무리 훌륭해도, 게임의 감정선이나 내러티브와 연결되는 깊은 몰입은 이루기 어려웠다.
또한, 합창이 필요한 대목에서는 실제 콰이어 대신 가상 악기를 사용해 웅장함이 줄어들었다. 공연 전체에 일관된 콘셉트나 극적 흐름이 부재했던 것도 아쉬웠다. 감성적인 곡들이 중간중간 분위기를 환기시켰지만, 이 흐름을 관통하는 명확한 서사가 있었다면 더 설득력 있는 공연이 되었을 것이다.
DLC '서곡' 미공개 OST 연주
(출처 : 스톰프뮤직 SNS)
장르와 감정을 연결하는 음악적 재구성
‘P의 거짓’은 국내에서는 낯선 소울라이크 장르를 선택해, ‘죽음’과 ‘거짓’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피노키오라는 서사에 녹여낸 게임이다. 전투 중심의 게임성, 비관적인 세계관, 그리고 감정을 배제한 인형들의 서사는 장르 특유의 미학과 철학을 관통한다.
이번 공연은 'P의 거짓'의 정체성을 음악으로 되짚는 자리였다. 전투 음악을 중심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은 소울라이크 장르의 긴장감과 고통을 다시 각인시켰고, 반도네온의 쓸쓸한 울림은 피노키오 서사가 품은 감정적 결을 되살렸다. 특히 반도네온이라는 악기가 가진 음색은 게임 속 정서와 맞물려, 이야기의 ‘외로움’과 ‘비애’를 청각적으로 상기시켰다. 게임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전투와 죽음,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존재했던 감정이, 오케스트라를 통해 더 명확하게 드러났다.
IP 확장의 흐름 안에 있는 공연
이번 공연은 단지 음악을 들려주는 팬서비스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내러티브 중심의 게임을 통해 IP를 확장한다는 네오위즈의 전략의 첫 실험이기 때문이다.
소울라이크 장르라는 정체성과, 반도네온이라는 상징적 악기를 중심에 둔 음악 구성은 게임의 세계관을 감각적으로 재해석하고, IP의 감정을 공연 형태로 옮기려는 시도로 읽힌다. DLC ‘서곡’이 말 그대로 새로운 챕터의 서막이라면, 이 공연은 그 세계를 음악으로 먼저 스포일러한, 비밀스러운 오프닝 같았다.
실제로 본 프로그램의 마지막 곡으로 앞으로 발매될 DLC ‘서곡’에 등장할 미공개 OST도 함께 연주했다. DLC와 연결되는 신곡 연주는 단순히 팬서비스를 넘어, ‘P의 거짓’ 세계관 확장의 서사를 관객에게 가장 먼저 체험하게 했다. 공연이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앞으로의 이야기를 여는 ‘프롤로그’적 장치로 작동했다.
장르와 감정을 연결하는 새로운 방식
‘P의 거짓’은 리니지라이크가 주를 이루는 국내 게임 시장에서 생소한 장르에 대한 도전은 그 자체로 의미 있었다. 그리고 완성도 높은 게임성과 서사를 통해 그 도전을 증명해냈다. 'P의 거짓' 오케스트라 공연 [Lies of P Orchestra Concert]는 소울라이크라는 장르의 특성과 피노키오라는 감성적 서사를 음악으로 엮으며, 유저들과 다시 한번 게임의 본질에 대해 소통하려 했다.
전투 음악 위주의 구성을 통해 ‘소울라이크’의 정체성을 다시금 각인시켰고, 반도네온의 쓸쓸한 울림으로 이야기의 감정적 결을 되살렸다. 음악을 통해 ‘P의 거짓’의 장르적 정체성과 감정적 깊이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또 하나의 무대였다.
그런 점에서 이 오케스트라 공연은 단순한 음악 공연이라기보다는, ‘P의 거짓’이라는 작품의 정체성과 감정을 가장 온전히 드러내는 또 하나의 표현이었다. 장르적 실험과 감정적 울림을 연결하는 새로운 방식의 무대였다. 그렇게, ‘서곡’이 시작되기 전의 이 무대는 ‘프롤로그’로서 제 역할을 완벽히 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