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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에 동의한다. 확실히 나는 만들어진 인간이다.


고등학생 때까지 나는 얼굴에 스킨도 바르지 못하고 나갈 만큼 잠이 많았다. 내가 다닌 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남녀합반이라는 말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여고를 다니는 것처럼 몸가짐을 편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 친구는 나만큼 잠이 많았다. 하지만 친구는 화장을 하지 않으면 절대 얼굴을 들고 다니지 않았다. 최소한 반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마스크를 쓰거나 책상에 담요를 깔고 누워 쉬는 시간만을 기다렸다. 쉬는 시간에도 졸려 잠을 자면 수업 시간에 일어나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는 일본어 회화 수업을 듣고 있었고, 그때마다 날아들었던 원어민 선생님의 화난 목소리가 여전히 생생하다. 化粧しないで! (화장하지 마!) 덕분에 나는 ‘화장’이라는 일본어 단어를 굳이 외울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아직 그때의 이야기를 한다. 친구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그러한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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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나는 아침마다 풀메이크업을 하고 오는 친구에게 말했다. ‘넌 어떻게 아침마다 화장을 하고 와? 난 절대 못하겠더라.’ 맹세코 그때의 나는 그 말이 친구에게 무안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것을 깨닫게 된 건 20살이 넘어서였다. 한 커뮤니티에 나와 비슷한 말을 한 유저가 글을 올렸는데, 이러한 말들이 상대방에겐 면박처럼 느껴진다는 내용이었다.


속뜻을 굳이 짐작해보자면, ‘나는 화장 안해도 얼굴 들고 다닐 만한데, 너는 하네?’라는 게 아니었을까. 어째서 그 말이 불쾌감을 주는지 아직도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 말을 들은 친구의 얼굴이 그닥 좋지만은 않았던 것을 보면, 불쾌감을 느낄 수 있는 말인 건 확실히 알겠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맨얼굴이 부끄러운 것인지 모르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수치심의 내막을 안다. 대학교 1학년, 나는 여자 대학교에 진학했다. 첫 수업 시간 학우들을 만났는데, 나는 어쩐지 내 맨얼굴이 부끄러웠다. 풋풋하게 꾸미고 온 학우들 사이에서 나는 너무 초라했고, 어딘지 성의가 없어 보이는 인간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화장을 해야할 것 같았다. 나는 조금이라도 입술에 혈색이 돌게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다크써클은 지울 수 없었다. 다음 시간부터 나는 꼭 화장을 하고 오리라 다짐했다. 그때 나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수치를 겪었고, 중고등학생 때 마주한 그 친구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로소 나는 여자로 만들어진 것이다.

 

최근 영화 <서브스턴스>가 큰 인기를 끌었다. 결말을 본 뒤 나는 일본 영화 <헬터스켈터>를 떠올렸다.


같은 직종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두 영화의 결말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서브스턴스>의 결말은 약물의 부작용으로 괴물이 된 주인공이 신년 전야제 행사에서 피를 뿜어낸다. <헬터스켈터>의 결말은 기자회견에 참석한 주인공이 스스로 눈을 찌르며 관객석으로 피를 뿜는다. 외모 강박을 다룬 두 영화의 결말이 이토록 비슷한 이유는 무엇일까?


신년 전야제와 기자 회견를 클라이스맥스의 무대로 설정한 의도는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의 눈이 있는 곳이고, 전파를 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생생히 주인공의 파멸을 목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이유는, 욕망의 객체가 되었던 신체를 보란 듯이 망가뜨리는 것에서 기묘한 희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영화는 모두 여성 연예인이 겪는 자아왜곡을 다룬다. 인물이 무너지는 경과도 비슷하다. 리리코는 전신성형의 부작용으로 온몸에 멍이 들기 시작한다. 엘리자베스는 서브스턴스의 부작용으로 급격한 노화를 겪는다. 거울 앞에 선 두 인물은 모두 자아상의 왜곡을 겪게 되고, 파멸로 치닫는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지 못하고 끝을 향해 질주한다. 그 끝에는 자신을 오로지 객체로만 바라본 시선들을 향한 피와 분노의 축제가 있을 뿐이다.


여성들은 때로 불필요한 가치를 학습하고 재생산한다. 그 기저엔 여성을 객체로 바라보는 사회가 있다. 여성에게 꾸밈의 의무를 제시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있다. 그러나 더 나은 나는 없다. 사회의 시선보다 더 날카롭고 아픈 것은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 어떤 것보다 날카롭고 선연하게 내 안을 파고든다. 그들을 가장 혹독한 시선으로 바라본 것은 리리코와 엘리자베스, 자기 자신이었다.

 

언제든 남의 줏대에 휩쓸릴 수 있는 사회에서 단단히 직시하는 것은 하나다.

 

우리에게는 그저 자신의 몸을 왜곡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눈과, 싱그러운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코, ‘복코’, ‘짝눈’, ‘꼬막눈’ 같이 불필요하게 세분화된 표현으로 자기 자신을 평가하고 폄하하지 않는 입이 필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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