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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누구든 살면서 이 말을 한 번쯤 들어보았으리라 생각한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이 말이 나온 맥락이 무엇인지가 무색하게 어떤 상황이든 도망을 가서 이른 곳이 낙원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듯 보인다. 현재의 상황에 맞서지는 못하더라도 도망은 가지 말라는 뜻인가. 다양한 의미로 다가와 곱씹어 생각하다 보면 결국 어쨌든 도망은 가지 말라는 단순한 말로 돌아온다.

 

요즘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도망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도망이 가고 싶다. 내 이름도, 나이도,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현실적으로 말해서 집에서 조금만 걸어나가도 나를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안에는 가끔 내가 아는 사람들이 보인다.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 사람들을 비롯해 아무것도 모르는 공간으로 가고 싶다고 하겠다. 이런 마음을 잘 담고 있는 영화가 한 편 있다. 2008년 일본에서 개봉한 <백만엔걸 스즈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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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토 스즈코'다. 전문대학을 졸업한 후 취직을 하지 못한 채 아르바이트를 하던 스즈코는 함께 일하는 친구와 독립을 하게 된다. 친구는 자신의 남자 친구와 셋이 살자고 하는데, 입주하는 날 둘이 헤어졌음을 알게 된다.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둘이 동거를 하게 된 스즈코. 스즈코는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남자와 다투게 되었고, 어느 사건으로 졸지에 전과자가 된다.

 

출소 후 스즈코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생활이나 주변의 시선이 편하지 않다. 그녀는 백만엔을 모아 아무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다시 백만엔을 모아 다른 곳을 떠나고, 또 백만엔이 모이면 떠나고. 그러다 어느 꽃집에서 일하며 한 남자와 사랑도 한다. 마냥 즐거울 것 같았던 이 곳에서도 일은 벌어지고, 스즈코는 이 곳에서 어떤 것 하나를 알게 된다. <백만엔걸 스즈코>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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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코가 집을 떠나 처음 간 곳은 어느 바다 마을이다. 바닷가에서 빙수를 만들거나 소시지를 구워 파는 작은 식당의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한다. 스즈코는 이곳에서 누구와 친해질 생각 없이 묵묵히 일을 하는데, 그에게 다가오는 인물이 있다. 사진 속 남자가 그렇다. 음식을 구매하며 하나 더 사서 스즈코에게 먹으라고 하며 다가오다 친구들과 하는 파티에 그를 초대하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스즈코를 데려다주며 그들이 친구라고, 소울메이트라고 생각한다고 마음을 전하는데, 스즈코는 다음 날 그곳을 떠난다. 이유는 단순했다. 백만엔을 모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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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가게 된 곳은 어느 농가. 복숭아가 재배되는 마을이다. 스즈코는 카페 사장의 도움으로 운 좋게 살 집과 일할 곳을 동시에 구하게 된다. 하는 일도 다름 아닌 복숭아 재배디. 마을 촌장을 그를 찾아와 인사하며 마을 복숭아를 홍보하는 '복숭아 아가씨'가 되어줄 것을 부탁한다. 스즈코는 이를 하겠다고 하지 않지만 촌장은 마음대로 이를 추진시키며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열기까지 한다. 스즈코는 자신은 마을 사람도 아닌데다 복숭아 아가씨를 할 수 없다고 의사를 전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참으로 냉랭하다. "도움만 받고, 우리를 돕지는 않겠다는 거야?", "복숭아 아가씨 해!" 사람들의 원성이 계속되자 스즈코는 자신이 전과가 있음을 밝히고 자리를 떠 버린다.

 

스즈코는 복숭아 농가도 떠난다. 다음은 도시로 돌아온다. 도쿄와 기차로 한 시간 남짓 거리의 꽤 큰 도시다. 스즈코는 이곳에서는 꽃집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한다. 꽃집 아르바이트생 중에는 '나카지마'라는 남자가 있었다. 스즈코는 그와 작은 도움을 주고 받고, 함께 차를 마시기도 하며 가까워진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에게 자신의 전과 사실과 백만엔이 모이면 떠나온 이야기를 하게 된다. 나카지마는 처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스즈코를 바라봐준 사람이었다. 스즈코는 그에게 사랑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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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나카지마에게마저도 상처를 받는 일이 생기고, 그에게 이별을 고한다.

 

스즈코가 떠나올 때마다 해 온 게 하나 있다. 집을 떠나기 전 동생과 했던 약속이다. 그에게 편지를 쓰는 것. 나카지마와 헤어진 후 스즈코는 처음으로 동생에게 처음 편지를 받는다. 보내기만 하던 편지에 답장이 왔다. 편지 속 내용은 타쿠야의 생활에 관한 이야기였다.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해 왔다는 것과 처음으로 그에 대응을 하였고, 그러다 어떻게 되었는지의 이야기를 한다. 동생은 자신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도 스즈코에게 전한다.

 

 

아빠, 엄마는 전학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만 나는 전에 봤던 누나 모습을 생각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치지 않겠다고 결심했어. 그러니까, 이대로 모두와 같은 중학교에 가려고 해. 시험은 안 칠 거야. 누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동생이 되도록 노력할게. 누나, 아빠, 엄마가 걱정 많이 해. 가끔은 전화 좀 해줘.

 

 

스즈코는 동생의 편지를 보고 한참을 운다.

 

원래 스즈코는 이렇게 도망만 다니는 사람은 아니었다. 원래 세상 일에 크게 관심이 없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살아온 인물이기는 했으나 묵묵히 당하고 사는 인물이 아니었다. 잠시 스즈코가 집을 처음 떠나기 전으로 돌아가보려 한다.(영화에서는 초반부에 나오는 내용이다.) 전과자가 된 후 스즈코는 장을 보고 오던 중 과거 같은 학교를 다닌 친구들을 만난다. 타쿠야는 그날도 친구들로부터 괴롬힘을 당한 뒤 돌아오고 있었고, 우연히 그 광경을 보게 된다. 스즈크는 자신을 조롱하는 친구들에게 당하기만 하지 않고 물건을 던지며 대응한다. 타쿠야는 그날 스즈코를 보며 자신 또한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스즈코는 타쿠야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전한다.


 

나는 내가 훨씬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

 

가족도, 연인도 오래 함께 있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은 안 하는 것이라고 늘 생각했어. 얌전하게, 적당이 웃다 보면 문제 없이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말이야. 어느 사이엔가 아무 말도 못 하는 관계가 되는 건 불행한 일이야.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기 마련인데 그 헤어짐이 두려워 누나는 무리를 했던 것 같아. 하지만 만나기 위한 헤어짐임을 이제 깨달았어.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졌다고 해도 조금도 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누나가 이런 말을 해도 위안이 되지는 않겠지만 타쿠야는 잘못한 거 없어. 정말 기특해. 누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망쳐 왔지만 이번에야말로... 새로운 곳에서 내 힘으로 떳떳하게 살아갈 생각이야.

 

 

친해지고 싶다는 사람이 다가올 때도,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도 스즈코는 도망을 택했다. 자신의 비밀이 드러날까 두려운 것도 있고, 그것이 밝혀지며 변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두려웠으리라 생각한다. 버림받기 전에 먼저 떠나버린 것이다. 타쿠야는 스즈코가 도망가거나 물러서지 않고 맞서는 모습에 힘을 얻었는데, 스즈코는 그 모습을 잊고 적당한 모습만을 보이고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며 전전해 왔다. 그리고 타쿠야의 '도망치지 않겠다'는 편지를 받으며 스즈코는 다시 용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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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코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을 요즘은 '회피형'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나는 안다. 회피형 연애, 갈등 회피형, 관계 회피형 등 직면하기보다 도망치는 사람들을 향해 그런 말을 쓰더라. 회피형이라는 특징이 요즘 사람들의 입에서 얼마나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이는지도 안다. 회피한다는 게 좋지 않은 결과를 여럿 가져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의 비난이 옳지 않다 판단되는 것은 나 또한 회피형 기질을 가졌기 때문일까.

 

정말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을까. 도망친 곳도 낙원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둘 다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애당초 삶에는 정답이 없다. 무엇이 무엇을 가져다 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닐지 생각한다. 내가 누구에게 용기를 줄지, 내가 누구로부터 용기를 얻을지 알 수 없다. 어떤 이별이 무엇을 줄지 알 수 없다. 두려워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상처를 받게 될까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두 시간 분량의 영화에서 큰 사건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지만 그 시간을 가는 스즈코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새 마음이 새로운 것으로 반쯤 채워진다. 비울 것이 비워진 후 찬 절반이다.

 

영화 포토로 제공되는 사진을 쓰다 보니 영화 스틸컷이 아쉽게 보이지만, <백만엔걸 스즈코>는 어느 따사롭거나 덥거나 조금 선선한 느낌의 계절감을 느끼기 좋은 영화다. 시골이 배경인 것이어서 그럴까, 그 아름다움이 잘 담겼다. 흐르는 시간이 모여 계절이 가고, 계절이 가며 달라지는 관계와 마음들을 이렇게 향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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